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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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환상향
사인조는 그녀를 내전 옆의 작은 오솔길로 인도했다. 수풀과 담벼락 등으로 가려져서 얼핏 봐서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그런 작은 길이다.
레나리스는 지금 자신이 지나고 있는 길이 다른 이들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은 비밀 통로임을 깨달았다.
커튼처럼 드리워진 덩굴이 스스로 들어 올려져 길을 연다. 길을 가득 메우고 있던 꽃들은 마치 비켜서듯 스스로 몸을 젖힌다. 군데군데 숨어있던 토끼들이 비밀 통로에 들어선 소녀들을 발견하고는 귀를 쫑긋 세운 채 바라본다.
차라리 꿈속을 헤매고 있는 거라면 그런가보다 할 텐데.
레나리스는 어쩐지 자꾸만 허벅지를 꼬집어보고 싶은 생각을 자꾸만 떠올리면서도 앞장서서 걸어가는 네 명의 소녀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걸음을 옮겼다. 이 아름답고 신비로운 곳에서 길을 잃으면 스스로는 절대로 빠져 나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 다 왔어요.”
그렇게 오솔길을 걷기를 얼마나 했을까. 마침내 앞장서서 걷고 있던 수빈이 뒤를 돌아보며 그렇게 말했다. 혹시라도 길을 잃을까봐 다른 곳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앞장선 사인방의 발끝만 보고 걷던 레나리스는 그 말을 듣고서야 고개를 들었다.
“와아아…”
그곳은 숲속에 자리 잡은 작은 오두막집이었다. 물론 작다는 것은 왕족인 레나리스의 기준이고,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는 제법 큰 규모의 통나무집이다.
그림책에서 그대로 튀어나온 것 같은 숲속의 작은 집. 레나리스는 그것을 보는 순간 따로 설명을 들은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기가 바로 여신님이 사는 곳이구나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수빈이 문을 연다. 아름과 새름은 레나리스의 손을 잡고 집 안으로 이끌었다. 승희는 그런 레나리스의 뒤를 따르며 드레스가 계단에 걸리지 않도록 잡아 주었다.
그렇게 집 안에 들어서자, 레나리스는 다시 한 번 놀랐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작은 통나무집 같았는데, 안으로 들어서자 그런 겉모습과는 또 다른 아기자기하고 예쁜 가구들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손바닥만한 인형이나 앞서 자신의 가마를 메고 있던 요정들이 쓰면 딱 알맞을 것 같은 그런 크기의 앙증맞은 가구들의 모습에 레나리스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녀도 인형집이나 가구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건 정말 급이 다르다는 말 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이쪽이에요.”
앞장 선 수빈의 말에 레나리스는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현관과 이어진 긴 복도를 따라 걸었다. 그리고 그 복도의 끝에 바로 그녀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어서오세요.”
“환영합니다.”
“기, 기다리고 있었어요.”
“…”
자그마한 단상 위에 자리 잡은 세 개의 옥좌에 그녀들이 앉아 있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어쩐지 원근감을 무시한 듯한 그런 느낌. 레나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비비고 다시 한 번 그녀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작다.
무지 작다.
어느 정도냐면, 그냥 요정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그 정도로 그녀들은 작았다.
“소개드릴게요. 여신님들이십니다.”
“에에엣?”
살짝 미소를 지은 수빈의 말에 레나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그런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자신이 그런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에 당황해서 얼른 허리를 깊이 숙여 사과했다.
“죄, 죄, 죄, 죄송합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러자 세 여신들 가운데 가장 먼저 이곳에 둥지를 튼 보호와 균형이 나름 차분한 모습으로 그 사과를 받아들였다.
“괜찮아요. 원래 처음 보는 분들은 다 그렇게 놀라곤 한답니다.”
“그, 그게…”
“그보다는, 이곳을 찾은 귀여운 아가씨의 이름을 먼저 듣고 싶은데요.”
“저는… 저는… 레나리스라고 해요. 레나리스 인스티아 라야바르트입니다. 중간이름인 인스티아가 작위명이라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인스티아 태왕녀라고 불리기도 해요. 인스티아 태왕녀는 그러니까 라야바르트 왕실의 장녀에게만 내려지는 작위인데…”
레나리스는 당황해서 묻지도 않은 얘기를 종알종알 늘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긴장한 것은 세 여신들도 마찬가지다. 그녀들은 자신들의 앞에 선 이 귀여운 왕녀가 새로운 추종자의 후보임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나리스는 그렇게 자신의 소개를 하다가 이내 그런 스스로의 모습을 깨닫고는 얼굴이 잔뜩 붉어진 채 고개를 푹 수그렸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그동안 수없이 사교계를 드나들었음에도 이런 식의 실수는 한 적이 없었다. 하기야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낼 때의 그녀는 왕실의 장녀라는 책무를 지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이렇게 스스로 소개를 하거나 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냥 지금 여신들이 그런 것처럼 높은 단상 위에 자리 잡은 의자에 앉아 예쁘게 미소를 지은 채 인사를 받아주기만 하면 됐었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불러주는 것이 좋을까요. 레나리스 왕녀? 아니면 인스티아 태왕녀?”
“그, 그냥… 레나리스라고 불러주세요.”
여신들에게 작위 같은 건 아무 의미도 없을 거라는 생각에 레나리스는 급히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보호와 균형은 웃으며 손짓했다.
“그럼 레나리스라고 부를게요.”
“네.”
“레나리스. 가까이 와주겠어요?”
“…”
여신의 말에 레나리스는 크게 심호흡을 한 다음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너무 긴장한 탓인지, 아니면 오늘따라 일이 안되려고 그런 것인지, 레나리스는 그만 자신의 치마를 밟는 바람에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앗!”
레나리스는 눈앞으로 다가오는 바닥의 모습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곧이어 다가올 고통을 예감했다.
하지만 그녀는 무릎을 찧지도 않았고 이마를 바닥에 부딪히지도 않았다. 어디선가 불어온 부드러운 바람이 그녀의 몸을 가볍게 안아 올렸기 때문이다.
“아…”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자, 세 여신 중 하나가 자신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 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레나리스는 세 여신의 모습을 자세하게 볼 수 있었다.
가운데 서 있는 여신은 토끼 귀를 닮은 무언가를 머리에 쓰고 있었으며, 전체적으로 분홍빛 톤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작은 어깨가 살짝 드러난 머메이드 드레스를 입은 것이 너무나 귀여워서 정말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꺅꺅거릴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다.
오른편에 서있는 여신은 눈이 마주친 순간 어쩐지 헉 하는 느낌이 드는 그런 매혹적인 모습이었다. 검고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은 마치 장미의 덩굴을 연상시키고, 살빛이 살짝 비쳐 보이는 하얀 드레스는 마치 꽃잎 속에 숨어있는 나비 같은 느낌이다. 살짝 위험한 느낌마저 풍기는 그런 매혹적인 여신이라고 해야 하나.
마지막으로 왼편에 서 있는 여신은, 어쩐지 조금 어두운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음침한 느낌이면서도 또 어떻게 보면 보듬어 안아주고 싶은 그런 분위기를 풍긴다. 물론 아름다운 건 분명했지만, 다른 두 여신이 밝은 햇살 속에서 피어난 그런 꽃이라면, 이 여신은 어두운 밤에 홀로 조용히 피어나 옅은 빛을 발하는 그런 꽃과 같은 느낌이다.
“괜찮은가요?”
오른편에 선 매혹적인 느낌의 여신이 조심스럽게 묻자, 얼빠진 표정으로 여신들을 바라보고 있던 레나리스는 화들짝 놀라며 얼른 몸을 일으켰다.
“괜찮아요. 도와주신 덕분에 아주 말짱해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드려요.”
“다행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배시시 웃는 여신의 모습에 레나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그리고 생각했다. 여자인 자신도 이 정도인데, 남자라면 어땠을까 하는 그런 생각 말이다.
“레나리스.”
“네.”
보호와 균형이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레나리스는 다시 자세를 바로했다.
“오늘 이렇게 레나리스를 초대한 건, 당신을 우리 셋 중 하나의 추종자로 맞이하기 위해서에요.”
“네? 추종자요?”
레나리스는 깜짝 놀랐다. 신의 추종자라니. 그건 선택받은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일 아닌가.
하지만 그녀가 미처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이해하기도 전에 세 여신이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맞아요. 우선 제 소개부터 할게요. 저는 보호와 균형입니다.”
“저는 꽃과 바람.”
“저는… 황혼과 망각… 입니다.”
그렇게 이름을 밝힌 세 여신은 레나리스가 자신의 추종자가 되면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만약 레나리스가 저의 추종자가 된다면, 당신은 두 가지 힘을 사용할 수 있어요. 하나는 보호의 권능이며, 또 하나는 균형의 권능이죠.”
“아…”
레나리스는 자신의 숙소에 있었던 풀장을 떠올렸다. 그 시원한 느낌을 다른 사람에게도 베풀어 줄 수 있는 힘이라니.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저 역시 당신에게 두 가지 힘을 줄 수 있어요. 당신이 꽃의 아름다움과 바람의 자유로움을 원한다면, 저를 선택해 주시길 바래요.”
“…”
그 말 한 마디를 건네는 동안에도 자신의 시선을 빨아들이는 듯한 꽃과 바람의 모습에 레나리스는 다시 한 번 감탄했다.
보호와 균형, 그리고 꽃과 바람. 두 여신의 힘은 간단한 설명을 들었을 뿐인데도 실로 대단한 느낌이었다. 무언가를 보호할 수 있는 힘과, 또한 언제나 신체의 균형을 유지시켜 주는 힘. 그리고 꽃의 아름다움과 바람의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힘. 어느 쪽을 선택하든 레나리스의 삶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될 것이다.
레나리스는 마지막 세 번째 여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시선을 받은 황혼과 망각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저는… 당신에게 많은 힘을 줄 수가 없어요. 제가 지닌 힘은 너무나 위험해서… 여러 가지 제약이 가해진 답니다. 다만 당신이 제 추종자가 된다면, 당신이 원할 때 언제나 당신이 원하는 장소에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제가 지금 드릴 수 있는 힘은 그 정도가 전부에요.”
어떻게 보면 별 것 아닌 얘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순간 레나리스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원할 때, 자신이 원하는 장소에 있는 것이 가능하다. 그것은 다시 말해…
“언제든 이곳에 와볼 수 있다는 얘긴가요?”
“그것도 물론 가능합니다.”
“…”
어떻게 보면 앞서의 두 여신이 제시한 것에 비해 초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레나리스는 황혼과 망각이라는 이름의 여신이 말한 것을 듣는 순간, 이것이야 말로 자신이 바라던 것임을 깨달았다. 언제나 새장 안의 새처럼 갇혀 있어야만 했던 자신을 벗어나, 원하는 곳에 언제든 갈 수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완전한 자유가 아니겠는가.
이것은 기회다.
왕실의 다른 모든 여인들이 그러하듯, 레나리스도 자유를 꿈꾸었다. 물론 혹자는 그것을 배부른 투정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저마다 바라는 이상이 다르듯 레나리스가 바라는 것은 바로 자유였다.
그런 의미에서 황혼과 망각의 힘은 너무나도 달콤한 유혹이 아닐 수 없다. 그럴 마음만 있다면 언제든 궁을 벗어나 자신의 삶을 살 수 있을 테니까.
레나리스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저는… 황혼과 망각님을 모시겠어요.”
“네?”
황혼과 망각은 깜짝 놀랐다. 그럴 수밖에 없다. 자신의 힘은 보호와 균형처럼 실용적이지도 않고, 꽃과 바람처럼 자극적이지도 않다. 게다가 다른 둘이 각각 두 가지의 힘을 제시한 것에 비해, 자신은 고작 하나의 힘만을 말했을 뿐이다. 그나마도 자신이 지닌 힘의 본질과는 다른, 철저하게 제한된 힘을.
그런데도, 그녀는 선택 받았다. 다른 두 여신을 제치고.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황혼과 망각은 감격에 겨워 하며 그렇게 눈물을 흘렸다. 다른 두 여신은 아쉬운 기색을 보였지만, 자신의 친구가 첫 번째 추종자를 맞이한 것을 진심으로 축복해 주었다.
황혼과 망각은 레나리스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어 주었다. 그러자 레나리스의 손등에 낙인이 생겨나며 그녀가 감시자라는 이름의 추종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선포되었다.
“일단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알현실로 가도록 하세요. 데리고 온 사람들이 알현을 마치고 떠날 때가 되었으니.”
“알겠습니다.”
레나리스는 자신의 손등에 새겨진 낙인을 어루만지며 조금 아쉬운 표정으로 세 여신을 바라보다가 사인방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갔다.
“축하해.”
“나도.”
“고마워…”
두 여신은 다시 울먹이려고 하는 황혼과 망각을 다독이며 다시 말했다.
“눈물 닦아. 다음 사람이 또 올 테니까.”
“잘 하면 두 번째 추종자도 바로 맞이할 수 있을지도 몰라.”
“정말?”
“응, 정말.”
황혼과 망각은 얼른 눈물을 닦고는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복도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작은 발걸음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토끼의 안내를 받으며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낸다. 레나리스와는 다른 느낌의, 하지만 역시나 귀여운 소녀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세 여신은 그렇게 말하며 새로운 소녀를 반갑게 맞이했다. 소녀는 당황했지만, 귀여운 세 여신의 모습에 홀린 듯한 모습으로 엉겁결에 인사를 건넸다. 물론 이 소녀는 우연히 이 장소에 도달한 것이 아니다. 안내역이었던 램에게서 여신에 대한 얘기를 몰래 듣고 산책 도중에 빼돌려져 이곳을 찾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은 예정대로. 아무래도 오늘 세 여신은 꽤 많은 수의 추종자를 맞이하게 될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