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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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싹쓸이
그냥 인간이 상대였다면 형진도 이렇게 고압적으로 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 마탑은 기껏해야 프로그래밍된 NPC들의 집단. 아무리 사람을 닮은 형상을 하고 있어도 실제로는 인던 안에서 흐느적거리며 다가오는 좀비들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는 존재들인 셈이다.
하지만 이곳 마탑의 마법사들은 인던의 몹들과는 다른 효용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노동력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는 점이다. 이들을 끌어들여 자신의 휘하에 둘 수 있다면, 형진은 지금 그의 집 아틀리에에서 단순 반복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목각 인형보다 훨씬 고급스런 노동력을 보유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이것을 바꿔 말하면, 오늘 형진이 마탑을 도는 것은 단순히 인던을 도는 것과는 또 다른 형식의 레이드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단순히 몹을 죽여 아이템과 경험치를 얻는 레이드가 아니라, 강력한 힘으로 압도하여 고급 노동자를 얻는 그런 식의 레이드인 셈이다.
“쳐라!”
“불의 벽 마탑의 힘을 보여 주자!”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얘기고, 실제로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밝혀진 것이 없다. 일반적인 게임과 마찬가지로 이곳의 NPC가 그저 정해진 루트로의 반응만 보이는 그런 존재들이라면 그저 깽판을 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겠지만, 만약 어느 정도 유동적이며 변칙적인 사고가 가능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다면, 오늘 형진은 미엘을 보조할 훌륭한 노동력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곧바로 화려한 불꽃놀이가 탑주의 집무실을 아로 새긴다. 빨간 불꽃, 파란 불꽃, 찢어진 불꽃. 좁다란 집무실에 불꽃 세 개가 하엘을 향해 날아든다. 어쩐지 손을 모아 그 거룩한 모습을 합창해야 할 것 같은 광경이다.
“흥.”
하지만 하엘은 방어를 위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두려워하며 피하지도 않았다. 그저 당연하다는 듯이 그 불꽃을 자신의 작은 몸으로 받아들였다. 마법을 발현한 마법사들로서는 그 광경이 자살을 원하는 광인의 그것으로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하엘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헉!”
“말도 안 돼!”
물론 성물의 영향으로 원래부터 피해를 입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그 효과는 하엘이 입고 있는 메이드복에 국한되었으며, 마법사들이 발현한 불꽃들은 마치 화장실에 비치된 보송보송한 엠보싱 휴지에 쏟아진 샤워기의 물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흐응.”
하엘은 살짝 콧소리를 내며 오랜만에 맛보는 순도 높은 불꽃의 맛을 음미했다. 마법사들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아연실색해 버렸다. 만약 마법사들이 아니었다면 방금 전의 모습에서 다른 추론을 끄집어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한눈에 자신들의 마법이 무언가에 의해 방어되거나 회피되거나 기타 다른 수단으로 소멸된 것이 아님을 알아보았다.
“마법을… 먹어 치웠어?”
“말도 안 돼!”
만약 마법사들이 발현한 것이 다른 속성의 마법이었다면 하엘은 좀 더 색다른 반응을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의 벽 마탑은 그 이름처럼 화끈한 불벼락을 내리는 것을 가장 선호하는 집단이었으며, 지금까지는 그 어떤 유저도 이들에게 자신들의 취향을 수정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도록 만들지 못했다. 기껏해야 인던의 보스들 가운데 몇몇이 불에 대한 강력한 저항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마탑의 마법사들은 그런 인던의 보스들을 상대할 일도 없었다.
“죽이진 마. 부려 먹어야 하니까.”
찻잔을 기울이며 형진이 그렇게 말하자,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마법사들을 향해 곧장 뛰쳐 나가려던 하엘이 움찔하더니 얼른 몸을 돌려 경건하기까지 한 자세로 그의 말에 답했다.
“알겠습니다. 주의하겠습니다.”
“그래. 수고해.”
형진의 대답이 돌아오자 하엘은 곧바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곧바로 방금 전의 그 순종적인 메이드가 맞나 싶은 광기 어린 표정으로 돌변하더니 온 몸에 이글거리는 불꽃을 두른다.
“큭!”
“방금 전의 일은 우연이었을 거다. 다시 공격해!”
“하압!”
마법사들은 명백하게 공격 의사를 보이기 시작한 하엘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며 다시금 화끈한 불쇼를 보여주었다. 하엘은 그 모든 불꽃들은 맛있게 냠냠 씹어 먹으며 다가서더니 발악하듯 마법을 쏴대는 마법사들을 하나씩 때려잡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요안나에 의해 제압된 탑주는 자신의 눈앞에서 그 모든 광경을 넋 나간 듯한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다고 자신하던 강력한 공격 마법들이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한 채 허상처럼 사라져 가는 그 모습에 탑주는 사고가 멎어 버리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정확히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한 합당한 대응 방법 자체가 없는 상황이라 연산 자체가 불가능해진 것이겠지만, 어쨌든 그랬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꼬리에 불붙은 멧돼지 마냥 날뛰는 하엘의 손에 의해 제압되어 노릇노릇한 향기를 뿜어내고 있는 마법사들이 집무실 한켠에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이쯤 되자 마법사들도 깨달았다. 이들에게 자신들이 지닌 그 어떤 수단도 통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가진 말고.”
“네.”
지금껏 억눌러 왔던 모든 울분을 풀기에는 역시 모자란 느낌이 있었는지, 하엘은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형진의 말을 어기고 집무실 밖으로 뛰쳐나가거나 하지는 않았다. 지금 그녀에게 있어 가장 두려운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형진이기 때문이다.
형진은 손수 티세트를 다뤄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장인을 초월한 그의 솜씨는 똑같은 물과 찻가루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차원이 다른 향기를 가진 차를 끓여냈다.
“한 잔 마실래?”
“…”
탑주는 더 이상 그의 반말에 기분 나빠하지 못했다. 아니, 그럴 걸 따질 경황 자체가 없었다.
“요안나.”
“네.”
요안나는 자신의 이름이 불려지자 따로 지시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바닥에 꿇어앉은 탑주를 일으켜 형진의 맞은 편 자리에 앉혔다.
형진은 그렇게 끌려와 앉은 탑주에게 찻잔을 건네며 말했다.
“일단 한잔 마셔.”
“…”
이번에는 의향을 묻는 것조차 아닌, 그저 일방적인 명령이다. 하지만 탑주는 거부하지 못했다. 상대가 그럴 의향만 있다면, 자신이나 다른 마법사들은 물론이고 불의 벽이라는 이름을 지닌 마탑 자체가 단숨에 사라질 수도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거, 갖고 싶지?”
“…”
형진은 탑주가 여전히 가슴에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는 마법총서를 바라보며 그렇게 물었다.
“이것은… 마법의 역사를 새로 쓸 수도 있는 보물입니다.”
“알아.”
“이것이 있다면… 이 세상은 새로운 문명의 시대로 접어들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알아.”
“제발 저희에게 그 길을 열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길게 늘여서 말하긴 했지만 결국은 항복 선언이다. 하지만 형진은 찻잔을 기울이며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이렇게 말했다.
“마탑은 이곳만 있는 것이 아니야.”
“…”
“그리고, 나는 그럴 마음이 있다면 이곳 자체를 지워버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
탑주는 형진의 말을 듣는 순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실제로 어떤 힘을 지니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순간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강대한 힘이 자신을 짓누르는 감각을 느꼈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강대한 힘의 주인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탑주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구했다. 하지만 형진은 그런 탑주의 모습에도 그저 심드렁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그래서?”
“네?”
“그래서, 그게 전부야?”
형진의 말에 정신이 번쩍 돌아온 탑주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지분… 마탑의 지분을 드리겠습니다.”
“얼마나?”
“그것이… 구체적인 양은 제가 임의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닌지라…”
“흠.”
형진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도록 하지.”
“어떻게… 말씀이십니까.”
“마법총서는 빌려주는 것으로 치겠다. 대신 마탑은 그것을 빌리는 사용료와 함께, 그것을 통해 얻어지는 모든 성과에 대한 지분의 반을 로열티로 지급한다.”
“음…”
수익의 반이 아니라 모든 성과의 지분을 반을 가져간다는 말에 탑주는 작게 신음을 흘렸다. 이렇게 되면 실제로 상품화해서 수익을 내지 않더라도 마법총서를 통한 모든 연구 성과에 대해 절반의 지분을 요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자면, 마법총서를 통해 어떤 마법을 개발해 그것을 가르치거나 사용하게 되면 그것만으로도 이 남자에게 사용료를 지불할 의무가 생기게 된다. 즉, 마법총서를 연구하면 할수록 마탑은 그것만으로도 이 남자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채무를 계속해서 지게 된다는 얘기다.
“그리고 저 증서들도 내용을 좀 바꿔야겠어.”
“어떤…”
“첫째, 아이템을 구매할 때 할인율은 내가 정한다.”
“…”
사실 마법 아이템은 손이 많이 가는 만큼 엄청난 고 부가가치를 지니는 물품이다. 또한 그것에 대한 제작 원가 역시 마법사들끼리만 아는 일이라, 할인된 물품이라 해도 실제로는 말뿐인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구매자가 할인율을 직접 정하게 된다면, 그런 식의 장난은 더 이상 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걱정마. 나도 양심은 있어. 최소한 원가에 수고비 정도는 붙여 줄 테니까.”
“끙…”
앓는 소리를 하는 탑주를 바라보며 형진은 다시 말했다.
“둘째, 내가 인력을 요구할 경우 마탑은 그 요구에 최대한 성실하게 부응해야 한다.”
“최대한 성실하게라 하심은…”
“말 그대로야. 생색만 내는 건 용납하지 못한다는 얘기이기도 하고.”
“으…”
“필요한 때에 필요한 인력의 수급이 보장된다면, 나 역시 임금은 확실하게 보장할 테니. 이 참에 아예 파견시 임금 기준도 확실하게 정할까.”
“…”
탑주는 울상이 되어 버렸다. 이래서야 말이 계약이지 마탑을 통째로 들어 바치는 것이나 마찬가지 형국이다. 물론 마법총서를 연구한 성과를 통해 역사에 이름은 남길 수 있겠지만, 사실상 그게 마탑이 얻을 수 있는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작해야 개인이 마탑이라는 거대한 단체를 상대로 뭘 할 수 있겠냐는 생각에 공연히 뻗댄 결과 치고는 그야말로 참혹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만한 수준의 결과다.
형진은 그렇게 울상이 되어 버린 탑주를 향해 다시 말했다.
“대답은?”
물론 탑주의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받아… 들이겠습니다.”
대답을 들은 형진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현명한 결단이다.”
탑주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합의한 내용을 증서로 작성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작성된 증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형진의 손에 온전히 들어오게 되었다.
“진작 이랬으면 좋았잖아.”
“…”
탑주는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넋 나간 표정만 지을 뿐 달리 뭐라 대답하지 못했다. 형진은 그런 탑주의 모습에 피식 웃고는 몸을 일으키며 다시 말했다.
“하엘.”
“네?”
“상자 챙겨라.”
“넵.”
기왕 받은 보상이니 놓고 갈 수는 없는 일. 어쨌든 무기를 쓰지도 않고 직접 주먹을 휘두르거나 하지도 않았지만 오늘의 첫 번째 레이드는 아주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다. 아직 네 군데나 되는 레이드 대상이 더 남아 있기 때문이다.
다소 방법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 마탑들도 그리 다르지 않은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럼, 가볼까.”
형진은 집무실 한켠에 자리잡은 창가를 향해 다가서더니, 갑자기 꼬리를 확 꺼내 놓았다. 그리고 하엘이 놀란 표정으로 지켜보는 동안, 그 꼬리로부터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 내고는 브레스를 발사했다.
화악!
폭음조차 없이 시원하게 뻥 뚫려 버린 집무실의 모습에 탑주는 물론이고 차곡 차곡 쌓여 있던 마법사들조차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남자는 그럴 의향이 있었다면 정말로 자신들의 마탑을 지워버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마법? 아니다. 이것은 그런 식의 무언가를 초월한 그런 힘이다. 탑주를 비롯한 마탑의 마법사들은 순간 그것을 똑똑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형진은 흑요호의 형상을 만들어 내어 거기 요안나와 하엘을 거기에 태우고는 그대로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마법사들은 그들이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이나 뻥 뚫려 버린 집무실 한쪽 벽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