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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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진실
그런 식으로 신과의 대화를 이어가는 중에도 아틀리에 한켠에서는 자신과 완전히 똑같은 모습을 한 아바타가 열심히 매크로 체조를 하고 있었고, 또 한 켠에서는 목각 인형들이 삐걱거리며 여신들의 신상을 만들고 있었다.
은근 편하다. 이거. 진작 좀 업글해서 쓸 걸 그랬다.
“친애하는, 존경해 마지않는 공포와 죽음님.”
능글맞은 목소리로 그렇게 부르자, 공포와 죽음은 흠칫하며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
[왜?]그러나 형진은 진솔하고도 진지한 표정으로 그런 공포와 죽음에게 간절히 말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드네요. 다른 여신들의 신상은 이렇게 많이 만들어 놓고 막상 제가 섬기고 있는 여신님의 신상은 만들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물론 공포와 죽음은 당연하다는 듯이 매몰차게 거절한다.
[됐거든.] “에이… 그러지 마시고, 한 번만 모습을 보여 주시죠. 제가 아주 성스럽고 색기 찬, 아니 그러니까…”[됐다고 했다.] “넵.”
더 칭얼댔다가는 정말 한 대 칠 것 같은 분위기라 형진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쳇. 모습 한 번 보여주면 어디가 어때서. 더도 말고 딱 작동가능한 인형으로 만들어서 실제로 움직이는 모습을 언제까지고 지켜보고자 했을 뿐인데.
[나 화낸다.] “하하… 농담입니다.”어쩐지 벼락이 내리칠 것 같은 느낌에 흠칫하며 고개를 움츠렸지만, 다행히도 천벌을 떨어지지 않았다.
공포와 죽음은 그런 형진의 반응에 피식 웃음을 짓는 듯한 기색을 보이더니 다시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이만. 이래저래 너무 많은 얘기를 해버려서 피곤하다.] “그래놓고 계속 지켜 보실 거면서.”[닥쳐.] “넵.”
어쨌든 그렇게 대화를 마친 형진은 잠시 일하고 있는 목각 인형들과 매크로 체조를 하고 있는 아바타를 바라보다가, 인형은 그대로 놔두고 아바타만 회수한 다음 마눌들이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공포와 죽음이 말한 대로 이래저래 너무 많은 얘기를 해버린 탓인지 형진도 피곤함을 느끼고 있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자기들끼리 뭔가 오순도순 얘기를 나누고 있던 마눌들이 그에게 시선을 던진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요?”
미엘이 얼른 일어나 도도도 달려오더니 옷 벗는 것을 돕는다.
“생각보다?”
“한번 뭔가에 꽂히면 어지간해서는 자리에서 안 일어나잖아요.”
“하긴.”
오늘은 일을 했다기 보다는 얘기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으니까. 남은 일도 목각 인형들이 대신하는 중이고.
“몸은 괜찮지?”
유아를 바라보며 묻자, 그녀는 푸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너무 건강해서 무서울 정도에요.”
“하긴. 그래야 유아답지.”
걸치고 있던 옷을 벗고 가운을 걸치자, 제랄딘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오늘은… 제가 도울게요.”
“부탁해.”
“네.”
욕실에 들어서서 몸에 묻은 대리석 가루라든가 먼지 같은 것을 대충 씻어낸다. 간단하게 샤워를 하는 정도이기 때문에 혼자서 해도 충분하지만, 마눌들은 메이드 때의 버릇이 남아서 그런지 반드시 한 명쯤은 욕실로 따라 들어와 그가 몸을 씻는 것을 돕는다.
“음… 기분좋다.”
“정말요?”
“응.. 역시 머리는 제랄딘이 감겨주는 것이 제일 기분 좋은 것 같아.”
“칫. 말이나 못하면.”
말투는 투덜대는 식이면서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는지 손가락의 놀림이 훨씬 부드러워진다.
밀폐된 공간에서 헐벗은 상태로 아리따운 마눌의 손길을 받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힘이 불끈불끈 솟는다. 원래대로라면 이 상태에서 그대로 제랄딘을 덮쳤겠지만, 오늘은 이래 저래 할 얘기가 많으니 조금 자제하기로 했다.
그렇게 간단하게 몸을 씻고 욕실을 나서자, 어느새 침실의 조명이 은은하게 바뀌고 잘 준비를 마친 마눌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아이들은?”
“일찍 잠들었어요. 아빠 보고 싶다고 보채는 걸 달래느라 혼났어요.”
“그래?”
지금이라도 가서 살짝 자는 모습이라도 보고 올까 하는 충동이 일어났지만, 애써 억누르고는 미엘이 이끄는 대로 침대에 몸을 눕혔다.
그가 침대에 눕자, 기다렸다는 듯이 마눌들이 그의 품안에 부드러운 몸을 기대온다. 잠시 그 부드러운 촉감을 즐기던 형진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몇 가지 해둘 말이 있어.”
“뭔데요?”
“우선… 아까 공포와 죽음께 들었던 말인데…”
형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자신이 사실은 파괴와 재생의 파편 가운데 하나임을 알렸다. 마눌들은 조금 놀라는 기색이었지만, 이내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음… 좀 놀랍긴 하지만 어쩐지 진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이 드네요.”
제랄딘의 말에, 미엘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파괴와 재생보다는 사기와 변태 같은 이름의 신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긴 하지만요.”
“푸?!”
미엘의 말에 유아가 웃음을 터뜨리자, 다른 이들도 결국 키득거리며 웃어 버리고 말았다.
아, 뭐랄까. 혹시 무서워하거나 그러면 어쩔까 하고 고민했던 것이 바보 같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래서 더욱더 마음이 푸근해진다. 역시 마눌들이라고 해야 하나.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이 잘못 된 것은 아니었다는 안도감에 가슴마저 뿌듯해진다.
그렇게 흐뭇하게 마눌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유아가 물었다.
“그럼 두 번째는 뭐에요?”
“두 번째?”
“몇 가지 해둘 말이 있다고 했잖아요.”
“아… 그랬지.”
일단 가장 중요한 한 고비가 무사히 넘어 갔기 때문에 형진은 별 부담없이 다음 말을 꺼냈다.
“자, 미엘에게 선물.”
“이건…”
미엘은 갑자기 자신에게 건네진 두툼하고 고풍스러운 책의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법총서라는 건데, 미엘에게 먼저 보여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잠시만요.”
미엘은 형진이 건네준 마법총서를 받아들더니 후다닥 일어나 침대 옆에 놓아둔 책상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 훑어보기 시작했다.
“어두운데서 책 보면 눈 나빠져.”
“아, 고마워요.”
형진이 불을 켜자 미엘은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마법총서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어때. 쓸 만 해?”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묻자, 미엘은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가 끄덕일 때마다 귀가 쫑긋거리고 꼬리가 풍차처럼 맹렬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형진은 자신도 모르게 킥 하고 웃어버리고 말았다.
“대, 대단해요…”
“얼마나?”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요. 도대체 이걸 어디서 난 거에요?”
“거짓된 천국의 던전에서.”
“세상에…”
형진은 미처 모르고 있었지만, 본래 마법은 마술에서 출발했으며 마술은 또한 환상으로부터 출발한다. 즉, 다시 말해 마법이라는 학문의 본류 자체가 허세와 망상의 힘으로부터 출발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사실 허세와 망상으로서는 마법총서라는 아이템이 이런 식으로 타나토스의 인물에 의해 읽히고 해석되는 상황 자체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구의 사람이 보기에는 읽을 수도 없는 기이한 문자가 가득 새겨진 그런 두툼한 책에 불과한 것이고, 차후에 이어질 업데이트의 단서는 될 수 있을지언정 본격적으로 그 내용을 해석하는 인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자체를 떠올릴 수 없었으리라.
이래저래 허술한 신이 아닐 수 없다. 차라리 이름을 허술과 망상이라고 바꾸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미엘은 그것을 읽고 해석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을 지닌 마법사다. 보통의 인간 마법사라면 처음의 몇 구절 정도를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일생을 다 써버릴 정도의 난이도라도, 인간보다 훨씬 오랜 세월을 살아가는 흑요호라면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자신의 마법에 적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미엘.”
“네?”
“혹시 그거 필사 가능해?”
“필사요?”
“응. 따로 쓸데가 있거든. 다섯 개 정도 필사본을 만들어 주면 좋겠는데.”
필사가 가능하다면 엘리시온에서의 퀘스트를 굳이 포기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원래는 5대 마탑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서 전달해야 하지만, 필사본 다섯 개를 만들 수 있다면 그곳 모두에 전달하고 보상을 다 받아 먹는 것도 가능해진다.
이것이야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가 아니겠는가.
“그럼 원본은 제가 계속 봐도 되나요?”
“물론. 그러려고 가지고 온 거니까. 그건 이제부터 미엘 거야.”
“정말 고마워요!”
미엘은 애엄마라는 자신의 위치조차 잊었는지 마법총서를 껴안고 폴짝폴짝 뛰며 기쁨을 마구 발산하다가 이내 책을 자신의 인벤토리에 넣고는 형진의 품안으로 달려들었다.
미엘의 작고 부드러운 몸이 답싹 안겨 오는 것을 가슴으로 받아내며 물었다.
“어이쿠, 우리 마눌님. 그렇게 좋으십니까?”
“네!”
“얼마나?”
“뭐든지 말해요. 오늘은 진이 아무리 변태스런 요구를 해도 다 받아줄 수 있어요. 그 정도로 좋아요!”
“정말?”
“네! 정말!”
“그렇단 말이지…”
형진이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이자, 유아와 제랄딘은 어색하게 웃으며 그에게서 슬금슬금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형진은 그런 두 마눌들의 어깨를 도망치지 못하도록 팔로 감싸 안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럼 기대하시던 세 번째 내용입니다. 자, 이쪽을 보시라.”
그의 말에 따라 한쪽으로 시선을 던지던 마눌들은 느닷없이 나타난 또 하나의 형진을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어? 이건…”
“혹시… 환상인가요?”
마눌들은 아무리 봐도 형진과 똑같은 아바타의 모습을 보고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무리 봐도 환상 외에는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였기 때문이다.
“아니야. 이건 내 아바타야.”
“아바타요?”
잠시 이게 뭔 소리가 싶던 마눌들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바타라면… 제가 생각하는 그게 맞나요?”
형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바타의 입을 통해 이렇게 답했다.
“사실 최근까지 마눌들과 함께 지냈던 몸은 오히려 저쪽이야. 지금의 내 몸은 본신이고.”
“아…”
유아와 미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요안나를 데려오면서 들었던 얘기들을 떠올린 것이다.
“하지만… 본신이든 아바타든 원래 하나만 쓸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원래는 그런데, 공포와 죽음께서 본신 외에도 따로 아바타를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어.”
“그럼…”
“앞으로는 집에서 마눌들이나 아기랑 뒹굴뒹굴 하면서도 아바타를 써서 바깥의 일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는 얘기야.”
“와아…”
다른 이라면 몰라도 유아는 무척이나 기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임신 사실이 확인되고 난 뒤, 그녀에게 가장 서운한 점이라면 역시 형진과 지내는 시간이 줄어버렸다는 점이다. 이런 저런 일로 바쁘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지내는 시간이 줄어버리는 건 역시 별로 즐겁지 않은 일이랄까.
하지만 이제는 그런 식의 제약을 벗어나 훨씬 더 많은 시간을 그와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유아로서는 너무나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몸을 두 개나 한꺼번에 쓰면 정신없지 않아요?”
“아바타를 두 개 이상 꺼내면 좀 그렇긴 한데, 하나만 꺼내놓는 거라면 딱히 큰 문제는 없어.”
“미엘 언니의 분신이랑 비슷한 원리인가보죠?”
“아마도? 나로선 미엘이 어떤 느낌으로 분신을 운용하는지 잘 모르니 확답하기는 어렵겠지만.”
형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미엘을 바라보았다.
“우후흐흐흐흐흐흐…”
미엘은 그 웃음을 듣고서야 다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진… 설마…”
하지만 진은 그런 미엘을 바라보며 다시 이렇게 말했다.
“아까 분명히 그랬지? 아무리 변태스러운 요구라도 다 받아주겠다고.”
“그건… 그러니까…”
미엘이 어색하게 웃으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자, 형진은 문득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내 고향에는 이런 말이 있지.”
“어떤?”
“남아일언중천금, 여아일언중만금.”
“무슨 뜻이에요?”
“남자의 말 한 마디는 천 개의 금화보다 무겁다. 하지만 여자의 말 한 마디는 만 개의 금화보다도 무겁다!”
“처음 들어보는 말인데요.”
“말했잖아. 내 고향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말이라고.”
“그냥 금화 만 개를 대신 주면 안 될까요?”
“금화 만 개가 있긴 해?”
“음… 진한테 빌리면?”
“거절한다!”
“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