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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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기획
공포와 죽음의 얘기를 들으면서, 형진은 어쩌면 허세와 망상이 굳이 게임의 이름을 엘리시온으로 붙인 이유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허세와 망상은 어쩌면 인과율조차 없이 그대로 멈춰 서 버린 그런 정적인 천국이 아닌, 보다 역동적이면서도 모두가 즐거울 수 있는 그런 공간을 만들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물론 그것이 공헌도를 벌어들이고 파괴와 재생의 파편이라는 것을 찾기 위한 수단이라 하여도 그처럼 방대한 규모의, 어쩌면 또 하나의 세계라고 할 수도 있는 곳을 그런 완성도로 만드는 것은 그만큼의 애정이나 이상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럼… 저에게 문양을 넘겨주고 엘리시온에 넘어간 그 주정뱅이는 어떻게 된 겁니까. 엘리시온이 그런 곳이라는 곳을 알면서도 넘어 간 겁니까?”
그의 질문에 공포와 죽음은 이렇게 답했다.
[알고서도 넘어간 것이다.] “어째서…”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신들조차 지루하고 따분해서 견디기 어려운 그런 공간에 스스로 넘어가다니.
[엘리시온의, 천국의 진정한 의미는 안식이니까. 지치고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하기 위함이라면 그만한 곳도 없지.] “아…”하지만 뒤이어 들려온 공포와 죽음의 대답에 형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처입은 영혼이라는 것은 그것에 걸맞은 특별한 방법이 아니면 좀처럼 회복하기 힘들다. 물론 카트린의 경우처럼 운이 좋으면 그러한 상처를 딛고 일어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이들이 그런 행운을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이들에게 있어, 모든 것을 잊고 안식과 함께 영혼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공간은 그 자체로 또한 천국이라는 말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엘리시온의 존재 의의는 바로 그러한 안식의 공간에 있는 셈이다.
어쩐지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세계의 단면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보호와 균형 같은 신들이 굳이 그렇게 고생하면서도 엘리시온에서 벗어나 여러 세계에 머무는 이유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에게 잊혀짐이 죽음과 같은 것으로 인식되는 원인도, 따지고 보면 엘리시온에서의 무미건조하고 정지된 시간들을 떠올리기 때문이 아닐까. 굳이 그럴 바에는 그냥 엘리시온에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에, 그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그것으로 인해 벌어지는 인과를 만끽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신앙과 공헌도의 의미 역시 이해가 된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사건과 변화의 씨앗. 신이 자신의 이름으로 인과라는 거대한 세계의 흐름을 일으켰음을 증명하는 지표에 해당되는 개념인 셈이다. 자신이 그 세계의 일부로서 작용하고 있다는 존재의 증명. 인간으로 치면, 살아있다는 실감을 느끼도록 만들어주는 모든 것을 수치로 계량한 개념인 셈이다.
[어떻게 보면, 파편들이 세상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지.] “신의 일부이기에, 파편들 역시 존재의 증명을 이루고자 한다는 말씀이십니까.”[맞아.]
멀리 볼 것도 없이, 자신은 물론이고 요안나도 이러한 전제에서 벗어나기는 힘들다. 자신은 이미 타나토스라는 거대한 세계에서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고, 요안나 역시 역사에 남은 인물인데다 그런 것에 환멸을 느낀 지금도 막후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지니고 있을 정도니까. 어찌 보면 신이란 결국 관심병 같은 걸 타고나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만 더 물어봐도 됩니까.”
[뭔데.]
“파편을 얻기는 한 거 같은데, 딱히 큰 차이가 느껴지진 않습니다. 어떻게 된 거죠?”
공포와 죽음은 별 것 아니라는 듯이 답했다.
[그건 네가 지닌 개성 때문이다.] “개성… 이라면?”[똑같이 파편을 지녔어도 각자에게 발현되는 능력이 다른 건, 그것을 지니고 있는 자의 개성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때문에 너는 요안나의 파편을 얻었어도, 인스턴트 킬 이외에 본래 그녀가 지니고 있던 성녀의 능력을 발현하는 것이 불가능한 거지.] “어? 그러면… 오히려 안 좋은 것 아닙니까?”
1+1인데 2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의 수가 줄었다. 그렇다면 오히려 좋지 않은 것이 아닌가.
[능력의 경우엔 네가 희망과 생명의 힘을 끌어다 쓰는 것처럼 요안나에게 다시 그 능력을 허락할 수 있다.] “그건 다행입니다만, 그렇게 되면 다른 파편이 더 이끌리기 쉽다는 것 외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얘기잖습니까.”공포와 죽음은 혀를 끌끌 찼다.
[예를 들어, 사용할 수 있는 아바타의 개수가 늘어난다든가.] “아…”
확실히 그렇다면 1+1이 3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될 수 있다. 단순히 생각해도 인스턴트 킬을 사용할 수 있는 존재가 확 늘어나게 되는 거니까. 게다가 추종자로 받아들여진 요안나 역시 그의 허락에 따라 이전에 가지고 있던 버프 능력을 그대로 활용할 수 있으니, 그야말로 일거양득인 셈이다.
“그럼 이제 아바타를 둘 이상 사용할 수 있는 건가요?”
[그건 직접 확인해 봐야 알겠지. 하지만 요안나는 너보다 훨씬 오랜 시간 동안 파편을 품고 있었으니 그에 따른 차이를 감안해야 할 거다.]
“좋은 건가요?”
[좋은 거다. 그러니 그녀에게 감사해라.]
그 말을 들은 형진은 옆에서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요안나의 볼을 가만히 쓰다듬다가 가만히 자신에게로 끌어당겨 입을 맞추어 주었다.
“고마워.”
“별 말씀을요.”
형진은 그렇게 요안나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고는 몇 번 더 입술을 맞추는 일을 반복하다가, 이전에 구입해놓고 활용하지 못하고 있던 아바타를 하나 더 불러내 보았다.
아바타 하나가 왕성에서 아기들이랑 놀아주고 있는 상태이므로, 이것이 두 번째 아바타인 셈. 하지만 이전과는 달리 감각의 혼란 같은 것이 일어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의식 체계에 통합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서로 다른 두 개 이상의 장소에서 두 개 이상의 육체로 존재할 수 있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어쩌면 신이 지닌 가장 강대한 권능은 바로 이 아바타의 활용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그럼… 다른 파편들도 이런 식으로 파편을 얻을 때마다 아바타를 늘려갈 수 있는 건가요?”
[글쎄. 그건 모르는 일이지.]
“어째서…”
[아바타는 신만이 다룰 수 있는 것. 나처럼 누군가 다른 신이 그것을 허락한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일개 파편이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 확실히 그건 그렇겠군요.”
그건 다시 말해 공포와 죽음이 형진에게 복수의 아바타를 운용할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이 아주 특별한 보상임을 의미한다. 또한 그것은 공포와 죽음이 다른 누구도 아닌 형진이 반드시 파편을 모두 모아 온전한 신으로 거듭나기를 강하게 염원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었다.
잠시 형진은 아바타로 하여금 매크로 체조를 추도록 해보았다. 요안나는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또 하나의 형진이 이상한 춤을 추는 모습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무언가를 생각했는지 볼을 발그레하니 붉히기 시작한다.
대충 무슨 생각을 한 건지 감이 잡힌다. 이런 요망한 추종자 같으니.
두 번째 아바타의 운용에 무리가 없음을 확인한 형진은 인벤토리에 잠자고 있던 미개봉 아바타를 꺼내 활성화시켰다. 이로써 세 번째. 솔직히 가능할까 싶었지만, 의외로 이번에도 큰 문제 없이 운용이 가능했다.
“대단한데…”
“그, 그러게요.”
좀 전에 불려나왔던 아바타는 그나마 옷이라도 있고 있었지만, 새롭게 활성화된 아바타는 그나마도 없다. 벌거벗은 자신이 이상한 춤을 추고 있는 것은 자신이 보기에도 민망한 일인데, 요안나야 오죽할까. 결국 형진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새로운 아바타에게 옷을 입혀야만 했다.
그렇게 해서 세 번째 아바타도 이상 없이 운용이 가능한 것을 확인해지만, 네 번째는 역시나 감각에 혼란이 오며 실패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세 개가 한계인가.”
세 개라고는 하지만, 인스턴트 킬을 쓸 수 있는 존재가 본신까지 합치면 넷으로 늘어난 셈이니 생각하면 할수록 무시무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새로운 두 개의 아바타는 첫 번째 아바타에 비해 스탯 자체가 바닥에 가까운 상태라 동일한 수준의 전력이 뻥튀기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스킬은 그대로 활용이 가능하니 보통의 인간보다 훨씬 더 강력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공포와 죽음은 그렇다 쳐도 두 개의 아바타가 함께 매크로 체조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야릇한 분위기를 잡는 것도 어려워져 버렸다. 게다가 시간이 꽤 많이 지나가 버렸으니,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이들의 시선도 생각을 해야 한다.
“그럼 이만 일어날까.”
“네.”
형진과 요안나는 욕조에서 일어나 몸에 묻은 물기를 닦고는 간편한 옷을 걸쳤다.
“풉.”
살짝 부끄러운 기색을 보이며 몸을 돌린 채 옷을 갖춰 입던 요안나는 거울에 비친 아바타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크흠.”
“죄송해요. 하지만…”
“됐어. 이만 나가자.”
“네.”
하지만 거실로 들어서는 순간, 그들은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려야만 했다.
“헛둘! 헛둘!”
“턴!”
“와아아! 여신님! 너무 멋져요!”
“…”
그곳에서는… 여신들의 댄스 배틀이 거행되고 있었다. 둘이서 안에 틀어 박혀 이런 저런 일로 시간을 끌었던 것 때문에 눈치가 보이지 않을까 싶었던 형진과 요안나였지만, 거실에 모여있던 소녀들은 두 사람의 일 따위는 완전히 잊어버린 채 여신들의 재롱 잔치에 몰두하고 있었다.
확실히, 안방에서 지금 매크로 체조를 추고 있는 아바타들에 비하면 이쪽이 훨씬 보기 좋다. 본인의 모습을 한 아바타이고 체조를 추게끔 만든 것도 본인이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쪽은 차라리 안구에 테러를 가하는 느낌에 가까우니까. 어쩐지 비교하는 것조차 민망할 정도다.
“아… 이젠 정말 죽어도 좋아…”
“새름아! 안 돼! 정신 차려! 이런 은혜로운 광경은 두 눈 부릅뜨고 봐야지!”
“아하하하하하! 아우… 배 아파요. 그만 좀… 아하하하하!”
카트린은 소파에 누운 채 쌍둥이들의 모습을 보며 배를 잡고 웃는 중이었고, 수빈과 승희는 눈을 반짝이며 여신들의 모습을 전화기로 찍는 중이다.
뭐랄까. 최소한 눈치 보일 일은 없으니 다행스럽기는 한데, 뭔가 이래도 될까 싶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문자 그대로 난장판이다.
“후아! 어때요? 이번엔 잘 찍힌 것 같아요?”
“네. 잠시만요. 보여드릴게요.”
졸지에 카메라맨이 되어 버린 수빈과 승희는 자신들이 찍은 영상을 와이파이를 통해 홈시어터와 연결해서 틀어 주었다. 안 그래 보이는데, 은근히 기계를 잘 다루는 모양이다.
“오오! 역시!”
“좀… 부끄럽네요.”
“이게 제 모습인가요.”
세 여신은 탁자 위에서 춤을 추는 자신들의 모습이 커다란 화면에 나오자 각자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아이돌 직캠 영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커다란 화면으로 놓고 보니 평소의 그냥 작고 귀엽기만 한 여신들의 모습이라고만은 생각할 수 없는 색다른 매력이 느껴진다.
“제법 괜찮은데.”
“그러게요.”
형진과 요안나는 서로 눈빛이 마주치는 순간 씩 웃었다. 이순간 따로 말을 맞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생각이 일치해 버린 것이다.
“앗! 진님! 보, 보시면 안 돼요. 눈 돌리세요!”
그제서야 그들의 존재를 알아차린 보호와 균형이 당황해서 그렇게 소리를 빽 질렀지만 이미 늦었다. 이미 볼 건 다 봤으니까.
형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채 대답했다.
“왜요. 좋은데요. 아주 멋집니다. 반할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 그래요?”
형진의 칭찬을 들은 보호와 균형은 부끄러운지 뺨을 손으로 감싸쥔 채 어쩔 줄 몰라했다. 물론 멋지다는 말에 반응한 것인지, 반할 것 같다는 말에 반응한 것인지는 여신 스스로도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그렇다.
형진은 그런 여신의 모습에 껄껄 웃고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한번 제대로 해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네? 무슨…”
이게 무슨 소리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여신과 뭔가 또 터무니 없는 이링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하는 소녀들을 바라보며 형진은 씩 웃었다.
“이 세계에서 제대로 팬클럽을 모집해 보자는 얘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