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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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초대
순간 황혼과 망각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어야만 했다.
“네?”
역시 어렵겠다는 말이 나올 줄 알았다. 솔직히 말해 이렇게 앞에 나서는 일 자체가 염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체념하고 있었다. 그래서 포기하고 있었다. 어차피 안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지금… 뭐라고…”
황혼과 망각은 그렇게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지만, 이미 형진은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대신 그는 종이를 꺼내놓고 거기에 무언가를 맹렬하게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조건에 대해서는 이미 들으신 바가 있겠지만, 여신님의 경우에는 상황이 조금 특수하므로 거기서 약간 더 변경이 가해져야 할 것 같습니다. 또한 지니신 힘의 위험성을 감안하면 다른 몇 분의 신에게 공증을 받는 일 또한 필요할 것 같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 그게…”
굳이 다시 했던 말을 반복할 필요도 없이, 이어진 말들은 형진이 적고 있는 것이 그녀를 위한 계약서이며 또한 그것을 작성하여 계약을 맺는다는 것을 전제로 던져지고 있었다.
그렇다. 형진은 지금 이 순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녀도 가능하다는 것을. 그녀 또한 다른 여느 신과 같아질 수 있다는 것을.
“…”
황혼과 망각은 그것을 깨닫는 순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들어 입을 가리는 순간, 지켜 보고 있던 다른 두 여신이 얼른 날듯이 다가와 그녀를 안아 주었다.
“다행이야! 축하해!”
“정말 축하해…”
잘 했다는 듯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보호와 균형의 눈에 이슬이 맺혀 있다. 그리고 대견하다는 듯이 배시시 웃고 있는 꽃과 바람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황혼과 망각은 자신도 모르게 왈칵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흐에에에엥!”
지금까지 꾹 눌러 참고 있던 무언가가 결국 견디지 못하고 터져 버린다. 오랜 세월 참고 억눌러 왔던 감정이라 그런지 한 번 터져 버리자 걷잡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다른 두 여신이 그런 황혼과 망각을 다독여 주려 했지만, 이내 울먹이다가 같이 눈물보를 터뜨려 버린다.
“이거 참…”
번개 같은 속도로 계약서를 써 내려 가던 형진은 서로 부둥켜 안고 엉엉 울고 있는 세 여신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었다. 앞 뒤 상황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자신이 여신들에게 뭔가 몹쓸 짓이라도 한 걸 줄 알겠다.
“제랄딘, 하마란을 좀 데려와 줄래?”
“네? 갑자기 왜…”
“아무래도 신뢰와 헌신께 공증을 좀 부탁해야 할 것 같아서.”
“아하. 알았어요. 바로 데려 올게요.”
굳이 신뢰와 헌신을 불러들이지 않고 공포와 죽음께 공증을 부탁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역시 신들에게도 정해진 영역이라는 것이 있게 마련이니 최대한 존중해 주는 것이 좋다.
제랄딘을 하마란에게 보내고 난 뒤 형진은 계약서의 내용을 마무리 짓고 빠진 부분이 없는지 다시 점검했다. 이런 식의 계약서를 적는 것도 벌써 세 번째. 하지만 황혼과 망각이 지닌 힘의 성격상 이전에 계약을 맺었던 다른 신들과는 아무래도 다를 수밖에 없기에 조금 더 신경을 써야만 했다.
울음을 터뜨리던 여신들이 조금 진정될 때까지 몇 번이고 계약서의 내용을 확인하고 수정하여 최종본을 만들었다. 제랄딘에 의해 불려온 하마란이 공손한 자세로 자리하자, 형진은 비로소 가벼운 헛기침을 했다.
“크흠.”
하지만 여전히 꺼이꺼이 울고 있는 여신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기에는 아무래도 좀 부족했나보다.
“크흐흐흠!”
그래서 좀 더 큰 소리로 헛기침을 했지만, 엉뚱하게도 다른 이들이 반응한다.
“빠앗! 큼! 크흠!”
“큼! 큼!”
“빠아?”
“해취!”
형진의 몸에 다닥다닥 붙어있던 아이들이 형진을 따라하기 시작한 것이다. 모습은 닮았어도 제각기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반응도 죄다 제각각이다. 참고로, 이 녀석들 태어난지 일주일 밖에 안 됐다.
하지만 그런 아이들의 합창 아닌 합창이 울려퍼지자, 여신들도 그제서야 울음을 멈추고 형진을 돌아보았다.
“잠시만요.”
“그래.”
딱히 시킨 것도 아니건만, 유아와 미엘이 다가서서 눈물로 범벅이 된 여신들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그렇게 잠시 상황 정리를 하고나서야 형진은 비로소 완성된 계약서를 여신들에게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확인해 보십시오.”
“…”
황혼과 망각은 물론이고, 다른 두 여신들 또한 동시에 계약서를 향해 고개를 내민다.
“배타적 전송권 계약서?”
보호와 균형은 물론이고 꽃과 바람이 서명했던 계약서와도 다르다. 물론 황혼과 망각 또한 배타적 전송권이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간단하게 설명 드리겠습니다.”
형진은 펜으로 계약서의 내용을 짚어가며 말을 이었다.
“배타적이라는 말은 다른 것을 제외하고 독점적으로만 성립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송권이란 무언가를 보내주는 권한을 의미하지요. 따라서 배타적 전송권이란, 독점적으로 무언가를 보내주는 권한을 의미합니다.”
“…”
설명을 들어도 뭔소린지 모르겠다. 원래부터도 좀 맹한 여신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나름 이런 방면에 대한 전문가인 제랄딘마저도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들 정도다.
“여신님의 힘은 무제한적으로 사용될 경우 큰 혼란을 초래할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합니다. 당연히 그것을 그대로 추종자나 신자들에게 공개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이 부분은 이해하고 계시겠죠?”
“네…”
“좋습니다. 따라서 신도와 추종자들을 모으기 전에, 우선 여신님이 지니신 권능을 가공할 필요가 있습니다. 적용되는 영역을 제한하고, 그것의 효과 또한 제한되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가공된 권능은 본래 여신님께서 가지고 계신 권능과는 대비되는 것이고, 또한 저의 생각이 반영되어 있으므로 그것에 대한 권리 또한 발생하게 됩니다. 때문에 가공된 권능을 신도나 다른 추종자들에게 공개함에 있어 그것을 이용하는데 필요한 권리와 의무를 제한할 필요성이 생기게 되는 것이죠.”
지금까지는 여신들이 지닌 권능 그 자체에 대해서는 손을 댈 필요 없이 그것을 활용하는 것만 생각하면 되었다. 하지만 황혼과 망각의 권능은 그것이 불가능하니, 적당히 가공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렇게 가공된 권한이라도 위험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은 마찬가지. 때문에 이것의 부여와 사용을 엄격하게 관리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여기서 말하는 배타적 전송권이란 그렇게 가공된 형태의 권능을 신도나 추종자에게 독점적으로 공급하기 위한 권리를 말합니다.”
“아…”
“이해가 되셨습니까?”
“네.”
황혼과 망각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자신의 힘을 제한하여 위험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만들겠다는 형진의 생각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고작 한 단계를 더 거치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던 무게가 한층 가벼워지게 되는 것이다.
“그럼 나머지 부분도 확인해 주십시오.”
“네.”
1. 이 계약은 ‘가공된 권능’을 발행, 판매, 유통함에 있어서 필요한 계약 당사자 간의 역할과 의무에 대한 관계를 규정함에 있다.
2. 이 계약에서 사용되는 용어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가공된 권능: 황혼과 망각이 지닌 권능의 위험성을 최소화 하여 제한된 목적에 맞게 사용이 가능하도록 가공을 거친 권능을 의미한다.
-전송: 전송이라 함은 황혼과 망각을 따르는 신도와 추종자들이 개별적으로 선택한 시간과 장소에서 수신하거나 이용할 수 있도록 ‘가공된 권능’을…
이런 식으로 꽤 긴 내용의 계약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 계약서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절대로 황혼과 망각의 권능이 제한되지 않은 형태로 발현되는 것을 철저히 제한하는 것에 있었다. 가공된 권능이 일반 신도와 추종자들에게 공개될 때는 반드시 계약에 참가한 신들의 동의가 있어야 하며, 이것의 공급 또한 무분별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리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어떻게 보면 황혼과 망각이라는 신의 존재 자체에 이중 삼중의 족쇄를 채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여신은 오히려 얼핏 철저함을 넘어 무섭다고 느껴질 정도의 이러한 제한을 반겼다. 스스로를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되더라도, 만약의 사태를 방지할 수 있는 고려 가능한 최대한의 안전장치가 마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지금까지 맺었던 다른 계약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노예 계약일 수도 있다. 다른 두 여신은 비록 빨대가 꼽히긴 했어도 이런 식으로 자유로운 의사 결정을 제한당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혼과 망각은 기쁜 표정을 지었다. 이것이라면 더 이상 방구석 폐인, 아니 방구석 폐신으로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내용의 확인이 끝나셨습니까?”
“네.”
“의문 나는 사항이나 불만 사항이 있으시다면 말씀해주십시오.”
“없어요.”
“다른 분들은?”
다른 두 여신 역시 바로 고개를 저었다. 다시 하마란을 바라봤지만, 신뢰와 헌신은 그저 계약이 온전히 상호 동의하에 이루어졌는지를 공증하는 입장이라 딱히 내용 자체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그럼…”
하지만 바로 그때, 예상치 못한 대답이 들려왔다.
[그 계약, 나도 참가하도록 하지.] [나도.]공포와 죽음, 그리고 희망과 생명이 동시에 그에게 말을 걸어온 것이다.
형진은 당황했다. 공증 역할을 맡은 신뢰와 헌신은 그렇다 쳐도, 이 두 신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답하듯 공포와 죽음이 말했다.
[불만 있냐?]“끙…”
뭐… 신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위험천만한 역할을 오직 그에게만 맡겨 놓는 것이 불안할 수도 있겠다. 하기야 공포와 죽음, 그리고 희망과 생명은 이 세계에서 손꼽히는 대신들이니 그들이 참가한다면 형진의 부담이 줄어드는 것도 사실이긴 하다.
다만 문제는, 빨대를 꼽는 이가 많아질수록 자신의 몫이 줄어든다는 점.
[사기꾼.]이 짤막한 일침은 희망과 생명의 것이었다. 하기야 공포와 죽음께서는 굳이 이런 말을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이미 속내고 뭐고 훤히 다 알고 있으니까.
설마 이제 와서 다시 잊고 있던 호구 본능을 다시 일깨우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너희들이 그렇게 내몰고 있잖아!]그거야 그렇지만. 하기야 호구 중에 호구로서 호구신의 신녀의 자리까지 올라간 유아의 내면에서라면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온통 호구스러움 뿐일 테니 강제로 호구성이 주입된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형진은 그렇게 목소리만으로도 부들부들 떨고 있다는 느낌이 여실하게 전해지는 희망과 생명의 말을 무시한 채, 한숨을 포옥 내쉬며 여신들에게 변경 사항을 통보했다.
“공포와 죽음, 그리고 희망과 생명께서도 이 계약에 참여하겠다고 의사를 보내오셨습니다.”
“네? 그 둘이요?”
“와아…”
황혼과 망각은 놀라서 눈만 크게 뜬 채 아무런 말도 못하는 상황이라, 반응은 다른 두 여신에게서만 돌아왔다.
“하하… 제가 좀 여러 신들에게 귀염을 받고 있어서요.”
곧바로 희망과 생명이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고 소리쳤지만, 형진은 그런 외침 따위 싹 무시한 채 웃는 얼굴로 황혼과 망각에게 말했다.
“자, 그럼 서명해 주실까요?”
“네…”
황혼과 망각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달래며 천천히 서명을 남겼고, 뒤이어 가공된 권능의 심의를 맡게 될 보호와 균형, 꽃과 바람이 연명으로 이름을 적었다. 세 여신의 서명을 확인한 형진이 공포와 죽음의 조정자와 희망과 생명의 대리자의 권한과 배타적 전송권을 행사할 당사자로서 서명을 마치자, 마지막으로 하마란이 계약 내용을 확인하고 신뢰와 헌신을 대리해 공증인으로서의 서명을 마쳤다.
그렇게 이전과는 달리 조금 복잡한 과정을 거쳐 계약이 완료되자, 비로소 계약 내용이 서로의 영혼에 각인되었다.
계약서가 불꽃에 휩싸여 사라져 가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고 있는 황혼과 망각을 향해, 형진은 미소를 지은 채 이렇게 말했다.
“이로써 계약이 모두 완료되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환영합니다.”
“감사… 합니다.”
황혼과 망각은 그렇게 대답하며 다시금 울먹이기 시작했다. 이래저래 참 눈물이 많은 여신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