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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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또다른 만남
“빠아! 이게 머에여?”
“소라구나. 이걸 이렇게 해서 이렇게 불면…”
아기들의 이름이 마침내 정해졌다. 첫째부터 시작해서 하늘, 이슬, 세연, 사랑, 다희, 예린, 일화다. 미엘이나 하엘처럼 흑요호들 식으로 짓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떠올리긴 했지만, 어차피 정식 이름은 성인이 되었을 때 스스로 짓게끔 되어 있으니 어릴 때의 이름만큼은 형진의 뜻에 따르기로 정한 것이다.
이름이 정해지자, 형진은 요정들에게 명령을 내려 턱받이에 아기들 이름을 새기도록 했다. 원래부터도 쌍둥이나 다름 없는 아이들이라 이름을 알아보기 어려우니 그런 식의 차선책이라도 쓸 수 밖에 없었다.
둘째인 이슬이가 바닷가에서 주워온 커다란 소라 껍질의 끄트머리에 구멍을 뚫어 나팔을 만든 다음 힘껏 불자 낮은 소리가 울려퍼진다. 원시적이지만 이것은 꽤 훌륭한 나팔이었고, 모래로 겉면을 닦아 반질반질하게 윤을 내자 곧바로 아기 공주들은 이 신기한 나팔에 흠뻑 매료되었다.
“와아!”
“나도! 나도!”
“나도 만드러 주세여!”
아기들은 서로 나팔을 불어보겠다고 나서다가, 이내 이슬이가 소라 나팔을 들고 으스대는 모습이 부러웠는지 얼른 바닷가에서 소라 껍데기며 조개 껍데기 같은 것을 모아오기 시작한다.
“공주님! 위험해요!”
“파도가 세니까 조심하세요!”
“꺄하하하하!”
일곱이나 되는, 그것도 제멋대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아기들을 보살피느라 요정들은 난리가 났다. 꼬리가 없을 때는 밖으로 나오더라도 형진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느라 다른 곳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던 아이들이었지만, 꼬리가 생기고 나자 지금껏 억눌러 두었던 호기심이 폭발했는지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않는다. 덕분에 아기들을 지키고 보살피는 역할로 요정들을 열 명 넘게 배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을 정도다.
소라 껍데기를 찾는다고 바닷가를 뒤집어 놓고 있는 아기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형진은 모처럼 수영복을 입고 비치 파라솔 아래 누워 있음에도 불구하고 낡은 책을 보느라 정신없는 미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주 푹 빠졌네.”
“네.”
“그렇게 재미있어?”
“네.”
“안 가져 왔으면 큰 일 날 뻔 했네.”
“네.”
“수영복 입고 있는 거 갑갑하지 않아? 벗겨 줄까?”
“아뇨.”
마법총서에 빠져서 기계적으로 네 라는 대답을 반복하고 있는 미엘의 모습이 얄미워서 슬쩍 질문을 돌렸지만, 이 여우 같은 마누라는 얼른 그렇게 대답하고는 씩 웃는다.
“쳇.”
“킥킥…”
형진이 혀를 차며 입맛을 다시자 옆에서 보고 있던 유아와 제랄딘이 키득거리며 웃음을 터뜨린다. 하지만 그렇게 모처럼 가족들끼리 해변에서 느긋한 시간을 만끽하는 와중에도 형진의 의식 한쪽에서는 마탑들을 털어 먹는 일로 정신이 없었다.
불의 벽을 털어 먹는 일이 성공한 형진의 아바타는 요안나와 하엘을 거느린 채 두 번째 마탑을 향하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마탑을 털어 먹는 것을 확인한 이상, 다른 마탑들을 도는 건 동일한 행위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마탑 마다 주특기로 삼은 마법의 분야가 다르다 하더라도, 압도적인 힘을 보유한 상황이니 결과는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다.
“오, 이거 세연이가 만든 거니?”
“네에… 세연이가 만드러쩌요.”
“멋지구나. 왕자님이 사는 성인가?”
“아닌데여. 소란데여.”
“어, 음… 아하하, 그렇구나.”
셋째인 세연이가 모래를 쌓아 뭔가를 만든 걸 보고 아는 척을 했지만 보기 좋게 틀리고 말았다. 뭐랄까. 형이상학적 세계를 논하기에는 아기들과 형진의 시야는 너무 큰 차이가 난다고 해야 하나.
형진은 다시 토닥토닥 모래를 만지고 있는 세연이의 모습을 보고는 어쩐지 가장의 권위를 만회해야 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핫핫하! 이 아빠가 또 모래성을 쌓는 것에는 일가견이 있지. 잘 봐라.”
“…”
세연이가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바라보자, 형진은 얼른 양동이를 가져다가 그 안에 모래를 다져 넣은 다음 엎어 놓는 식으로 토대를 마련한 다음, 나뭇가지를 가져다가 마치 조각을 하는 느낌으로 무언가의 형상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와아!”
자기만의 무언가를 만드는 일에 심취해 있던 세연이는 순식간에 형진의 손으로부터 웅장한 모래성의 모습이 만들어지자 감탄한 표정으로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어떠냐! 멋지지?”
“빠아! 채고!”
“아하하하하!”
손뼉을 치며 기뻐하는 딸내미의 모습에 신이 난 형진은 이내 해변가 이곳 저곳에 모래로 이런 저런 형상을 만들어 놓기 시작했다.
“쿡. 또 시작이네요.”
“그러게요.”
“그래도 역시 대단해요. 고작해야 모래 더미인데, 저걸 저런 식으로 써서 작품을 만들어내다니.”
“진이니까요.”
“하긴.”
“변태만 아니면 정말 더할 나위 없을 텐데.”
“쿡쿡. 하지만 변태가 아닌 진도 상상하기 어렵지 않아요?”
“그거야… 그런가요.”
“킥킥.”
마눌들과 수영복을 챙겨 입은 채 전용의 작은 비치 파라솔에 앉아 주스를 쪽쪽 빨아 먹고 있던 여신들이 그렇게 흐뭇한 표정으로 뒷담화를 하고 있는 동안, 형진은 마침내 모래 더미로 왕성 라이언하트를 완벽하게 재현해 내는 위업을 달성하고 말았다.
“어떠냐! 이 아빠의 실력이!”
“대단해여!”
“빠아 채고!”
“빠아 채고!”
“핫핫핫핫!”
“핫핫핫핫!”
왕성 라이언하트의 모습을 본뜬 모래성을 앞에 둔 채 그렇게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이 재미 있어 보였는지, 아기들 가운데 몇몇은 요정들과 함께 형진과 똑같이 허리에 손을 얹고 그렇게 웃음 소리를 따라하고 있었다. 어쩐지 아기들의 미래가 조금씩 걱정되기 시작하는 모습이지만 자기들이 즐겁다는데 어쩌겠는가.
“빠아! 이건 머에여?”
다시 무슨 작품을 만들어 볼까 고민하고 있는 형진에게, 문득 다섯째인 다희가 또다시 무언가를 집어 들고 다가와 질문을 던진다.
“음, 그건 말이지…”
거의 무조건 반사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며 얼른 다희가 집어온 무언가의 이름을 알려주려 했던 형진은 순간 멈칫하며 굳어 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인간의 형상을 닮아 있었다. 하지만 크기는 고작해야 손바닥 정도에 불과했고, 얼핏 보기엔 바닷물에 오래 절여지고 해초 더미에 뒤엉켜 목이 매달린 요정 시체를 닮았으나, 형진은 그 모습을 보는 순간 한 눈에 이것이 일반적인 요정과는 다른 존재임을 깨달았다.
“헉! 다희야. 자, 잠깐… 그거 아빠한테 주지 않을래?”
“시져! 다히꺼야!”
“으앗! 다, 다희야!”
다희는 형진이 자신의 것을 빼앗으려 한다고 생각했는지 냅다 도망치기 시작했다. 형진은 기겁을 하며 얼른 다희의 뒤를 쫓았지만, 아직 아기에 불과해도 흑요호는 흑요호인지 좀처럼 붙잡기가 쉽지 않았다.
“꺄하하하하!”
게다가 그런 식으로 쫓고 쫓기는 일 자체에 재미를 붙였는지 다희는 손에 든 무언가를 붕붕 휘두르며 허공을 마구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도망치는 것이 적이라면 이동 스킬이든 뭐든 써서 바로 잡아 채겠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신의 딸이 술래잡기 하는 듯한 모습으로 도망치는 걸 그렇게 우악스럽게 잡을 수는 없는 일이라 형진은 쩔쩔 매야만 했다.
아무래도 형진의 모습이 이상하다 싶었던지, 미엘이 슬그머니 책을 덮고 질문을 던진다.
“진! 왜 그래요?”
“그, 그게… 아무래도 다희가 새로운 신을 주운 것 같아!”
“네?”
새로운 신을 줍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린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던 마눌들은 이내 팥빙수를 배불리 먹고 비치 파라솔 아래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여신들을 바라보았다.
그렇다. 지금은 비록 저렇게 태평하게 햇빛을 쬐고 있지만, 여신들이 처음 이 섬에 도착했을 때도 분명히…
“미엘 언니!”
“알았어. 맡겨둬.”
당황한 제랄딘이 급히 부르자, 미엘은 읽고 있던 책을 덮고는 그대로 허공을 박차며 공중제비를 넘더니 깔깔거리며 형진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던 다희의 뒷덜미를 덥석 움켜쥐었다.
“마아?”
“다희야. 손에 들고 있는 그것 좀 잠시 보여줄래?”
“다, 다히건데?”
“그래서, 싫다고?”
“아녀… 여기여…”
다희는 미엘이 살짝 노려보자 그대로 꼬리를 말고는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맙소사.”
미엘은 그것을 받아드는 순간 형진의 말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어, 어쩌죠?”
“일단… 유아에게!”
“네!”
미엘은 얼른 손에 든 무언가를 급히 유아에게로 데려갔고, 그제서야 포만감을 느끼며 꾸벅꾸벅 졸고 있던 다른 여신들도 무슨 일인가 하고 다가왔다.
“헉! 얘는!”
“아… 역시나…”
“그래도 생각보다 빨리 찾아 왔네요.”
유아에게 회복을 받고 몸에 엉겨 붙은 해초들을 떼어내자 마침내 본래의 모습이 드러난다.
“누굽니까?”
“비와 낭만이에요. 이곳에 오기로 했던 신들 가운데 마지막 한 명이죠.”
“아…”
그렇게 얘기를 나누고 있을 즈음, 마침내 이 작은 조난자가 정신을 차렸다.
“커흑… 괴, 괴물이…”
“…”
아무래도 다희가 다리 한쪽을 잡고 팔랑개비 돌리듯 마구 휘둘렀던 것 때문에 정신이 살짝 어긋난 모양이다.
“바보야. 정신 좀 차려.”
“어? 넌…”
잠시 멍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비와 낭만은 세 여신들이 하늘하늘한 수영복을 걸친 채 자신을 향해 한숨을 포옥 내쉬고 있는 모습을 보고서야 안도하는 표정으로 털썩 주저 앉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비와 낭만은 그제서야 설움이 끌어오르는지 이내 울상이 되더니 엉엉 울기 시작했다.
“다희야. 신님한테 사과드려.”
“신님? 얘가?”
“얘라니.”
“웅…”
다희는 별로 내키지 않는 기색이었지만, 미엘이 도끼눈을 뜨자 그제서야 마지못한 모습으로 비와 낭만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다.
“미안해여. 다히가 잘못해쩌여.”
“힉!”
비와 낭만은 다희가 다가와 고개를 꾸벅 숙이자 기겁을 하며 여신들의 뒤로 숨었다. 뭐랄까. 모처럼의 남신인데 영 미덥지가 못하다.
“역시 다희는 크게 될 녀석인 것 같아.”
“네?”
“아니… 그냥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서.”
여신들에게 부축을 받으며 왕성 쪽으로 걸어가는 비와 낭만의 모습에 형진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따지고 보면 파괴와 재생의 파편임을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신이나 마눌들이 별로 대단한 일로 받아들이지 않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이렇게 칠칠맞은 신들을 바로 옆에서 보고 느끼는 상황 때문이 아닐까. 갑자기 든 생각이긴 해도, 아니라고 부정하기 어려운 점이 또한 난감하다.
여신들의 부축을 받아 숙소로 들어간 비와 낭만은 그대로 곯아 떨어졌고,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한나절이 꼬박 지닌 뒤의 일이었다.
그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지, 유아가 가져다 준 빠네 파스타를 허겁지겁 몇 개나 먹어치우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래도 어떻게 용케 찾아왔네.”
“그러게.”
“난 솔직히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는데.”
몇 년이라니. 황혼과 망각의 말에 지켜보던 이들은 모두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어떻게 찾아온 거야?”
보호와 균형의 말에, 비와 낭만은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그게… 나도 몰라.”
“모르다니?”
“막 헤엄치다가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태풍을 만났거든. 그런데 깨어보니까… 여기더라고.”
“…”
그럼 그렇지. 이 방향치가 자기 뜻대로 여길 찾아왔을 리가 없지 않은가.
형진은 아무래도 이 새로운 신을 혼자 내버려 뒀다간 또다시 길을 잃고 어디론가 가버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야나, 로트나.”
“넵.”
“당분간 너희들이 이 신님을 보필해라. 특히 길을 잃지 않으시도록 특별히 주의하도록.”
“네! 맡겨주세요!”
일단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측근 경호를 담당할 시녀들을 배치하는 일이 끝나자, 형진은 어쩐지 처량한 느낌의 이 작은 신에게 말했다.
“오늘은 피곤하실 테니 일단 푹 쉬시고, 내일 면접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죄송합니다.”
비와 낭만은 그렇게 대답을 하다가 형진의 어깨에 매달린 채 자신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다희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 하고 몸을 떨며 얼른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비와 낭만이 그렇게 시선을 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 자그마한 신에게 흥미 가득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