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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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싹쓸이
엘리시온의 5대 마탑은, 각기 마법이라는 초월적인 힘을 어떤 식으로 현세에 활용하는가에 대해 비슷한 생각을 지닌 자들이 모여 만들어낸 집단들이다.
지금 형진이 가장 먼저 발걸음을 향하고 있는 마탑도 마찬가지다. 이 마탑의 명칭은 불의 벽.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상징으로 삼는다. 이 마탑은 마법의 본질을 파괴로 규정하며, 다른 어떤 마탑보다도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마법을 만들어내고 연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마탑의 마법사들은 닥치고 공격, 또는 어택 땅을 외치는 경향이 있어서 흔히 열혈 바보라고도 불린다.
“공격 마법이라.”
제법 흥미롭긴 하지만, 이미 미엘과 계약을 맺어 존재하는 그 어떤 공격 마법보다도 강력한 공격 수단인 브레스를 사용할 수 있게 된 형진으로서는 그런가보다 할 뿐이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피사의 사탑을 연상시키는 약간 기우뚱한 모습의 탑 근처에 도달하자, 입구를 지키고 있던 자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온다.
“던전을 탐색하던 중에 마법총서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혹시 흥미가 있으실까 하여…”
“마, 마법총서라고요?”
입구를 지키고 있던 나이 지긋한 남성은 과도하게 놀란 기색을 보이더니 얼른 형진에게 고개를 숙였다.
“오, 이렇게 기쁜 일이. 저를 따라 오십시오. 바로 탑주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퀘스트라서 이런 저런 수속 없이 일사천리로 탑주와의 만남이 성사되었다. 형진은 메이드복 차림의 요안나와 하엘을 거느린 채 앞장 선 사람의 뒤를 따라 탑 안으로 들어섰다.
역시 마법사들의 본거지라 그런지, 안에 들어서는 순간 밖에서 보는 것의 배는 되어 보이는 넓은 공간이 나타난다.
“이쪽으로.”
안내자는 그들을 계단이나 엘리베이터 같은 것이 아닌, 킥보드를 4~5인용으로 크게 확대해 놓은 것 같은 발판으로 안내했다.
뭔가… 어째 좀 불안한데.
형진은 별로 탐탁지 않은 기색을 보이며 안내자의 뒤를 따라 발판에 올라섰고, 요안나와 하엘 역시 그의 뒤를 따랐다.
“꽉 잡으십시오.”
“…”
그들이 발판 위에 서자 곧바로 발판 주위에 손잡이가 모습을 드러낸다. 말이 손잡이지, 이래서야 꼭 철창에 갇힌 것 같은 모습이다.
손잡이를 한 손으로 움켜쥐자, 안내자는 비로소 발판을 조작했다.
처음에는 작은 진동과 함께 둥실 떠오르는가 싶더니, 작은 폭음과 함께 갑자기 공중으로 확 치솟아 오른다.
“미친.”
형진은 자신도 모르게 상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뭔가 심상치 않다고는 느꼈지만, 이런 식으로 킥보드에 로켓을 달아 놓은 듯한 물건을 엘리베이터 대용으로 쓰고 있었단 말인가.
“도착했습니다.”
“…”
다행히 급가속은 처음에만 일어났고, 이내 점차로 추진력이 떨어지더니 꼭대기 층에 도달할 즈음이 되자 처음의 미친 듯한 급가속은 어디 갔는지 느긋하게 떠오른다. 처음부터 이럴 것이지.
“이곳입니다.”
“…”
형진과 요안나, 그리고 하엘이 발판에서 내려서자, 안내자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해보이고는 갑자기 훅 하고 떨어져 내렸다. 내려갈 때도 처음에는 역시 급가속인 모양이다.
“어쩐지… 두 번은 타고 싶지 않네요.”
“동감이야.”
요정들이야 재밌다고 깔깔거리며 타고 다닐 것 같기는 하지만, 안전을 비롯해서 여러모로 좋지 않은 물건임에는 틀림이 없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미리 기별을 받았는지 눈처럼 하얀 백발을 지닌 의외로 멀쑥한 모습의 노인 하나가 그들을 반갑게 맞이한다.
“화끈하고 통쾌한, 세상 모든 악을 단숨에 침묵시킬 강력한 공격 마법의 요람인 불의 벽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마법총서를 가지고 오셨다지요?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
공격 마법만 전문으로 연구하는 곳의 수장이라길래 무조건 공격만 외치는 외골수를 연상했는데, 의외로 탑주는 사업가 기질이 다분한 사람인 모양이다.
“자아… 실례지만 물건을 한 번 볼 수 있겠습니까?”
“…”
형진은 말없이 인벤토리에서 마법총서 필사본을 꺼내 건네주었다.
“오오… 이것이… 음?”
탑주는 흥분한 표정으로 형진이 건네준 마법총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마법총서가 맞는 것 같기는 한데, 묘하게 이질감이 느껴진다. 금방이라도 바스러져 떨어질 것 같은 종이의 질감이나, 마법으로 보호가 되고 있음에도 살짝 곰팡내가 전해지는 것으로 봐서는 확실히 오래된 물건이 맞는 것 같긴 한데… 뭔가 묘하게 이상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이거… 진품이 맞습니까?”
“읽어 보면 알 텐데.”
“그건 그렇지만…”
뭔가 이상하다. 확실히 뭔가 이상하긴 한데 뭐가 이상한지 도무지 모르겠다. 그럴 수 밖에 없다. 내용이야 미엘이 필사를 한 것이라고는 해도, 겉표지는 형진이 세공 기술로 정밀하게 복제를 한데다 일그러진 시간의 돌로 세월의 향취까지 고스란히 녹여낸 완벽한 복제품이기 때문이다.
필사본이긴 하지만 그걸 그대로 드러내 보이면 값을 깎으려 들 것이 당연한 일. 그래서야 다섯 군데의 마탑을 전부 도는 의미가 없다. 때문에 형진은 단순한 필사본이 아닌 완벽한 복제품을 만들어 이렇게 내놓은 것이다.
“으음…”
“필요 없으면 다른 데 가져가고.”
“하하하. 농담이 심하시군요.”
“농담 아닌데.”
“…”
탑주의 이마에 순간 혈관 마크 하나가 빠직하며 솟아난다. 사실 사람 좋은 인상으로 맞이하고 있긴 했지만, 누가 열혈 바보들의 수장 아니랄까봐 살짝 성격이 급한 면이 있었다. 뭐랄까. 역시 NPC라 그런지 성격이 별로 입체적이지 못하고 평면적인 느낌이다. 그나마 중요한 NPC라 이 정도지, 사념체조차 갖추지 못한 보통의 NPC들은 이런 식의 반응조차 보이지 못한다.
“크흠… 아무튼 알겠습니다. 그럼 여기 보상을…”
그래도 일단은 탑주라 그런지 인내심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 모양이다. 솟아오르는 혈압을 꾹 눌러 참는 듯한 모양새로 탑주는 큼지막한 상자 하나를 꺼냈다.
“하엘, 열어봐.”
“네.”
하엘은 여전히 겁에 질린 모습으로 형진의 말에 따랐다.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반짝이는 금괴와 보석, 그리고 아이템과 함께 증서 몇 개가 들어 있었다.
아이템은 제쳐두고 우선 증서부터 확인해 보았다.
첫 번째 증서는 앞으로 불의 벽에서 마법이나 아이템을 구매시 일정 액수를 할인해 주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두 번째 증서는 불의 벽에서 마법사들을 빌려 쓸 경우 역시 일정 액수를 할인해 주겠다고 적혀 있다.
세 번째 증서는 소유자를 불의 벽 마탑의 명예 회원으로 받아들인다는 내용이다.
“명예 회원?”
“네.”
“무슨 혜택이 있지?”
나이도 어린 자식이 아까부터 반말로 틱틱거리는 것이 기분 나빴는지 다시 탑주의 머리에 혈관 마크가 하나 더 찍힌다.
“크흠… 일단 연회비를 납부하시면…”
“뭐? 납부?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그야 마탑의 회원 자격은 매우 영광스러운 것으로서…”
탑주는 차분하게 회원이 되었을 때의 장점을 설명하려 했지만, 형진은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증서를 펼쳐 보이고 있는 하엘에게 명령을 내렸다.
“하엘.”
“네.”
“태워.”
명령이 떨어지자 하엘은 두 번 묻는 일도 없이 손에 들고 있던 명예 회원 증서를 그대로 불태워 버렸다.
“헉?”
어떠한 마법의 발현도 없이 순간적으로 불타 사라지는 명예 회원 증서의 모습에 탑주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쓸데없이 자부심 넘치는 마법사들답게 명예 회원 증서는 여러 가지 마법으로 보호되고 있었다. 바닷물에 빠져도 내용이 지워지지 않는 내수성은 물론이고, 불이나 약품 같은 것으로부터 보호된다. 그렇게 이중삼중으로 보호 마법이 걸린 명예 회원 증서가 아차 하는 순간 그대로 불타 사라져 버렸으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형진은 그렇게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는 탑주를 향해 다시 말했다.
“내놔.”
“네?”
“그거 다시 내놓으라고.”
“…”
보통 일반적인 게임애서라면 이런 상황 자체가 연출될 수 없겠지만, 엘리시온은 개개의 NPC에게 사념체가 주입되어 있는 터라 각자에게 입력된 개성에 따라 대응을 하도록 되어 있다.
“하하… 농담도…”
“농담 아닌데. 내놔. 다른 데 갈 테니까.”
“…”
탑주의 이마에 다시금 혈관 마크가 뽈록 하고 튀어 나온다. 형진은 어쩐지 그렇게 뽈록 튀어나온 혈관 마크를 손으로 눌러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지만, 꾹 눌러 참았다.
“마음에 안 드시는 점이 있다면 재고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내놓으라는 말 안 들리나.”
“…”
하지만 탑주는 마법총서를 다시 돌려주지 않았다. 뽈록뽈록 혈관 마크가 튀어나온 모습을 한 채, 양손으로 그것을 꽉 움켜 잡고 있을 뿐이다. 잘 하면 마이 프레셔스를 외칠 것 같은 모양새다.
형진은 그런 탑주를 향해 비웃음을 던지며 말을 이었다.
“사람을 호구로 봐도 유분수지. 마탑의 지분을 줘도 모자랄 판에 회비를 내고 회원이 되라고? 지금 장난해?”
“그건…”
“내놔. 더 이상 말하기 싫으니까.”
탑주의 이마에 다시금 혈관 마크가 뽈록 튀어 나온다.
“하하… 손님.”
“왜?”
“그런데 왜 아까부터 반말이신지.”
“불만이냐?”
“네, 불만입니다.”
“그래서, 못 주겠다고?”
“네. 그러니 그거나 가지고 썩 꺼지시지요.”
원래 퀘스트 상으로는 상자에 든 것만 받고 꺼지는 것이 맞다. 하지만 애초에 형진은 저런 푼돈을 받고자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다.
형진은 피식 웃으며 조용히 자신의 뒤에 시립하고 있던 요안나에게 말했다.
“요안나.”
“네.”
“쟤가 나보고 꺼지라는데.”
“저도 들었습니다.”
단아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요염한 모습의 메이드 차림이었던 요안나는 어느 순간 모습이 확 바뀌어 순백의 갑옷과 백합문양이 새겨진 커다란 깃발을 든 여기사의 모습으로 돌변했다.
형진은 마침내 요안나가 준비를 마치자, 짧게 명령을 내렸다.
“밟아.”
명령이 떨어지자, 요안나는 그대로 탑주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게 무슨!”
아무리 그래도, 설마 이곳에서 곧바로 공격을 가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탓에 탑주는 기겁을 하며 뒤로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하엘.”
“네.”
“차 좀 끓여봐.”
“아, 알겠습니다.”
하엘은 두려움 가득한 표정으로 탑주의 방 안에서 멋대로 티세트를 가져다가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파괴와 재생의 권능 가운데 하나인 꺼지지 않는 불을 일으켜 주전자에 담긴 물을 데우고 찻잎을 우려 형진에게 건넨다.
“이런 미친!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거라 생각하는가!”
“요안나. 아직도 저 놈 입이 나불거리는데.”
“죄송합니다.”
“크억!”
결국 참다못한 탑주가 마법을 일으켜 요안나를 공격하기 시작했지만, 상성이 너무 좋지 않았다. 즉시 발현 가능한 수준의 마법 같은 건 아예 방어도 하지 않는다. 타격을 입힐 정도의 마법을 운 좋게 발현해도, 하얀 백합이 수놓아진 깃발이 한 번 휘둘러지면 거짓말처럼 지워져 버린다. 거리라도 벌릴 수 있으면 모르겠는데, 좁은 집무실 안에서는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이… 이… 네놈들이 감히!”
결국 분노 게이지가 최대치에 도달하자, 탑주는 더 이상 참지 않겠다는 듯이 전신의 마력을 개방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형진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탁자에 내려놓았다.
지잉!
곧바로 작은 이명과도 같은 떨림이 들려왔지만 탑주는 개의치 않고 자신의 마력을 최대한으로 개방해 마법을 발현했다.
“더 이상 참지 않겠다! 죽어라! 심판의 불꽃!”
탑주의 외침과 함께 작열하는 하얀 불꽃이 그의 손으로부터 뻗어 나와 모두를 감싸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꼴좋다! 어떠냐. 이것이 바로 나의…”
“나의 뭐?”
“어?”
탑주는 잠시 정신이 멍해지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자신의 집무실 전체에 끓어오르는 듯한 하얀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눈앞에서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있는 남자는 물론이고 집무실의 집기조차도 전혀 그 열기의 영향을 받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법이 발동되기 전 형진이 탁자에 내려놓은 것은 다름 아닌 보호와 균형의 성물. 아무리 탑주의 마법이 강대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한들, 여신의 가호가 담긴 성물에 의해 선포된 성역을 거스를 수는 없는 일이다.
“컥!”
잠시 그렇게 눈앞에 펼쳐진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넋을 놓고 있던 탑주는 요안나가 휘두른 깃대에 얻어맞는 순간 그대로 폭 고꾸라지며 무릎을 꿇고 말았다.
“탑주님!”
바로 그때, 이변을 알아차린 마법사들이 다시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형진은 여전히 느긋한 표정으로 찻잔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향기를 음미하더니 다시 이렇게 말했다.
“하엘.”
“네.”
“너 돌아가면 차 끓이는 것부터 다시 배워라.”
“죄, 죄송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밟아.”
“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