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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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취임
오랜만에 애교모드를 각성한 예쁜 마눌에게 서비스를 듬뿍 받은 형진은 다음 날 세상의 이치에 모두 통달한 대현자 같은 풍모로 요안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바람 넣었지?”
“글쎄요. 무슨 얘긴지 저는 통 모르겠는데요.”
“어허, 어서 바르게 고하지 못할꼬?”
“꺄핫! 아하하하!”
요안나는 형진에게 한참이나 간지럼 고문을 당한 뒤에야 웃다 지쳐 눈물을 글썽이며 대답했다.
“전 그냥 그런 방법도 있다고 알려준 것 뿐이라고요. 결정한 건 어디까지나 제랄딘님이고.”
“그 말이 그 말이지.”
형진은 피식 웃고는 요안나를 품으로 끌어들여 이마에 입을 맞춰 주었다.
“고마워.”
“별 말씀을요.”
그렇게 잠시 살짝 달아오른 요안나의 체온을 즐기던 형진은 다시 이렇게 물었다.
“얼마나 걸릴 것 같아? 고교 검정에 붙으려면.”
“제가 손을 쓰면 당장이라도 합격할 수는 있지만 제랄딘님은 단순히 고졸 자격을 따는 것만이 목적은 아니니까요.”
“그거야 그렇지.”
그런 식의 편법을 쓰면 시간이야 단축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정작 대학에 가서 제대로 배움을 이어가기 어렵다. 고졸 검정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할 정도의 실력이라면 책이나 논문을 공부하기는커녕 교수가 수업시간에 말하는 것조차 이해하기 어려울 테니까.
“사실 작문 과목만 빼면 단순히 합격하는 건 지금도 가능해요.”
“그 정도야?”
형진은 조금 놀랐다. 제랄딘이 똑똑하다는 건 알아도 벌써 그 정도로 공부를 했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한 탓이다.
미국의 고졸 검정인 GED는 크게 작문, 독해, 과학, 수학, 사회의 다섯 가지 과목으로 나뉘어 지며, 800점 만점인 각 과목에서 최소 450점을 받아야 한다. 단순히 고졸 학력을 인정받기 위해서라면 최소 점수로 합격해도 문제는 없지만, 4년제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라면 높은 점수로 합격해야 한다. 이 부분은 사실 한국의 검정고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중에서 다른 언어권의 학생들이 제일 곤란해 하는 건 역시 작문 과목이다. 작문 과목은 크게 둘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에세이라고 하는 일종의 논술이다. 단순히 문장을 몇 개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글을 써야 하니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다른 언어권의 응시자에게는 가장 큰 벽일 수밖에 없다.
“진도 같이 다닐 거에요?”
“제랄딘이 다니게 된다면.”
“그럼 진도 공부해야 하지 않아요?”
“어차피 제랄딘처럼 진지하게 공부할 생각으로 다니려는 것이 아니니까 대충 잔디 좀 깔아주고 말지 뭐.”
“킥.”
미국에 기여입학제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돈만 주면 무작정 입학시켜 준다거나 하는 식은 아니다. 가족 중에 해당 학교에 졸업한 사람이 있을 경우 기부금을 받고 10퍼센트 정도의 가산점을 주는 제도로서, 미국 대통령 가운데 케네디와 조지 W. 부시가 이 제도로 대학을 갔다. 닉슨이 케네디를 싫어했던 이유도 사실 이래서라던가.
어쨌든 그렇게 잠시 노닥거리던 두 사람은 시간이 되자 외출 준비를 했다. 엘리시온의 제작사인 미라지 코어의 임시 주주 총회가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허세와 망상이 참석할까?”
임시 주총에 나타나서 환상 같은 걸로 주주들을 홀려서 자기 의견을 관철시킨다든가 하는 식의 깽판을 부리지는 않을까.
그런 걱정 때문에 꺼낸 말이었지만 요안나는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힘들지 않을까요. 지금 상황에서 저희와 마주쳤다가 그 자리에서 토너먼트 같은 걸 제의받기라도 하면 난처할 테니까요.”
“그런 수가 있었군.”
지금 상황에서 신이 직접 형진이나 요안나에게 뭔가 헛짓거리를 했다가는 공포와 죽음의 직접 개입에 대한 빌미를 제공할 뿐이다. 신앙이나 공헌도, 추종자의 수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 지금 상황에서 그건 그야말로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일. 이미 한번 토너먼트에서의 부정으로 축출된 사례가 있는 만큼, 이번에 그런 식의 빌미를 줬다가는 파괴와 재생이 겪었던 일을 허세와 망상 또한 겪게 될 수도 있는 일이다.
간단하게 몸을 씻고 옷을 챙겨 입는다. 벽장을 열자 그새 또 새 옷을 맞춰 놨는지 형진을 위한 양복이 주르륵 모습을 드러낸다.
“뭘 이렇게 많이 준비했어?”
딱 봐도 뭔가 옷에서 풍기는 느낌이 범상치 않다. 상표나 디자이너 따위 알 턱이 없지만, 그냥 보는 순간 뭔가 비싸 보인다는 느낌이랄까.
“당신이 옷차림 같은 걸로 다른 사람에게 얕보이면 전 무척이나 화가 날 테니까요.”
“못 말리겠군.”
하기야 미라지 코어의 주주들이라든가, 요안나가 사업 관계로 부리는 사람들과 처음으로 대면하는 것이니 조금쯤은 옷차림에 신경 쓸 필요가 있다.
요안나는 이것 저것 형진의 몸에 옷을 대보며 몇 벌을 입혀 보는 일을 거치더니 깔끔한 수트 한 벌을 입혀 놓고 다시 몇 개의 시계와 넥타이핀, 그리고 구두를 꺼내 옷과 맞춰보는 일을 반복했다. 형진 입장에서는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 몇 번이나 그렇게 입히고 벗기기를 반복하다가 심연의 눈가리개를 쓰는 것으로 겨우 마무리가 지어졌다.
“아주 멋져요. 아마 지금의 당신이라면 보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질 거에요.”
“원래도 멋있었지만 지금도 더 멋있다는 얘긴가?”
“쿡쿡. 그렇다고 해두죠.”
형진의 준비를 마치고 나서야 요안나는 자신의 준비를 시작했다. 머리를 다듬고 화장을 한 다음 속옷과 옷을 갈아입는데 몇 분 걸리지도 않는다. 미리 어떻게 모습을 갖출지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겠지만, 보통은 남자가 후딱 준비를 끝나고 여자의 준비를 기다리는 것이 보통 아닌가. 뭔가 반대로 되어 버린 것 같은 기분이다.
“기다렸죠? 가요.”
“그래.”
쇄골이 살짝 드러나는 하얀색 원피스에 백합 문양이 달린 가디건을 걸쳤다. 탐스러운 금발은 살짝 땋은 상태로 당고 머리 같은 느낌으로 말아 올렸는데,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흘러내린 모습은 마치 등나무 꽃 같다.
형진은 미처 몰랐지만, 오늘 요안나의 헤어스타일은 브라이드 번이라고 불리는 것으로서 머리카락도 상당히 길어야 하고 만들기도 힘든 편이라 어지간한 사람들은 쉽게 따라하기도 어려운 수준이다. 이름처럼 결혼식 신부의 헤어스타일로 유명한 머리 모양으로서, 달리 왕관 같은 걸 쓰지 않았음에도 공주 같은 느낌이 드는 그런 스타일이다.
어쨌든 그렇게 준비를 마치자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여러 가지 수퍼카들이 즐비한 전용의 주차장에 도착하자 형진은 여느 때와는 다른 차 한 대가 놓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타시죠.”
“고마워요. 잭.”
약간 성마른 인상의, 어쩐지 좀 화를 내고 있는 듯한 분위기의 노신사 하나가 그들을 맞이한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과 살짝 눈가에 자글거리는 주름살. 그리고 마른 체구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수트 차림이 잘 어울리는 그런 남자다. 분위기만으로 보면 집사라기 보다는 변호사 스타일에 가까운 분위기랄까. 아니, 그보다는 오래된 학교의 남자 기숙사 사감 정도가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남자의 뒤에 세워져 있는 것은 일반적인 차량보다 길쭉한 형태의 리무진 차량이다. 리무진이라고 해서 차 몇 대는 끼워 넣어도 될 듯한 무지막지하게 긴 수준은 아니고, 차창 하나 정도가 더 달린 듯한 느낌이지만, 오히려 그 덕에 과하지 않고 세련된 느낌을 가진다.
요안나는 잭이라는 노신사를 향해 살짝 인사를 하고는 차문으로 다가가 형진이 탈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주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잭이라는 남자의 눈썹이 잠시 움찔거리는 기색을 형진은 놓치지 않았다. 갑자기 나타나서 자신이 모시는 고귀한 레이디를 후린 놈팽이 같은 걸로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하기야 딱히 틀린 말도 아니긴 하다만.
내부도 고급스럽기는 마찬가지여서, 어쩐지 차 안이라기 보다는 전용 헬기에 탄 것 같은 기분마저 느껴질 정도다. 누가 리무진 아니랄까봐 다리를 뻗을 공간이 엄청나게 널찍하다. 좌석 한 줄은 더 들여놔도 될 공간이 그런 식으로 비어있으니 뭔가 허전하게까지 느껴질 정도다.
두 사람이 탑승하자 노신사는 앞좌석에 탑승했고 그대로 주차장을 빠져 나가 어디론가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잭, 얼굴을 보여줘요.”
“네.”
요안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전면의 모니터에 노신사의 모습이 다시 드러난다.
“아이리스 인터내셔널의 제이콥 퍼넬이에요. 이번 일을 총괄하고 있죠. 잭, 이쪽은 제 남편이에요. 인사하세요.”
“제이콥 퍼넬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진입니다.”
뭔가 서먹한 느낌. 인사를 주고받기는 했지만, 제이콥 퍼넬이라는 남자는 뭔가 진을 경계하는 듯한 느낌이 강하다. 어쩐지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씨에게 나쁜 벌레가 달라붙은 것을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그런 분위기랄까. 딱히 무슨 사심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정말로 요안나가 걱정스럽다는 듯한 기색. 그만큼 고지식한 것일 수도 있고 그만큼 요안나에게 충성스러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건 그렇게 간단하게 수인사가 끝나자, 요안나는 노신사를 향해 다시 말했다.
“현재 상황은 어때요?”
그러자 노신사는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 업무 보고를 시작했다.
“현재 유효 지분의 55퍼센트를 확보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물론 대부분 서로 다른 명의로 사들였지만, 그중 15퍼센트는 말씀하신대로 진님의 소유로 해두었습니다. 그 외 우호지분 역시 20퍼센트 가량 확보가 끝났으니, 경영권 확보와 진님의 이사직 선임에는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사?”
예정에 없던 내용이라 형진이 그렇게 되묻자, 요안나가 웃으며 대답한다.
“앞으로 대외 활동을 하자면 이쪽에도 적당한 직급 하나 정도는 필요할 것 같아서요. 15퍼센트 지분을 가지고 있으니 등기 이사로서의 자격 요건은 충족하고 있는 상태에요.”
“이사로 올리려고 지분을 준 건 아니고?”
“후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긴 하죠.”
등기 이사는 이사회의 결의에 참가하여 회사의 중요사항에 결정을 내릴 수 있으며, 직접적으로 임원에 임명되어 회사의 업무 집행을 담당할 수도 있다. 다만 권한이 주어지는 만큼 책임 또한 주어지게 되는데, 법령이나 정관에 위반되는 행위를 하게 되면 그에 관해 손해를 배상하거나 처벌을 받는 경우도 생긴다. 이를테면 배임죄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부담되는데. 그냥 당신처럼 하면 안 되나.”
“저처럼요?”
“뒤에서 은근슬쩍 움직이는 식으로.”
“그럼 비등기이사로 올릴까요?”
“그건 뭔데?”
“이사급의 직위를 가진 임원들이에요. 이사회에서 결정한 일을 실질적으로 처리하는 이들이죠. 집행이사라고도 해요.”
실제로 일부 기업 총수나 오너 일가는 일부러 등기 이사 자리에서 내려오는 편법을 써서 본인들의 수익을 은폐하기도 한다. 비등기 이사가 등기 이사보다 책임이 상대적으로 가볍기 때문에 이런 방법을 쓰는 것인데, 드라마 같은 곳에서 재벌 아들내미들이 무슨 무슨 실장 같은 직함을 가지는 것도 사실 이런 식의 편법인 셈이다.
“그거 괜찮네. 사실은 나도 실장님 소리를 한번 들어보고 싶었어.”
“그럼 그렇게 진행할까요?”
“그래.”
“알았어요. 잭. 들었죠?”
“네. 마담. 그렇게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화면을 끄기 전 노신사의 표정이 별로 안 좋다. 책임은 지지 않고 낙하산 인사로 지위만 낼름하려는 모습을 보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하지만 회사 경영에 대해 아는 것도 하나 없는 형진이 이사회에서 정책 결정에 관여한다면 그게 오히려 더 큰 민폐다. 그냥 있는 듯 없는 듯 월급 루팡이나 하면서 직위만 차지한 채 조용히 지내는 게 회사와 개인을 위해 모두에게 좋은 일 아니겠는가. 노신사도 차라리 그쪽이 회사로서는 나은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가만히 요안나의 지시를 받아들인 것이리라.
그들이 탄 리무진은 잠시 동안 도로를 달려 임시 주총이 이루어지는 호텔로 들어섰다. 딱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리무진이 멈춰서고, 그곳에서 형진과 요안나가 내리자 대번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미라지 코어의 임시 주총은 세간의 주목을 한눈에 받고 있는 상황이다 보니 그 참석자들에 대한 관심도 상당히 증폭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제이콥 퍼넬의 인도를 받아 두 사람은 회의장으로 들어선 다음 배정된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조금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어느 정도 진정되고, 주주들의 입장이 끝나자 마침내 임시 주총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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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편째.
밥 먹고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