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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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또다른 만남
저녁이 되자 형진의 아바타가 요안나와 하엘을 데리고 돌아왔다.
“수고했다. 가서 쉬도록.”
“네.”
이들이 오늘 복속시킨 곳은 5대마탑 가운데 불의 벽을 비롯해 무지개 호수와 요정의 숲, 이렇게 세 군데이다. 무지개 호수는 주로 소환 마법을 다루는 곳이며, 요정의 숲은 주술 마법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굳이 그런 식으로 다른 곳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을까요.”
“왜?”
“마법총서는 대단한 물건이에요. 그리고 위험한 물건이기도 하고요. 이런 게 함부로 외부로 유출되는 건 역시 좋지 않은 일이 아닐까 싶어서요.”
“헤에, 그 정도야?”
미엘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형진은 솔직히 말해서 별로 실감이 되지 않았다. 사실 마법이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지금 그의 주변에 넘쳐나는 신들의 힘들보다 더 대단할까.
“뭐… 어차피 엘리시온 안에서 그것을 누군가가 읽을 일은 없을 테니까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타나토스 출신 중에서도 꽤 실력 있는 마법사가 아니라면 마법총서의 내용은 이해할 수 없다. 엘리시온으로의 접속이 자유로워서 아무나 막 들어가고 그럴 수 있으면 모르겠지만 타나토스로부터의 접속은 형진은 물론이고 공포와 죽음까지도 면밀하게 살피고 있다. 형진이야 실수를 할 수 있다 쳐도, 공포와 죽음은 그런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놓칠만한 신이 아니다. 괜히 관음증이겠는가.
[닥쳐.] “크흠.”이렇게 안 보고 안 듣는 것 같아도 꼼꼼하게 살피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
형진은 괜히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게다가, 이번 퀘스트가 성사되면서 마탑들이 만들어낼 성과물은 미엘 혼자서 연구하는 것보다 훨씬 다양할 거야. 아무래도 이런 분야에서는 한 손이 여럿을 감당하기 힘드니까.”
“그건… 그렇겠네요.”
미엘은 충분히 훌륭한 마법사지만, 한 사람이 생각해낼 수 있는 발상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물론 마탑의 구성원들은 일반적인 인간들이 아니지만, 일부러 마탑을 다섯 군데로 나누어 놓은 것은 그 자체로 마법의 다양성을 추구하기 위한 시도가 아닐까. 그 가운데 단 하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마법총서를 배포하는 이상, 이미 예비 되어 있는 다양한 성과들이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올 것이다.
“필요하면 미엘이 연구의 진행 상황을 직접 통제할 수도 있어.”
“정말요?”
“응. 내가 왜 힘들게 그녀석들을 전부 때려잡고 다니는데.”
“아하.”
말이 나온 김에 형진은 미엘에게 새로운 탈것의 개발을 맡겨 보기로 했다.
“이런 걸 한 번 만들어 봐.”
“이게 뭐에요?”
“킥보드. 또는 스쿠터. 이름이야 나중에 편한 대로 지으면 되겠지만, 일단은 일인승의 간이형 탈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
“헤에…”
정확히는 불의 벽 마탑에서 보았던 탈 것을 보고 난 뒤, 그런 위험천만한 물건이 아니라 아이들도 어렵지 않게 탈 수 있는 물건을 한번 만들어 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말을 꺼낸 것이다.
물론 지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킥보드와는 다르다. 무엇보다도 이 킥보드는 바퀴가 없으며, 대신 허공을 떠다닐 수 있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 장난감인가요?”
미엘의 말에 형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하지만 성능을 높이면 아이들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훌륭한 탈 것이 될 거야. 그리고, 일단 이것이 성공하고 나면 더욱 크게 만들어서 나중에는 왕성 라이언하트를 공중에 띄워 놓을 수도 있게 되겠지.”
“아…”
물론 왕성 라이언하트 같은 거대한 구조물을 허공에 띄워 놓고 자유자재로 움직이게 하려면 거기에 필요한 동력을 구비하는 것만으로도 만만찮은 일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선물.”
“이건…”
형진이 품속에서 수정으로 만들어진 해골 하나를 꺼내어 보여주자 미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것을 살펴보다가 이내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이, 이건…”
“마력 심장이라는 물건이야. 당장은 무리겠지만, 일단 원리를 파악해서 분석해 보도록 해.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취급에 주의하도록 하고.”
“맡겨 주세요.”
아크리치가 남긴 마력 심장의 위력은 무려 2억 마력. 참고로 니미츠급 원자력 항공모함의 기관 출력이 26만 마력이고, 아폴로 우주선을 달로 보내는데 사용된 새턴 V 로켓의 1단 출력이 1억 6천만 마력이다. 참고로 이 새턴 V의 1단 로켓은 총중량 3000톤의 물건을 발사 2분 40초 후에 초속 2700미터까지 가속시키는 무지막지한 물건이다.
형진은 물론 거기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2억 마력이라는 수치가 절대로 우습게 여길만한 것이 아니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엘리시온에 따로 연구실을 만들어 줄 테니까, 마력 심장에 대한 연구는 그곳에서만 하도록 해. 자칫 잘못하면 왕성이 순식간에 날아가버릴 수도 있는 물건이니까.”
“네. 명심 할게요.”
그렇게 두 번 세 번 다짐을 하고 난 뒤에야 형진은 미엘에게 마력 심장을 건네주었고,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받아 인벤토리에 넣어 두었다.
사실 왕성을 예로 들긴 했지만, 형진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우선 비공정 같은 물건이었다. 사실 비행형의 함선 같은 건 그리 효과적인 무기 체계라고 보기 어려운 면이 있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한번쯤은 구현해 보고 싶다고나 할까. 게다가 보호와 균형의 성물을 적절히 배치하면 공중에서 미사일 세례를 맞고 격추 당하는 일도 없을 것 같으니 시도해 봐서 나쁠 일은 없을 것 같다.
어쨌든, 그렇게 그날은 지나가고 다음 날이 밝아왔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아바타로 하여금 요안나와 하엘을 데리고 남은 두군데의 마탑을 손에 넣기 위해 엘리시온에 접속하도록 한 형진은, 하루 동안 충분한 휴식을 취한 비와 낭만의 면접을 실시했다.
“반갑습니다. 다시 소개드리겠습니다. 공포와 죽음의 뜻을 받드는 조정자이며, 희망과 생명, 보호와 균형, 꽃과 바람, 황혼과 망각의 대리자이고, 요정들의 왕이며, 또한 엘 파르드의 국왕인 진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비와 낭만님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 저야 말로…”
형진의 입에서 신들의 이름이 연이어 흘러나오자 비와 낭만은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미리 들으신 바가 있을테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간단하게 비와 낭만께서 지니신 힘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게… 지금은 딱히 힘이라고 할 만한 것이…”
“지금은 그렇지만 나중에도 그런 것은 아니겠지요?”
“물론입니다.”
“신앙과 공헌도가 갖추어졌을 때, 베풀어 주실 수 있는 권능에 대해 설명해 주시면 됩니다.”
“아…”
보호와 균형이 제대로 설명을 안 해준 건가. 형진은 살짝 귀찮은 느낌이 들었지만 웃는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그렇게 말을 이었다.
“음… 우선은 비를 내리게 할 수 있습니다.
“호오. 그건 참 대단하군요.”
비는 농경 사회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요소이다. 너무 많아도 문제고 너무 적어도 문제지만, 적절한 때에 적절한 양의 비가 내리면 그것만으로도 평작 이상의 수확을 거둘 수 있는 발판이 되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제가 임의로 비를 내리게 하면, 그것은 이미 예정되어 있던 비가 내리지 않게 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결과적으로, 한 지역에서 한 해에 내릴 비의 총량은 정해져 있다는 얘기죠. 저는 그저 비를 내릴 시기를 조율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흠…”
비와 낭만은 그 얘기를 하고는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가 잊혀지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비와 낭만을 신앙했다. 원하는 때에 원하는 만큼의 비를 내려줄 수 있다는 것은 분명 대단한 권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한해에 내릴 비를 한 시기에 집중적으로 내리게 해버리니 이후로 극심한 가뭄이 찾아왔다. 사람들은 다시 추종자들을 통해 비와 낭만에게 비를 청하도록 했지만, 그 노력은 헛수고로 돌아갔고 분노한 사람들은 비와 낭만에 대한 신앙을 버렸다.
기운 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자신이 잊혀지게 된 내막을 설명하는 비와 낭만의 모습에 형진은 혀를 찼다.
사실 이 문제는 처음부터 한 해 내릴 비의 총량이 예정되어 있다는 것만 확실하게 설명했어도 될 일이다. 그러한 전제를 먼저 깔고, 가장 적당한 시기에 딱 적당한 양의 비만 내리게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원칙도 없이 그냥 사람들이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니 나중에는 오히려 더 끔찍한 가뭄이 찾아올 수밖에. 모처럼 훌륭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적절하게 운용하지 못한 탓에 오히려 욕을 먹고 잊혀지게 되었으니, 이걸 불쌍하다고 해야 할지 미련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좋습니다. 그럼 그 외에 다른 힘은 무엇입니까.”
“싹 틔우는 힘입니다.”
형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형태의 힘이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싹을 틔운다? 식물의 싹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물론 그것도 해당됩니다만, 제 힘은 좀 더 여러 가지로 의미로 쓰입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감성을 불러 일깨운다든가, 무언가를 봤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심상을 일깨운다든가,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무언가를 일깨운다든가 하는 식이죠.”
“오오… 과연. 그런 의미였군요.”
황혼과 망각이 지닌 힘과 마찬가지로, 비와 낭만이 지닌 힘은 형이상학적인 분야에 걸쳐 있었다. 물론 황혼과 망각처럼 두렵고 무서운 부류의 힘은 아니지만, 대신 창작이나 발명과 같은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강력한 힘이 될 만한 권능인 셈이다.
“흠…”
어떻게 보면 비와 낭만 역시, 이런 훌륭한 능력을 지닌 신이 왜 잊혀졌는가 의아할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신의 권능이라는 것이 다 그러한 것이겠지만, 비와 낭만은 적절한 장소와 시간을 만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문제일 것이다.
예술이 흥성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위한 사상적 기반은 물론이고, 충분한 경제적 기반 또한 마련 되어야만 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들이 저마다 후원자들의 도움을 받아 명작을 남겼던 것처럼, 아무리 훌륭한 재능을 지닌 이가 있더라도 그 사람이 본격적으로 예술에 매진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충분한 기반이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타나토스는 비와 낭만 같은 신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기엔 너무나도 척박한 곳이 아닐 수 없다. 물론 타나토스에도 예술의 사조는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고귀한 자들의 여흥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에 비와 낭만 같은 신이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하기엔 아무래도 부족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반대로 지구와 같은 곳이라면 어떨까.
예술 자체에 있어서도 무한에 가까운 경쟁을 치러야 하는 그곳이라면, 비와 낭만이 지닌 권능은 무엇보다도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게다가 낭만의 권능은 비의 권능처럼 정해진 총량 내에서 재능을 이끌어내는 식의 힘이 아니니, 더욱더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게 될 것이다.
어찌 보면 비의 권능도 단순히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게 만드는 권능이 아니라, 그렇게 틔워진 싹을 더욱 크게 자라나도록 만들어 주는 권능인건 아닐까. 이제껏 제대로 쓰일 일이 없어서 당사자인 신 스스로도 미처 확인하지 못한 그런 권능인 건 아닐까.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지만,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 될 것 같다. 여러모로 이 신은 재미있는 힘을 지니고 있는 느낌이다.
“좋군요.”
“네?”
마침내 생각을 마친 형진의 말에, 비와 낭만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말해 다른 이들에 비해 현실적으로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권능 들이라 별 가망이 없다고 스스로도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 놀라움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설마… 저도 가능한 겁니까?”
“물론입니다.”
형진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당신께서 지니신 권능이라면 세상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세상을…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놀란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하는 비와 낭만을 바라보며, 형진은 마치 판결을 내리는 듯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자, 저와 계약하시겠습니까?”
비와 낭만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감격에 몸을 떨며 답했다.
“네! 당신과 계약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