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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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집결
“너무 속셈이 뻔해서 하품이 나올 정도군.”
“빠아?”
“그래요. 아빠는 우리 공주님들이 훠얼씬 예쁘거든.”
“빠아!”
그렇게 형진이 집무실에 앉은 채 아기들과 놀고 있는 동안에도 알현실에서는 형진과 사절단의 비공식 알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정확히는 허세와 망상의 힘을 이용해 알현을 하고 있다고 다른 이들을 속이고 있는 것 뿐이라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들이 있는 집무실은 아래층의 알현실이 내려다보이는 형태로 되어 있었다. 어찌 보면 집무실이라기 보다는 관람석 같은 느낌이다.
“그만큼 다른 나라들이 놀랐다는 얘기도 되겠죠.”
제랄딘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쓴웃음을 지었다. 어쩐지 지금 저 아래 알현실에서 형진의 허상과 마주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에서 과거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래도 말야. 사절단 중에 다섯 나라를 제외한 모든 나라에서 공주를 참석시키다니, 너무 하지 않아? 사람을 뭘로 보고.”
형진의 말대로 이번 즉위식에 참석한 나라 대부분이 사절단에 공주, 왕녀, 황녀, 하다못해 왕가의 인척에 이르기까지 결혼 적령기 내지는 적령기에 준하는 나이대의 여성을 한 명씩 참가시키고 있었다. 어쩌다 한 명이면 심심한 공주가 외출이라도 나온 건가보다 하고 넘어갔겠지만, 이쯤 되면 저 나라들이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모를 수가 없다.
“뭘로 보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안 보이니까 저러는 것 아닐까요.”
미엘이 미지근하게 덥힌 차를 형진에게 건네며 그렇게 말했다.
“그거야 그렇지만.”
이번 즉위식에 참석하면서 각국이 가장 골치 아프게 생각했던 것은, 역시 벨크라드진 엘 파르드라는 인물에 대해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뭔가 제대로 된 싸움 한 번도 없이 어느 순간 신전 세력을 등에 업고 나타나,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엘 파르드 전역을 제압하고 즉위를 선언해 버렸다. 현재 각국의 수뇌부들이 파악하고 있는 벨크라드진이라는 인물에 대한 정보는 그 정도가 고작이다. 상대가 어떤 존재인지 모른다는 건, 그런 권력자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두려운 일이었고, 거기에 더해 신전 세력까지 등에 업고 있다면 경계의 시선을 보내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기왕이면 왕자들이 많이 와줬으면 했는데.”
아쉬운 기색이 역력한 형진의 말에 푹신한 의자에 반쯤 누운 듯한 모습으로 앉아 있던 유아가 말했다.
“신랑감이라도 알아보시려고요?”
농담 삼아 던진 말이지만, 형진은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말아.”
“빠아?”
“그럼. 우리 공주님들은 아빠가 제일 좋지?”
“빠핫!”
아기들은 아직도 이름을 제대로 짓지 못한 채 그냥 공주님들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형진도 누가 첫째고 누가 막내인지 여전히 구분을 못하고 있는 중이다. 미엘이나 여신들은 용케 구분이 되는 모양이지만, 아쉽게도 형진은 그런 식으로 구별을 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얼른 이름을 지어서 이름표라도 붙이고 다니게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긴 해도, 막상 어떤 이름을 지어야 할지 막막한 건 마찬가지다.
“왕자는 왜요? 각국의 왕실에 영향력이라도 행사하실 생각이신가요?”
미엘의 말에 형진은 이렇게 대답했다.
“비슷해. 설령 왕위에 오르지는 못하더라도 한 명쯤은 언제든 즉시 대화가 가능한 창구가 열려져 있으면 좋잖아.”
그러자 제랄딘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왕녀들도 충분히 그 정도 역할은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하지만 형진은 그녀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세상 모든 여자들이 전부 당신 같은 건 아니라고. 게다가… 왕녀들은 왕실을 떠나게 마련이니까.”
“빠앗!”
“아, 물론 우리 공주님들은 해당사항 없음. 이 아빠가 맹세하마.”
물론 신전 세력이 뒤에서 돕는다면 그녀들을 여왕으로 밀어 올리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각국의 내정에 간섭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게다가 아예 엘 파르드처럼 정치와 경제, 문화에 이르는 사회 각 분야를 신전 세력이 완전히 장악할 것이 아니라면, 그런 식의 간섭은 오히려 더 큰 반발만 불러오게 마련. 그렇게 어설프게 건드릴 바에야 차라리 처음부터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 편이 이득이다. 게다가 지배라는 것이, 꼭 각국 정부를 장악해야만 가능한 것도 아니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전 좀 걱정스러워요.”
“뭐가?”
“새롭게 추종자가 된 왕녀들이 돌아가서 그것 때문에 고초를 겪지 않을까 싶어서요.”
여신의 추종자를 건드릴 멍청이가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과거 호구신의 사제들이 겪었던 일들을 생각해 보면 절대로 문제가 없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긴. 여신들의 힘은 기본적으로 싸우는 용도로는 별로 효율적이지 않으니까.”
방어나 회피의 수단 정도라면 모를까 직접적으로 누군가를 쓰러뜨리는 힘으로는 아무래도 별로 적절치 못하다.
“그럼 역시 길드분들처럼 호신용으로 스킬 몇 가지를 알려드리는 편이 나을까요?”
“그것도 나쁘진 않지. 다만 문제는 그녀들이 이곳에 그리 오래 머물지 않으리라는 점이야.”
물론 황혼과 망각의 추종자로 선발되어 감시자라는 이명으로 불리게 된 이들이라면 얼마든지 자신의 의지로 이곳을 방문할 수 있겠지만, 보호와 균형이나 꽃과 바람의 추종자들은 그것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세계 각국을 일일이 다 찾아다니며 가르칠 수도 없는 거고, 수가 적은 현자 토끼를 가정교사로 파견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말인데, 난 그들을 길드원으로 받아들였으면 해.”
“길드원이요?”
“응. 원래는 이곳 왕성 한쪽에 학교 같은 걸 지어서 그들을 모아 놓고 가르치는 건 어떨까 생각했는데, 그렇게 되면 떨거지들이 섬 안에 바글거리는 꼴을 계속 봐야 하잖아. 그렇다고 다른 섬에 새로 학교를 만드는 건 관리하기가 너무 귀찮고.”
왕녀 하나가 유학을 하게 된다면, 거기에 딸려오는 떨거지들이 만만치 않다. 인원을 제한한다고 해도 시녀와 호위를 포함해서 몇이나 되는 떨거지가 따라오게 될 텐데, 그런 인원들이 왕성 안을 자유롭게 활보하는 꼴을 형진으로서는 두고 볼 생각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그런 식으로 왕족이 유학을 하게 되면 안부를 묻네, 필요한 물품을 전달하네 같은 여러 가지 이유로 계속 방문을 시도할 것이다.
애초에 이 섬에 왕성을 만든 이유가 무엇이던가. 다른 이들이 함부로 귀찮게 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이제와서 굳이 스스로 귀찮은 일을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길드라는 거군요.”
유아의 말에 형진은 아기 하나를 안아 올려 비행기를 태워주며 대답했다.
“맞아. 그곳에서라면 스킬이든 뭐든 자유롭게 가르칠 수가 있으니까. 다른 떨거지들이 따라붙을 염려도 없고.”
“빠하!”
나쁘지 않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아주 커다란 문제가.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어요. 하지만 괜찮을까요. 왕족쯤 되면 시간을 내기가 만만치 않을 텐데.”
제랄딘의 말대로 왕족이나 고위 귀족쯤 되면 심한 경우엔 잠을 자는 것도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못하는 것이 아니다. 혼자서 하는 것을 금지당하는 것이다. 물론 이건 각국의 풍습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씻고 입고 먹고 자는 모든 일에 시녀든 유모든 대동을 하도록 되어 있는 경우도 있고, 결혼 적령기의 여성이라면 이런 식의 통제는 더욱 엄격하게 적용된다.
하지만 형진은 제랄딘의 그런 말에 피식 웃어 버렸다.
“그건 몰래 접속한다는 전제하에서의 얘기 아닌가?”
“네? 하지만…”
“적당히 협상을 해야지. 귀국의 왕녀께서 여신께 선택을 받으셨는데, 올바른 추종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루에 몇 시간 정도는 시간을 내서 교육을 받아야 할 것 같다. 라는 식으로.”
“…”
뻔뻔하다. 받아들이기에 따라서는 왕녀들을 볼모로 잡고 있겠다는 얘기로 들릴 수도 있는 문제니까.
“뭐… 애초에 나한테 떠넘기려고 보낸 왕녀들이니까, 의외로 별 문제는 없을 거야.”
다만 왕녀들을 팔아먹은 것에 대한 반대급부를 노리는 자들은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것도 형진으로서는 응할 의무가 없다. 애초에 그가 세 여신의 대리자라는 사실은 식구들만 알고 있는 얘기. 즉, 엘 파르드의 왕이라는 직책은 신과 인간 사이에 벌어진 일들을 조율해야만 하는 의무가 전혀 없다.
“그건 그렇다 치고.”
형진은 비행기를 태워주고 있던 아기를 품에 안으며 마눌들을 향해 말했다.
“내일 있을 즉위식 얘긴데.”
그러자 즉각적으로 제랄딘이 손을 내저으며 반대 의사를 표했다.
“전 안 돼요.”
형진은 그녀의 반응에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직 본론도 말 안했거든?”
“즉위식 때 옆에 서라는 말씀이잖아요.”
“…”
그렇다. 지금 형진이 마눌들에게 하려던 말은 바로 즉위식 때 왕비로서 자신의 옆 자리를 지켜달라는 것이다.
“왜? 혹시 아버지 때문에 그래?”
형진의 말에 제랄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미엘 언니야 그렇다 쳐도, 저는 얼굴이 너무 많이 알려졌어요. 제가 만약 당신 곁에 선다면 다른 나라들은 엘 파르드가 라야바르트와 동맹을 맺었다고 생각할 거고, 라야바르트 왕실은 브라드로슈 가문이 대미궁 공략에 실패한 것이 고의였다고 생각할 거에요. 그건 어느 쪽의 입장에서도 좋은 일이 아니죠.”
일리 있는 얘기다. 특히 라야바르트 왕실의 경우엔 그렇지 않아도 브라드로슈 가문에 대해 경계를 하고 있는 마당이니 이번 일을 기회로 정치적으로든 경제적으로는 공세를 취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한동안 종적을 감추었던 브라드로슈의 금지옥엽이 엘 파르드의 왕비로 모습을 나타내면 누구든 이런 저런 내막을 의심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하지만 형진은 그런 제랄딘의 말에 피식 웃어 버렸다.
“그럼 제랄딘인 걸 못 알아차리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네?”
“잊었어? 지금 이 섬 전체에 허세와 망상의 힘이 펼쳐져 있다는 사실을.”
“…”
형진의 말대로 지금 이 섬은 허세와 망상의 단장을 통해 발현된 망살 필드의 영향을 받고 있다. 단순히 섬을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이 함부로 들어와서는 안 되는 장소, 이를 테면 여신이 머물고 있는 집으로 통하는 비밀의 길 같은 곳도 전부 허세와 망상의 힘으로 보호되고 있는 중이다. 이곳에서라면 제랄딘의 외모를 살짝 바꿔서 다른 이들의 시선을 속이는 건 일도 아니다.
“어차피 한 번 뿐이긴 하지만, 그래서 난 이번 즉위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생각 같아서는 속이는 것 없이 정정당당하게 드러내 보이고 싶지만, 제랄딘이 곤란할 것 같아서 이 정도로 참는 거라고.”
“진…”
유아의 경우엔 희망과 생명의 신녀이니 문제될 것이 없다. 미엘의 경우에는 라야바르트 쪽에서 알아볼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귀족이 아니니 역시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제랄딘은 어쩐지 자신만이 형진에게 짐이 되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에 한숨을 쉬면서도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할 수 밖에 없었다.
“알았어요.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할 수 없죠.”
“좋아. 잘 생각했어.”
형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기들이 정기를 배불리 먹고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내일은 바쁠 테니까, 이만 가서 쉬자.”
“네.”
그렇게 조금 정신없는 하루가 지나고 마침내 다음 날이 되었다.
형진을 비롯한 식구들은 조금 느긋하게 잠에서 깨어났다. 보통 이런 날은 일찍부터 일어나 분주하게 준비를 해야 정상이겠지만, 형진은 오히려 평소보다 더 늦게 일어나 버렸다. 오히려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서 부산을 떠는 것은 각국에서 초청된 사절들 쪽이었다.
이런 것은 어떻게 보면 대수롭지 않은, 별 것 아닌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바꿔 생각해 보면 새롭게 탄생한 엘 파르드라는 국가의 위상을 가장 확실하게 드러내 보이는 부분일 수도 있었다.
느긋하고 여유롭게 식사를 마친 식구들은 이내 요정들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고 식이 열리는 장소로 나아갔다.
즉위식이 열리는 장소는, 내전 앞에 넓게 펼쳐진 광장이었다. 이 광장은 사열을 겸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곳이었지만, 지금은 엘 파르드 각지에서 올라온 인파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형진이 느긋하게 아침 식사를 하는 동안, 신전에 배치된 성물을 통해 주민들이 이곳으로 넘어온 것이다.
“세상에…”
“언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각국의 사절단들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대규모 인파들의 모습을 보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얼추 잡아도 몇만은 훌쩍 넘을 것 같은 숫자의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광장을 가득 메운 채 새로운 엘 파르드의 왕이 즉위하는 모습을 보려고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도 충분히 연출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문제는 그 많은 인원들이 아침나절 잠깐 동안 동원된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바꿔 말하자면 그럴 의도가 있을 경우 언제든 이 정도의 병력을 왕성으로 불러들이는 것이 가능하다는 의미도 된다.
말이 쉬워서 몇만이지, 그 정도의 병력을 모으고 관리하는 건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각지에 흩어진 병력을 한 곳으로 모으는 데만도 짧게는 몇 주에서 길게는 몇 달이나 걸리는 것이 보통이다. 전투 준비를 하는 것도 아니고 병력을 집결하는 데만 그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이제 사절단들은 완전히 질려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침묵하고 있는 사절단 앞에, 마침내 새로운 엘 파르드의 왕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