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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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싹쓸이
안녕하신가. 힘세고 강한 아침. 만일 내게 물어보면, 나는 형진.
“끄으으으응… 차!”
아침 햇살이 방 안으로 들어오는 느낌에 눈을 뜬 형진은 기운차게 기지개를 한 번 켜고는 창가로 가서 커튼을 열어젖히고 테라스로 통하는 미닫이문을 열었다.
“음, 좋군.”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아침 햇살을 마음껏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잠시 그렇게 비타민 D를 합성하고 있던 형진은, 뒤에서 들려오는 작은 신음 소리를 듣고는 다시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갔다.
“우으음…”
“눈 부셔요…”
테라스를 통해 들어온 아침 햇살 때문인지 마눌들은 반쯤 뜨다 만 눈으로 그렇게 칭얼대고 있었다. 이런 잠꾸러기 마눌들 같으니. 형진은 그녀들의 모습에 피식 웃고는 아바타를 욕실로 보내 씻을 준비를 했다.
“자아… 우리 어리광쟁이 여왕님들. 이리 온.”
“웅…”
형진은 오늘따라 어리광이 심해진 마눌들을 한 명씩 조심스럽게 안아 올려 욕실로 데려다가 비치 베드 형태의 긴 의자에 하나씩 눕혔다.
“으음…”
잠이 깨다말아서 비몽사몽이었던 마눌들은 이내 형진이 본신과 아바타로 자신들의 머리를 감겨주고 몸을 조심스럽게 씻기자 기분이 좋은지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물론 그래봐야 눈은 여전히 반쯤 감은 상태지만.
“좋아?”
“네… 너무 좋아요.”
너무 차갑지도, 그렇다고 너무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물로 그렇게 정성스럽게 몸을 씻기는 일이 끝나자, 마눌들은 그제서야 감고 있던 눈을 뜨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키스해 줘요.”
“저도요.”
“저도.”
“킥. 우리 여왕님들, 오늘은 완전히 애기들이 되어 버렸네.”
형진이 웃으며 요구대로 가만히 입을 맞춰주자 마눌들은 그제서야 만족했다는 듯이 긴 의자로부터 몸을 일으키더니, 반대로 형진의 몸을 씻겨 주기 시작한다.
그렇게 서로의 몸을 씻겨주는 일이 끝나고 나서야 그들은 비로소 침실로 돌아와 옷을 갖춰입기 시작했다.
“오늘은… 모두 함께 바닷가에서 물놀이나 할까.”
“정말요? 바쁘지 않아요?”
“그건 이쪽.”
“아하.”
마눌들은 아바타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밤 생활의 난이도가 올라가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가정과 일을 동시에 해치울 수 있는 수단이 생긴 건 확실히 좋은 일이다.
“음… 어쩐지 부럽네요.”
제랄딘은 그렇게 말하고는 이내 무얼 떠올렸는지 얼굴이 빨개지며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니, 제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
“아무 말도 안했는데?”
“으으…”
“킥.”
그렇게 자폭해 버리고는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모르는 제랄딘을 끌어당겨 품에 안은 채, 형진은 다시 말했다.
“아쉽게도 이건 아무나 쓸 수 있는 기술이 아니라서 말이지. 게다가 아바타의 가격도 만만치 않고.”
“얼만데요?”
“공헌도 백만.”
“헉!”
다른 건 몰라도 왕성 라이언하트를 만드는데 들어간 공헌도가 백만이라는 것은 마눌들 모두 잘 알고 있는 일. 확실히 이런 것이 있으면 편리하겠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가격을 듣자 절로 헛숨을 들이켜 버린다.
“금화 만 개 따윈 비교할 대상조차 못 되겠네요.”
“그럼 미엘 언니는 공헌도 천만짜리 몸을 가진 건가요?”
“응? 얘기가 그렇게 되나?”
“에헴. 제가 이래봬도 비싼 몸이거든요.”
“하하하.”
이제는 마눌들도 만성이 되었는지 어젯 그토록 격렬한 밤을 보내고도 어느새 말짱해진 모습이다. 물론 중간에 제랄딘이 허리가 아프다는 시늉을 하긴 했지만, 유아가 회복을 걸어 주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말짱해지고 말았다.
어쨌거나 그렇게 오순도순 얘기를 나누며 옷을 챙겨 입는 일이 끝나자, 형진은 마눌들을 식당으로 내려 보내고는 슬그머니 어딘가로 향했다.
후후후.
은신과 잠행까지 펼쳐 가면서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간 형진은 베개를 껴안은 채 잠들어 있는 누군가를 음흉한 미소를 지은 채 바라보다가 시트를 확 들어올렸다.
“언능 못 일어나!”
“꺅!”
크으. 역시 아침엔 이걸 해줘야 제 맛이란 말이지.
“엥?”
하지만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싶어서 슬쩍 바라보니, 침대 아래로 우아하게 굴러 떨어진 요안나가 살짝 흐트러진 네글리제 차림으로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런 요망한 신녀 같으니. 설마 자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가.
그러나 요안나처럼 만반의 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는 메이드만 있는 건 아니었다.
“언능 못 일어나!”
“으악!”
꺄악도 아니고 으악이다. 모처럼 흑요호의 모습이 아닌 상태로 잠옷까지 제대로 갖춰 입은 채 인간 대접을 받으며 침대에서 곤히 숙면을 취하고 있던 하엘은, 느닷없이 시트가 확 들쳐지자 비명과 함께 아래로 굴러 떨어지며 바닥에 부딪히고 말았다.
“으, 으으…”
“…”
운이 나쁘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하엘이 딱 그짝이다. 하필 떨어지면서 바닥과 키스를 하는 바람에 코피가 터져 버린 것이다. 정말 보면 볼 수록 미엘과 동족이 맞나 싶은 느낌이다. 미친놈이라는 속성이 한꺼풀 벗겨지자 은근 허당인 속내가 드러나기 시작한 거라고 봐야 하나.
“으이그… 칠칠맞게.”
형진은 혀를 차고는 휴지를 꺼내어 그녀의 코 언저리를 감싸주고는 그대로 번쩍 안아 올려 유아에게로 데리고 갔다.
“유아. 얘 좀 봐줘.”
“저런. 잠시만요.”
오늘따라 더 뽀얀 얼굴로 해맑게 웃으며 사제들과 식재료를 다듬고 있던 유아는 형진의 아바타의 품에 안긴 하엘을 보고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얼른 달려와 회복을 걸어 주었다.
“어떻게 된 거에요?”
“침대 아래로 굴러 떨어지더니 그대로 바닥에…”
“저런.”
생각만 해도 아프겠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린 유아는 코피가 멎었는지 확인하고는 한 번 더 회복을 걸어주고 나서야 다시 사제들 옆으로 돌아갔다.
“내가 이 세계에 와서 침대 뒤집기를 수도 없이 해봤지만 바닥에 부딪혀서 쌍코피가 터진 애는 네가 처음이다.”
“…”
하다 못해 저 둔탱이 유아조차 엉덩이를 부딪혀서 울상이 되긴 했어도 쌍코피가 터진 적은 없다. 하엘은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수치심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지만, 그제서야 자신이 형진에게 안겨 있음을 깨닫고는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내, 내려… 주세요…”
“그래. 가서 씻고 옷부터 갈아입고 와.”
“네…”
하엘 자신이 생각해도 기분 나쁠 정도로 고분고분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눈빛이 마주치는 순간 거역하기는커녕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게 되어버린 탓이다. 하엘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스스로 파괴와 재생의 파편임을 자각한 형진이고 보면 이런 식으로 고양이 앞의 쥐가 되어 버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보호와 균형이 고용 계약서로 그녀의 행동을 제어하고 있는 것이 그처럼 강대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도 사실 따지고 보면 형진이 중간에 개입했기 때문이다. 말이 쉬워서 여신의 명령이지, 사실 보호와 균형이 그녀에게 내렸던 명령 대부분은 형진의 말을 그대로 녹음기처럼 따라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상 여신의 입을 통해 형진이 명령을 내린 것이나 다름 없다고나 할까.
하마란 역시 그런 식으로 고용 계약서를 통해 계약을 했음에도 말 하나 행동 하나까지 철저하게 제약을 받지는 않고 있는 걸 보면, 확실히 이전부터 형진이 하엘에 대해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로 봐야 한다.
하엘이 허겁지겁 올라가자 형진의 아바타 역시 자취를 감추었고, 뒤이어 어쩐지 살짝 얼굴이 상기된 요안나를 데리고 형진의 본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빠아!”
“어이쿠, 공주님들. 일어나쪄요?”
“응! 빠아도 일어나쪄요?”
“물론이지요. 뽀뽀!”
“뻐뻐!”
귀여운 아기 공주들과 일일이 입을 맞추는 것으로 아침 인사를 마친 형진은 뿌듯한 기분마저 느끼며 흥겹게 요리를 시작했다.
그렇다. 자신은 파괴와 재생의 파편이기도 하지만, 또한 형진이라는 이름의 가장이다. 미친놈 따위 알게 뭐냐.
기분이 좋아서 그런지 요리도 여느 때보다 더 잘 되는 느낌이다. 연신 크리티컬이 터지며 특제 요리가 만들어지는 걸 보니, 확실히 기술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덕분에 하엘은 다시 한 번 패닉에 빠져야 했지만, 그런 것 따위는 사소한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식사 중에 식구들에게 자신이 분신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음을 알렸다. 형진이 둘이나 동시에 돌아다니는 모습에 놀라 자빠지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였지만, 이미 미엘의 분신이 바쁘게 돌아다니는 걸 일상적으로 봐왔던 식구들은 그런가보다 하는 표정을 지을 뿐이다.
할처럼 부럽다는 표정을 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아도 상변태인 형진이 둘로 늘어나 버린 것에 대해 마눌들에게 애도의 시선을 보내는 크루그나 하마란 같은 이도 있었지만, 어쨌든 모두 생각보다 별다른 위화감 없이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역시 이래서 사람이란 사전 교육이 중요한 모양이다.
“요안나와 하엘은 나를 따라와.”
본신은 오랜 만에 가족들과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마눌들과 아이들을 데리고 해변으로 향했지만, 아바타는 할 일이 따로 있었다. 바로 미엘이 후다닥 분신으로 만들어낸 다섯 개의 필사본을 오대 마탑에 전해주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저도요?”
영락없이 집에서 허드렛일이나 할 거라고 예상했는지, 하엘은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싫어?”
“아뇨… 싫다는 건 아니지만.”
하엘은 눈조차 마주치지 못한 채 얼른 깨갱하며 시선을 내리 깔았다. 솔직히 말해 하엘은 점점 더 형진이 두려워지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그의 말을 거역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이제 절실하게 깨닫고 있었다. 보호와 균형이 아기들과 물놀이를 가면서 형진의 말을 잘 들으라고 명령을 내리긴 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녀는 형진에게 점차 지배당하고 있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가 지금 이순간 자신의 옷을 찢고 덤벼도 거부할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럽다. 그런 상황이라면 하엘이 아닌 누구라도 두려움에 젖어들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럼 잔말 말고 따라와.”
“네…”
사실 파괴와 재생을 받드는 구현자라고 해서 이렇게 형진이 무조건적인 지배력을 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만약 이것이 구현자 전원에게 통하는 일이라면 어딘가에 은거하고 있는 구현자들을 모조리 찾아내 수족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도 가능한 일일 테니까. 결국 하엘이 이렇게 형진에게 쩔쩔 매는 건 고용 계약서라든가 발정기라든가 특제 요리라든가 기타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한 결과라고 봐야한다.
엘리시온으로 넘어가자 크루그가 왕녀들을 가르치고 있는 모습을 발코니에서 흥미로운 시선으로 지켜보던 수빈과 승희가 그들을 맞이했다.
그녀들은 미엘을 닮은 하엘의 모습에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반갑게 인사를 주고 받았다.
“아름님과 새름님은 오늘도 훈련인가요?”
형진의 물음에 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많이 아쉬워 하더라고요. 그래도 보호와 균형님께서 주신 힘 덕분에 훈련은 아주 순조로운가 봐요.”
“그건 정말 다행이군요.”
확실히 운동선수에게 있어 보호와 균형의 권능은 다른 어떤 힘보다도 대단한 효과를 발휘할 수 밖에 없다. 부상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고, 언제나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시켜 준다. 무엇이 있어 감히 비교를 할 수 있겠는가.
다행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던 형진은 문득 이렇게 말했다.
“혹시 시합이 언제인지 아십니까?”
형진의 질문을 듣고 시합이 언제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수빈은 순간 그 말이 지닌 의미를 깨닫고는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네? 설마… 가서 구경하시게요?”
“네.”
이제는 수빈은 물론 승희마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답하는 형진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쌍둥이 자매의 경기를 구경한다는 얘기는 다시 말해, 지금 눈앞의 이 남자가 현실의 지구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뜻임을 알아차린 탓이다. 그건 아마도 현실에서 자신들이 여신의 권능을 쓰는 것과는 또다른 충격적인 일이 될 것이다.
“아, 알아볼게요.”
“부탁드립니다.”
일단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형진은 수빈에게 문의해 5대 마탑의 위치를 확인하고는 요안나와 하엘을 데리고 그곳을 향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