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352
352====================
75. 초대
생각 같아서는 마음껏 울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만, 아쉽게도 형진은 그렇게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이 아니다. 대리자 직함을 달고 있는 신만 벌써 몇인지 헷갈릴 정도다.
“자, 그럼 이제 계약도 완료가 되었으니, 자세를 잡아 주시겠습니까?”
“네?”
황혼과 망각은 눈물이 그렁그렁 달린 눈으로 형진을 올려다보았다.
음, 이것도 나쁘진 않은데.
형진은 그 모습을 보고는 곧바로 스케치북을 꺼내어 여신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좋습니다. 그대로. 그대로… 네, 움직이지 마시고요.”
“…”
눈물을 글썽이며 울려고 하던 황혼과 망각은 그대로 우뚝 멈추어 서버렸다. 하지만 자세는 그대로여도 눈동자에 맺힌 감정은 전혀 다르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당혹해하는 그 감정이 또한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구나.
형진은 다른 스케치북을 꺼내 급히 여신의 표정을 담아낸 후, 앞서 그리던 스케치를 펼쳐 여신의 자세를 그리려다 얼굴을 찌푸렸다.
그렇다. 지금 여신이 걸치고 있는 것은 요정들이 즐겨 입는 노출 심한 메이드복이다. 물론 그것도 나쁘진 않지만, 신상의 소재로 쓰기엔 역시 좀 그렇다.
“림! 람!”
-넵! 스승님!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요정왕님!
손가락을 딱 하고 튕기며 부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두 명의 요정이 모습을 드러낸다.
“신상을 만들어야겠는데, 지금 모습으로는 곤란하다. 음, 여기다 뒀을 텐데.”
형진은 아틀리에의 책상을 뒤적여 이전에 그려놨던 드레스 디자인 몇 개를 꺼내 살피다가 그중 몇 개를 림과 람에게 넘겨주었다.
“이거면 되겠군. 시간이 얼마나 걸리지?”
-다섯 벌… 한 시간이면 충분합니다!
-물론 그 전에 사이즈를 철저하게 재야겠지만요.
“좋아. 바로 시작하도록!”
-넵!
형진의 허가가 떨어지자, 림은 손가락을 입에 물고는 크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어디선가 와글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아틀리에의 문이 열리며 요정들이 벌떼처럼 몰려든다.
-아유, 피부도 좋으셔라.
-어쩜 이렇게 귀여우실까.
-앙큼하기도 하셔. 감쪽같이 속았잖아요.
“에? 에에? 에에에엣?”
황혼과 망각이 당혹해 할 틈도 없이 요정들은 여신에게 달려들어 이곳저곳 그곳저곳의 사이즈를 빈틈없이 체크하기 시작한다. 어째서인지 요정들의 말투가 평소와는 다르게 아줌마틱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쟤들 왜 저래?”
-하하, 그게…
형진의 말에 림과 람은 식은땀을 삐질거릴 뿐 대답을 하지 못했고, 대신 옆에서 지켜보던 제랄딘이 피식 웃으며 이렇게 말해 주었다.
“같은 요정인줄 알고 함부로 대한 것 때문에 그러나 봐요.”
“아하…”
하기야 요정들 입장에서는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좀 음침하고 서툴고 말주변이 없는, 요정들 기준으로는 뭔가 명백하게 함량 미달로 보였던 인물이 알고 보니 여신이라니. 아무리 오늘만 사는 느낌의 요정들이라도 이건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적인 일 아니었을까. 어찌 보면 지금 요정들의 모습은 그런 과거의 일에 대한 나름의 사죄인 모양이지만, 과연 황혼과 망각이 저것을 사죄로 받아들일지는 역시 미지수가 아닐까 싶다.
“빠앗!”
“빠아아!”
“빠아?”
그런 요정들의 모습이 신기했던 것일까. 형진의 몸에 다닥다닥 붙어 있던 아이들이 그 고사리 같은 손을 움직여서 여기저기를 만지는 시늉을 하기 시작한다. 자기들 딴에는 요정들이 황혼과 망각의 사이즈를 체크하는 것을 따라하고 있는 것이다.
“어이쿠, 우리 공주님들. 아빠 옷 만들어주려고?”
“빠아?”
“크흐으…”
뭔 소리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이의 검은 눈동자를 보는 순간 형진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아이를 부둥켜안고 뺨을 비비기 시작했다.
“빠하핫!”
“오옷! 웃었다! 우리 공주님, 좋아요?”
“빠앗!”
이미 형진의 머리 속에는 이 아이들이 태어난지 고작 일주일 밖에 안 되었으며, 그나마 인간의 형상이 된 건 한 나절도 안 지났다는 사실 따윈 이미 사라져 버렸다. 하기야 보통의 아이들이라면 태어난지 일주일도 안 돼서 그렇게 옹알이를 하고 웃는 식의 행동을 보이지는 못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옆에서 비서 역할을 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제랄딘은 그런 형진과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웃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 한 구석이 괜히 쿡쿡 찌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미엘은 이미 아이를 낳았고, 유아 역시 아이를 가졌다. 비록 셋 가운데 가장 늦게 형진의 반려가 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 해도 역시 셋 가운데 유일하게 아직 소식이 없으니 아무래도 불안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뒤처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그렇게 좀 혼란스럽고 정신없는 시간이 지나고 볼이 발갛게 물든 채 가쁜 숨을 몰아쉬던 황혼과 망각이 조금 안정을 되찾자, 형진은 아이들과 노는 것을 멈춰야 한다는 아쉬움을 감춘 채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빠아?”
“이게 뭐냐고? 음… 스케치라고 하는 건데. 여신님의 신상을 만들기 위한 밑그림 같은 거야. 이렇게 스케치를 여러 개 그리고 나서 그중에서 이거다 싶은 걸 고른 다음 그걸로 신상을 만드는 거지.”
“빠아!”
“오! 우리 공주님 것도 만들어 달라고? 물론이지. 당연히 만들어야지. 이렇게 예쁜 우리 공주님의 것이라면 열 개라도, 아니 백 개라도 만들어야지!”
“빠하아!”
아무리 봐도 생쇼 같긴 하지만 서로 좋다는 데야 어쩌겠는가. 덤으로 황혼과 망각에게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설명도 하고 일거양득이다. 어째 주객전도가 된 느낌이긴 하지만, 그런 거야 아무래도 좋은 일 아니겠는가.
황혼과 망각에게 이런 저런 포즈를 취해 보이도록 한 형진은 요정들이 드레스를 만들어 오자 그것을 입게끔 한 다음,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아틀리에에 비치된 사각 거울 하나를 들게끔 했다.
“이걸요?”
“네.”
“…”
거울은 또 왜 들고 있으라고 하는 건가 싶긴 했지만, 뭔가 이유가 있겠거니 하면서 황혼과 망각은 커다란 사각거울을 들고 낑낑거리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네, 좋습니다. 좋구요.”
형진은 그 모습을 빠르게 스케치로 남긴 다음에야 비로소 황혼과 망각을 해방시켜 주었다.
“좋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당분간은 다른 여신 분들과 휴식을 취하셔도 좋습니다.”
“그냥 쉬어도 되나요?”
뭔가 달리 일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는지 그렇게 물었지만, 형진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일단 당분간은 푸욱 쉬셔도 됩니다. 저도 나름대로 준비를 해야 하니까요.”
“아…”
“일단 가장 먼저 신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아시는 지는 모르지만, 신상은 여신께서 신도들과 마주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이것이 만들어지고 나면 그 이후의 일도 제가 말씀드릴 테니, 당분간은 편안하게 쉬면서 안정을 취하시면 됩니다. 참 쉽죠?”
“알겠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보호와 균형처럼 여태껏 추종자는커녕 신도를 맞이해 본 경험조차 없었던 여신이라 형진의 설명을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뛴다. 나름 신들에게도 유유상종의 법칙은 적용이 되는 모양이다.
형진의 아틀리에를 벗어난 황혼과 망각은 비로소 보호와 균형의 집에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와아…”
아름답게 장식된 집안의 모습부터 시작해서, 정말 보는 순간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 귀여운 침대까지. 황혼과 망각으로서는 무엇 하나 감탄을 금할 수 없는 것들 뿐이다.
“멋지지?”
“응.”
“전부 진이 만들어준 거야.”
“전부?”
“응, 전부.”
대단하다. 그리고 부럽다. 황혼과 망각은 어쩐지 처음으로 욕심이라는 것이 생기는 듯한 느낌마저 받았다.
“너도 진이랑 계약했으니까, 말하면 만들어 줄 거야.”
“정말?”
“응. 하지만 요즘은 진이 여러 가지로 바쁘니까 좀 한가해 지면 부탁해.”
“알았어. 그렇게 할게.”
형진이 말한 대로 황혼과 망각은 조용히 휴식을 취하며 섬에서 지내는 형진의 식구들과 안면을 익히며 앞으로의 일에 대한 준비를 했다.
“짜안!”
“이게 뭐야?”
“배낭. 진의 일을 도울 때 쓰는 거야.”
“아…”
형진은 그냥 푹 쉬라고 했지만, 보호와 균형은 나름대로 황혼과 망각이 그의 일을 도울 때를 대비해 특훈을 준비했다.
“자, 이걸 들고 이러j게!”
“오오!”
“대단해!”
보호와 균형이 후다닥 뛰어 다니며 바닥에 흩어져 있는 잡동사니들을 얼른 집어서 배낭에 집어넣자, 지켜보던 두 여신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리며 박수를 쳤다. 지면을 미끄러지듯 달리며 바닥에 널려 있는 잡동사니를 빠짐없이 집어넣는 그녀의 날랜 몸동작은 묘기나 다름없었다.
“자아, 봤지?”
“응.”
“이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너희들 역시 어느 정도는 이 일에 숙련이 되어야 해. 진에게 도움이 되려면!”
“내가 할 수 있을까?”
“당연하지! 나도 처음엔 잘 못했는걸?”
뭔가 노력의 방향이 좀 엉뚱한 느낌이긴 하지만, 여신들은 그렇게라도 형진에게 보답하고 싶었던 모양인지 매일 땀을 뻘뻘 흘려가며 특훈을 이어갔다.
어쨌든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형진은 마침내 신상이 완성되었다면서 여신들을 불러들였다.
“이것입니다.”
“와아아아…”
그것은 덩치가 큰 사람 하나 정도를 비출 수 있을 정도의 크기를 가진 거울을 든 채 하늘로 날아오르는 황혼과 망각의 모습이었다. 드레스를 입은 채 창공을 응시하며 날아오르는 자신의 모습을 형상화한 신상을 확인한 순간, 가득이나 눈물이 많은 황혼과 망각은 다시금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것의 이름은 ‘비상’. 지금까지의 틀을 깨고 날아오르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이름을 지었습니다.”
“아…”
“하지만 기뻐하시긴 아직 이릅니다. 이것의 진면목은 지금부터니까요.”
“네?”
황혼과 망각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형진은 그런 여신을 이끌어 성물로 다가가게 한 다음 말했다.
“만져 보십시오.”
“…”
황혼과 망각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심스럽게 신상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나 터져 나오는 메시지.
[축하합니다! 성물이 탄생했습니다!] [공포와 죽음의 성도인 진에 의해서 만들어진 걸작 조각품 ‘비상’이 황혼과 망각으로부터 인정받아 성물로 각인되었습니다.] [황혼과 망각의 성물 ‘비상’에 의해 여신의 권능이 발현됩니다!] [황혼과 망각의 성물 ‘비상’은 짝을 이루는 다른 성물이 있는 장소로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줍니다.] [이동을 원하는 자는 황혼과 망각의 성물에 기원을 올리고 소정의 비용을 지불함으로서 그 권능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습니다.] [황혼과 망각의 성물은 한 사람당 하루에 한 번 사용할 수 있습니다.]그렇다. 형진이 만들어낸 성물에 담겨진 힘은 바로 공간의 경계를 넘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권능이었다. 여신이 들고 있는 거울은 바로 그 경계 자체를 형상화하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사실 형진은 경계를 넘나들어 소통한다는 식의, 어떻게 보면 막연할 수도 있는 이 권능을 어떤 방식으로 활용하는 것이 좋을지를 놓고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공간의 경계를 넘는 권능이다. 물론 이런 거창한 표현은 집어치우고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결국은 워프 포인트를 만드는 것 뿐이지만.
그러나 게임 상에서는 당연하게 사용되는 기능이더라도, 실제로 이 세계에는 무지막지한 파장을 몰고 올 수도 있다. 게다가 모처럼 애써서 만들어 놓은 우편이니 물류 서비스마저 무용지물이될 수 있고, 일만의 포로들이 피땀 흘려 만드는 도로마저 한순간에 의미 없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형진은 이 성물의 능력에 제한을 가했다. 통과할 수 있는 경계면의 크기는 덩치 큰 사람 하나가 통과할 수 있을 정도. 또한 통과하기 위해서는 기원과 함께 소정의 요금 또한 지불해야만 하며 사용 횟수도 하루에 한번으로 제한된다.
다른 여신들과는 달리, 성물을 이용할 때마다 요금을 받는 식이긴 하지만 상인이나 여행자에게 있어서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편리함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물론 마차 같은 것은 통과하기 어려우니 커다란 짐 같은 것을 옮기는 건 무리겠지만, 이것은 기존의 물류서비스나 대규모 도로 공사의 필요성을 부각시키는 일도 될 것이다.
뭐 편법으로 사람을 고용해서 바리바리 싸짊어지고 다니는 보따리 장수들이 덤으로 늘어나긴 하겠지만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은 일이다. 그건 다시 말해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그만큼 활성화된다는 얘기니까. 어차피 그런 코 묻은 돈 따위는 이미 형진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는 일이기도 하고. 물론 수화물에 대한 요금은 따로 받아야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