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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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순회공연
뒤따르는 파티원들이 말로는 못하고 표정만으로 아비규환에 가까운 감정을 표현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형진은 속으로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여자들이 도망치는 모습을 보고 이쪽에 통로가 있겠거니 하고 아무 생각 없이 인스턴트 킬을 썼는데, 저질러 놓고 나서야 그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일인지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특별히 문제 될 일도 없을 것 같다. 어차피 이 거짓된 천국은 이미 공포와 죽음에 의해 완전히 장악된 상태이고, 기존에 게임을 관리하던 운영자들은 사실상 장식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전락하여 월급 도둑질이나 하고 있는 중이다.
즉, 자신이 지금 저지른 일이 유저 커뮤니티에서 이슈가 된다 해도 제재할 방법 자체가 없는 것이다.
“방금 건, 비밀입니다.”
“…”
제재할 방법이 없다고는 해도 역시 대놓고 너무 드러내는 건 좋지 않은 일이라,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대며 그렇게 말했다. 파티원들은 태연한 그의 모습에 잠시 입만 벙긋거리다가 이내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비밀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는 유대감이 형성된다. 비밀이라는 단어 자체가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자신들만의 은밀한 무언가를 말하는 것이니까. 만약 그 비밀이 나쁜 짓이라면, 사람들은 이러한 유대감을 의리라는 단어로 포장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어느 쪽으로 가면 됩니까.”
“그러니까… 이쪽입니다.”
형진은 파티장이 가리킨 방향을 흘깃 보고는 곧바로 다시 전율의 질주를 발동했다. 파티원들은 무너져 내린 벽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형진이 다시금 앞으로 달려 나가자 화들짝 놀라며 그 뒤를 따랐다.
[들었지? 다른 데 가서 말하지 마.] [물론이야.]파티장은 길챗으로 그렇게 함구령을 내렸다. 괜히 이 일이 퍼져 나가봐야 자신들에게 득이 될 것이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버그 플레이라는 확정적인 단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뭔가 자신들에게 해를 끼쳐서 억하심정을 느낄 만한 일도 없었다. 만약 버그가 아니라 단순한 히든 피스인데 설레발을 치거나 한 것이라면, 자신들의 길드는 육식 길드들도 감히 범접할 엄두를 못 내는 최강의 길드에게 찍혀서 그날로 게임을 접어야 할 수도 있다.
본래는 네 번째 보스에게서 열쇠를 얻은 다음 통로를 열고 들어가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성 안을 통과해 최종 보스가 있는 장소로 향하는 것이 기본적인 흐름이지만, 형진이 벽을 무너뜨리는 바람에 그 중간 과정이 사라지고 곧바로 최종 보스가 머물고 있는 알현실로 진입할 수 있었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을 단숨에 쓰러뜨린 다음, 문을 부수고 알현실로 진입하자 호위 기사들이 몰려나와 앞을 가로막는다.
지금까지 지나왔던 다른 통로들과는 달리, 알현실은 크고 넓은 공간을 자랑하고 있었다. 주위를 한 번 스윽 훑어 본 형진은 호위 기사들과 그 뒤에 선 마법사들의 모습을 바라보고는 짧은 기합성과 함께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합!”
가장 먼저 형진의 눈앞으로 다가온 것은 각기 다른 무기를 든 세 명의 기사였다. 가장 선두에서 방패를 들고 차지를 시도하는 기사를 향해 형진이 주먹을 휘두르자 용오름이 작렬한다.
“으악!”
갑자기 튀어나온 회오리 바람에 기사 하나가 휘말려 공중으로 떠오르자, 뒤따르던 두 명의 기사는 주춤하며 달려들던 속도를 늦추었다. 하지만 그들이 미처 태세를 갖추기도 전에, 형진이 그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파팍!
[인스턴트 킬! ‘반란군 호위 기사’가 죽었습니다!] [인스턴트 킬! ‘반란군 호위 기사’가 죽었습니다!]자신들의 틈으로 파고든 형진의 모습에 반응할 틈도 없이, 기사들은 순간적으로 비집고 들어오 검은 꼬리의 날카로운 일격을 견디지 못하고 룻을 떨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콰아아!
바로 그때, 형진에게 시뻘건 불덩이 하나가 날아들었다. 기사들의 뒤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법사가 공격 마법을 발동한 것이다.
하지만 형진은 개의치 않고 불덩이를 향해 정면으로 달려들었고, 마법이 코앞으로 다가선 순간 불덩이를 향해 일격을 가했다.
[인스턴트 킬! ‘화염구 Lv.34’가 소멸했습니다!]은밀하게 날아드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대문짝만한 마법 따위, 형진에게는 좋은 표적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으아아아!”
그때 용오름에 의해 허공으로 날아올랐던 기사가 천장에 부딪히고는 지면으로 곤두박질쳤다. 형진은 허우적거리며 떨어져 내리는 기사를 흘깃 보았고, 다음 순간 그의 몸에서 뻗어 나온 검은 창날 같은 꼬리가 기사의 몸을 통째로 꿰뚫어 버렸다.
[인스턴트 킬! ‘반란군 호위 기사’가 죽었습니다!]헐레벌떡 알현실에 들어온 파티원들이 본 것은 떨어져 내리는 기사가 단숨에 꼬치구이 신세가 되어 버리는 광경이었다.
사실 말이 나와서 얘기지만, 보스룸의 호위기사들은 사실상의 준보스급 몹으로서 가장 처음 등장했던 방패 기사보다 조금 떨어지는 수준의 능력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꽤 귀찮은 상대다. 헬리오베스 인던에서 특히 탱커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인데, 어그로 관리를 잘못해서 법사나 힐러에게 호위기사들이 붙어 버리면 상당히 골치 아파진다. 단순히 공략이 까다로워지는 것을 넘어 한순간에 파티가 전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헐…”
이쯤 되면 이미 일반적인 공략법 따윈 의미가 없다. 때문에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할지 몰라 파티원들이 멀거니 보고 있는 동안, 마침내 최종 보스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앞으로 나섰다.
최종 보스답게 덩치가 상당히 크다. 덩치라면 어디 가서 꿇리지 않는 할을 옆에 세워놔도 머리 하나는 더 클 것 같은 느낌의 근육질이라고나 할까.
보스는 옥좌에서 일어서더니, 세 명의 시종이 낑낑거리며 들고 온 거대한 할버드를 한 손으로 움켜쥔 채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며 말했다.
“후… 내 운도 여기까지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목을 내놓을 수는 없는 일. 자아, 와라! 내가 바로… 꽥!”
설마 했던 파티원들은 길챗에서 상황을 알려달라고 아우성치는 다른 길드원들의 외침조차 잊은 채 그냥 말문이 막혀 버렸다.
중간 보스들이야 그렇다 쳐도, 최종 보스는 피 게이지만 다섯 칸이 넘어가는 괴물이다. 그 다섯 줄의 피 게이지가 갑자기 꽥 하는 소리와 함께 주우욱 내려가 버리더니 바닥을 찍는다. 혹시 뭘 잘못 봤나 싶었지만, 다음 순간 보스가 썩은 고목 나무처럼 뒤로 쿵 하고 넘어가 버리는 모습이 이어지고는 그들 앞에 메시지가 나타난다.
[축하합니다! 인스턴스 던전 ‘헬리오베스 요새 공략전’이 클리어 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최단 시간 클리어 기록을 갱신했습니다! 명예의 전당에 당신의 이름이 기록됩니다!]그리고 이어지는 형진의 한 마디.
“수고하셨습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잠시 멍하니 서있던 파티장 천둥검박달재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본래 헬리오베스 요새 공략전은 아무리 빨리 클리어해도 최소 30분은 걸리는 던전이다. 최초 입장시에 10분이라는 제한시간이 나타나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세 번째 보스를 쓰러뜨리고 수문을 통과하는 데까지만 적용되는 제한 시간이다. 열쇠를 얻기 위해 네 번째 보스를 쓰러뜨리고 성 안쪽에서의 난전을 돌파한 다음 최종 보스를 때려잡는데 걸리는 시간까지 따지면 아무리 장비가 좋고 경험이 풍부한 파티라도 그 정도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가 이 인던을 클리어하는데 걸린 시간은 아무리 길게 잡아도 오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나마도 길을 몰라서 중간에 잠깐씩 멈춰선 탓에 그런 것이고, 정말 다 무시하고 최대한의 속도로 돌파한다면 이삼분 안에 클리어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파티장은 경험치를 확인해 보았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그냥 열심히 뒤따라서 달리기만 했는데, 경험치가 5퍼센트나 올라 있었다. 인던 하나를 클리어 하는데 걸리는 시간에 입장료를 계산하고 입장하는 시간까지 잡아 3분으로 계산한다면, 1시간마다 1레벨씩 올릴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본래대로라면 10시간은 걸려야 1레벨을 올릴 수 있는데, 이 남자를 따라다니기만 하면 그 시간이 십 분의 일로 확 줄어버리는 것이다!
이건 기회다. 대박이다. 절대 놓칠 수 없는 기회다!
템 같은 건 다 줘버려도 상관없다. 입장료는 물론이고 수고비를 줘도 이건 남는 장사다! 그렇지 않은가. 말이 쉬워서 열 시간이지, 그 시간 동안 계속 같은 던전을 도는 건 노가다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그 시간을 십 분의 일로 줄여버릴 수 있는 기회가 제발로 굴러들어왔다.
계산이 끝난 파티장 천둥검박달재는 다급하게 형진에게 말했다.
“몇 판 더 도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냥 경험치만 먹겠습니다. 입장료도 내드리고요. 수고비도 따로 챙겨드리겠습니다.”
하지만 형진은 대번에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만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선약이 있어서요. 실례하겠습니다.”
“아… 그, 그렇군요. 그럼 친구 추가라도…”
파티장은 다급하게 그렇게 말했지만, 이미 형진은 인던으로부터 빠져 나간 뒤였다.
[말씀하신 자료 준비됐어요!] [감사합니다. 수빈님.]처음부터 이들과 함께 한 것은 수빈이 자료를 찾는 동안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였다. 만약 수빈이 자료를 찾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면 그 시간 동안 이 파티원들을 안내역으로 삼아 인던 탐사를 하고 다녔겠지만, 불행히도 수빈은 무척이나 성실한 여성이었다.
[길드성에 계십니까?] [네! 아… 자료라면 게임 내의 메일로 전송해 드려도 되는데요.] [어차피 돌아야 하는 인던이라면 경험치라도 나눠 먹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해서요.]타나토스 출신들은 엘리시온에 접속하기는 했어도 아바타 상태가 아닌지라 경험치나 레벨업의 도움을 받을 수 없지만, 수빈을 비롯한 신입 길드원 사인방은 충분히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어차피 인던을 돌고 보스를 잡아야 한다면, 경험치를 그냥 버릴 것이 아니라 활용할 방법을 찾는 것이 좋다.
[하지만… 그건 저희들이 너무 죄송스러워서…] [괜찮습니다. 그럼 바로 가겠습니다.] [네!]형진은 일단 근처의 워프 포인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요정의 문에 너무 익숙해졌는지 일일이 워프 포인트를 타고 제국의 수도 이슬라로 돌아가서 길드성으로 돌아가는 것조차 귀찮게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서는 사용해 본 일이 없네.”
이전에는 이 거짓된 천국의 실체에 대해 의문점이 많았던 탓에 요정의 문을 써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어차피 허세와 망상의 힘이 깃든 것은 마찬가지더라도, 형진에게는 이 거짓된 천국이라는 공간에 대한 개념이 게임으로 완전히 굳어져 버린 상황이라 미처 요정의 문을 활용할 생각을 떠올리지 못한 것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조금 바뀌었다. 황혼과 망각의 힘을 통해 이 공간이 단순히 데이터로 구현된 가상현실이 아니라, 망상의 힘이 가미된 또다른 현실이라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혹시 요정의 문을 쓸 수도 있지 않을까.
형진은 워프 포인트를 향해 걸음을 옮기다가 역시 한 번 시험해 보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하지만 다음 순간 공포와 죽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둬.] “네?”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걸음을 멈추자 공포와 죽음이 다시 말했다.
[요정의 문을 사용해서 드나들어도 되는 거였다면, 애초에 그렇게 하라고 했을 거다.] “아…”물론 대미궁의 코어가 지닌 능력이 단지 엘리시온에 접속하는 것만은 아니지만, 요정의 문으로도 출입하는데 문제가 없는 것이었다면, 처음부터 그것을 알려줬을 거라는 얘기다.
[코어를 통해 접속하면 너희들은 일시적으로 아바타에 준하는 혜택을 받는다. 부활 같은 것이 바로 그런 것이지. 하지만 요정의 문을 통해 드나들게 되면 그런 혜택들이 현실에서 충돌을 일으키게 된다. 시험해 보고 싶어도 참아라. 그건 자칫 치명적인 일이 될 수도 있으니.] “그렇군요.”평소에는 그냥 단답형으로 대꾸하는 정도가 고작인 공포와 죽음께서 이렇게 길게 말을 늘어놨다는 것 자체가 문제의 심각성을 대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과가 궁금하기는 해도, 스스로 몰모트가 되고 싶은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는 터라, 형진은 슬그머니 허세와 망상의 단장을 다시 인벤토리에 집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