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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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기획
여기서 팬클럽이란 중의적인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보호와 균형의 팬클럽. 또 하나는 순수하게 그녀를 좋아하는 팬들의 집합체. 하지만 애초에 형진은 이 두 가지 의미의 혼용을 전제로 추종자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고, 이제야 그 이름의 효과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발견한 셈이다.
사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생각은 하고 있었어도 딱히 그것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방법이 없어서 지금까지 미루어 뒀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물론 타나토스에서 신도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인터넷 방송등을 활용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경제나 인구등의 규모를 따지면 보다 효과적인 홍보 수단을 고려해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미뤄두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런 고민을 일거에 날려버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이가 등장했다. 바로 요안나이다.
그녀는 미국에서 경제와 정치, 양 분야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 하고 있다. 그녀의 중요성은 미국에서 부여받은 VIP코드에서도 확인된다. 코드 제로. 일반적으로 외국의 국가 원수에게 코드 원이 부여되는 것을 감안하면 미국 정부가 그녀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형진은 그녀의 파편을 전해 받으면서, 요안나가 실제로 미국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 인물인지 여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정치적인 면은 그렇다 쳐도, 그녀가 미국 경제에 가진 영향력은 그야말로 엄청나다는 표현조차 민망할 정도였다. 일일이 다 나열하는 것조차 난감할 정도라고나 할까.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그녀의 재채기 한번에 미국 경제가 휘청거릴 정도라고 봐도 좋을 정도다. 하긴 그 정도 되니까 어디서든 전화 한 번에 VIP 전용 헬기가 날아오는 것이겠지만.
“정말요? 정말로 그런 일이 가능해요?”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되묻는 여신의 모습에 형진과 요안나는 웃음을 지었다.
“물론입니다. 그렇지?”
형진이 묻자 요안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여신께서 원하신다면 그 정도야 어려운 일이 아니죠.”
“어떻게요?”
눈을 반짝이며 기대 가득한 표정으로 묻는 여신의 모습이라니. 새름이 다시 한 번 코피를 쏟으며 뒤로 넘어가 버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럴 마음이 있으시다면, 차근차근 기획을 해야겠지요. 하지만 역시 인지도를 빠르게 쌓는 가장 좋은 방법은 CF가 되겠네요.”
“CF요?”
지구에는 노래나 뮤직비디오나 영화나 드라마처럼 이름을 알리기 위한 다양한 매체가 존재하지만,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것은 역시 매시간 텔레비전에서 계속적으로 노출되는 텔레비전 광고를 들 수 있다. 또한 여기에 각 포털 사이트의 메인 광고까지 뿌려대면 그 효과는 더욱 폭발적이게 마련.
물론 시간이 적게 드는 반면 그만큼 비용도 폭발적으로 소모되겠지만, 그 정도는 요안나에게 있어 별로 대수로운 일도 아니다.
간단하게 CF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효과를 지니고 있는지 설명하자 문득 옆에서 듣고 있던 승희가 손을 들고 질문이 있다는 제스처를 취한다.
“네. 말씀하세요.”
요안나가 허락하자 승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무슨 생각이신지는 알겠는데요. 여신님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촬영이 불가능하지 않나요? 함부로 지금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노출시키는 것도 좀 그렇고.”
그 말에 대답한 것은 형진이었다.
“그건 제가 처리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네? 어떻게요?”
“제가 지닌 힘 가운데 하나를 사용하면 영상을 만들어내는 건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어떤 식의 영상을 만들 것인지 기획을 잡고 콘티를 작성하는 정도의 도움은 받아야겠지만요.”
“아…”
카트린은 형진의 말을 듣고는 망상 필드를 떠올렸다. 확실히 그것이라면 여신을 중심으로 그럴 듯한 영상을 만들어내는 건 일도 아니다. 물론 텔레비전 방영이 가능하도록 가공하는 것이 문제긴 하겠으나, 어떤 특수효과나 촬영기법도 망상 필드만큼 완벽하게 상상한 것을 구현하지는 못한다. 물론 앵글이나 기타 여러 가지 주의해야할 점이 있겠지만, 콘티 같은 것이 자세하게 준비된다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일단 이름과 얼굴을 알리고 나면 뮤직비디오 같은 것을 통해 팬층을 확보하는 편이 좋겠죠. 영화나 드라마는… 다른 배우들과 상호작용이 필요하니 좀 어려울 것 같지만요.”
“뮤직비디오가 뭐에요?”
“방금 흉내 내고 계셨던 춤과 노래나 나오는 영상을 말합니다.”
그 말에 보호와 균형은 물론이고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여신들마저도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CF는 그냥 그런가보다 싶어도, 뮤직비디오는 뭔가 확 마음에 닿는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정말요? 제가 아까 그 분들 같은 모습으로 나오는 거에요?”
“물론입니다.”
“그거 타나토스의 신도 여러분들에게도 보여드릴 수 있는 건가요?”
“회합장이나 다른 몇 가지 손을 볼 부분이 있긴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형진이 답하자 보호와 균형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쳤다.
“할래요! 할게요! 꼭 하고 싶어요! 하게 해주세요!”
간절하다 못해 절실하게까지 느껴지는 그 표정에 지켜보던 모두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사실 여신으로서도 그리 생경한 일은 아니다. 지금까지 여신들은 성물을 통해 신도들과 교류하면서 몇 번이고 노래를 선보인 적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춤까지 구경하는 것은 라이언하트에 사는 축복받은 몇몇에 불과하지만, 이제는 그런 은혜로운 경험을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물론입니다. 그렇게 하려고 말씀을 드린 거니까.”
“아… 정말 감사합니다.”
일단 그렇게 의견이 모아지자, 요안나는 전화기와 노트북을 꺼내 어디론가 급히 연락을 취하기 시작했다. 형진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어느새 창밖으로 노을이 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차. 이거 식사 준비를 해야겠군요.”
아바타의 숫자가 늘어나서 좋은 점. 그것은 바로 인벤토리 공유다.
이게 무슨 소린가 하면, 서로 다른 세계에 있어도 인벤토리는 공유가 되기 때문에 얼마든지 다른 세계의 물품을 실시간으로 받아보는 것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왕성 라이언하트의 주방에서 유아와 사제들이 손질한 싱싱한 식재료를 직접 그곳에 가서 받아오지 않아도 아바타를 통해 인벤토리로 받아볼 수 있다는 얘기다. 이쯤 되면 요정 택배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이제 아바타를 최대 세 개까지 한꺼번에 활용할 수 있으니, 그렇지 않아도 엄청난 효용이 더욱더 엄청나게 발전될 것이다.
형진은 주방으로 가서 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화덕이 아닌 가스렌지와 오븐을 쓰려니 뭔가 어색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요리 장인의 실력이 어디 가는 건 아니다.
“도와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비록 현실에서는 게임 상의 아바타 능력을 쓰지 못하지만, 그래도 요리 자체에 관심이 있는 것은 마찬가지기에 수빈과 승희가 주방 보조 역할을 자처하고 나섰다.
오늘은 주빈들이 모두 한국 사람이므로 한식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엘 파르드의 평정이 끝나고, 가스트샵이 운영을 시작하자 타나토스 각지의 특산품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여기에 엘리시온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소스가 더해진 덕분에 현재 왕성 라이언하트의 식재료 창고에는 그야말로 산해진미가 그득하게 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형진은 그런 식재료들 가운데 일부를 아바타를 통해 인벤토리로 건네 받은 뒤 곧바로 요리에 들어갔다.
우선 전채는 밀전병에 쇠고기와 각종 야채를 말아 놓은 밀쌈말이와 수삼냉채로 시작한다.
수삼은 윗부분을 잘라내고 잔뿌리를 다듬은 다음 칼등으로 살살 껍질을 벗겨낸다. 오이는 굵은 소금으로 문질러 씻어 놓고, 배는 씨 부분을 피해서 납작하게 어놓는다. 이렇게 준비된 수삼과 오이, 배를 가늘게 채 썰어서 준비한 다음 배즙과 꿀, 그리고 흑초를 동일한 비율로 섞어 만든 소스를 뿌리고 잣을 얹어 내면 된다.
핑거푸드에 가까운 밀쌈말이에 쌉쌀하면서도 아삭한 수삼냉채로 입맛을 돋우자, 다음은 따끈한 수프가 뒤를 잇는다. 원래 한식이라면 수프 대신 죽을 내는 것이 맞겠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걸리니 고구마를 넣은 스프로 대신한 것이다.
이렇게 스프까지 먹고 나자 신선로와 갈비찜, 너비아니, 영양밥이 차례로 나간다.
“우와아아아…”
게임도 아닌데 순식간에 엄청난 요리들이 만들어져 나오는 그 모습이라니. 주방 보조 역할을 맡고 있는 수빈과 승희는 물론이고, 그 음식들을 섭취하느라 여념이 없는 이들마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음식이 만들어져 나올 때마다 아름과 새름은 물론이고, 카트린이나 여신들마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열심히 그것을 입 안으로 밀어 넣는다. 그렇게 헉헉거리며 식사를 이어가다가 어느 새 찾아온 만복감에 놀라 버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으… 배, 배불러요…”
“아차… 내일도 시합이 있는데…”
아름과 새름은 뒤늦게서야 과식을 해버린 걸 깨달았지만, 이미 입 안으로 들어가 소화되기 시작한 음식들을 어찌하겠는가.
사실 아름과 새름은 물론이고 수빈과 승희 역시 형진의 요리를 맛본 것이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아바타가 아닌 자신의 본신으로 형진의 요리를 만끽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찌 보면 모든 것을 잊고 그렇게 식사에 몰두해 버린 것 역시,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아바타 때의 버릇이 남은 탓인지도 모른다.
“살찌겠어요.”
“여신님. 살 안 찌는 권능 같은 건 없나요?”
“그게… 아하하하하…”
형진은 어쩐지 예전에 유아가 살을 빼기 위해 필사적으로 물 긷기를 하던 때의 일이 떠올라 빙긋 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나자, 신입 길드원 사인방은 휴식을 취하기 위해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카트린은 좀더 놀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포만감은 물론이고 하루 종일 이런 저런 일을 겪은 그녀들에게 떼를 쓰지는 못했다.
“그럼 가볼까.”
“네.”
형진은 카트린과 왕성 라이언하트로 일단 되돌아갔다. 아바타를 남겨 두었다고는 해도, 역시 본신으로 아기들을 만나고 싶었던 탓이다.
하지만 요안나를 버려두고 간 것은 아니다. 안방에는 여전히 두 명의 아바타가 열심히 매크로 체조를 추고 있었다.
“빠아… 졸려요…”
“오, 우리 공주님들. 졸려요?”
“응. 후아아아암…”
꾸벅꾸벅 졸면서도 아빠가 오자 인사를 하러 몰려드는 꼬마공주들의 모습에 형진은 절로 입이 벌어졌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역시 하루 일과에 이것을 빼놓으면 뭔가 허전하다.
그 와중에도 꾸벅꾸벅 조느라 정신없는 꼬마 공주들에게 일일이 입을 맞추어 준 형진은 아틀리에에 잠시 들러 목각 인형들이 일하는 모습을 살핀 다음, 마눌들이 기다리는 침실로 향했다.
하지만 그는 또한 아바타를 통해 요안나와 대화를 나누는 중이기도 했다.
“이것 좀 봐주세요.”
매크로 체조를 열심히 추던 형진의 아바타가 탁자에 노트북을 꺼내놓고 열심히 뭔가를 하던 요안나에게 다가섰다.
“광고를 발주할 회사를 몇 개 추려 봤어요.”
“어디…”
이제는 놀라지 않으리라 마음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내민 화면에 적혀 있는 회사들의 이름을 보는 순간 형진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크흠… 이렇게… 한꺼번에?”
차마 이름을 언급하기도 두려울 정도의, 하지만 한국에서 나고 자란 그 역시 한번쯤은 이름을 들어본 그런 유명한 회사들의 이름이 무려 십여개나 나열되어 있다.
“이 정도면 별로 많은 것도 아닌데요?”
“하하하…”
형진이 어색하게 웃자, 요안나는 그런 그를 마주 보면서 씩 웃었다.
“농담이에요. 이 중에서 세 개 정도씩을 추릴 생각이에요. 물론 그러자면 여신님들의 이미지에 맞는 회사를 골라야겠지만요.”
“세 개씩?”
“네. 여신님 한 분당 세 개씩.”
“…”
대충 어떤 식의 프로모션을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가 된다. 그렇게 CF를 내보내고 관심도가 높아졌을 때 그 세 명이 한데 모여 신곡을 내는 셈인가. 확실히 이슈를 만들기엔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괜찮을까?”
“뭐가요?”
“허세와 망상.”
그 말에 요안나는 걱정 말라는 듯이 이렇게 답했다.
“실은 그걸 말씀드리려던 참이었어요.”
“뭘?”
“엘리시온의 제작사. 이제 무너뜨릴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