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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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휴가
-안녕하세요. 여러분의 안내를 맡은 요정 룸이라고 합니다. 왕성 라이언하트에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짐은 이쪽에 올려놔 주시고요. 어느 곳에서 오셨죠?
신전을 통과하자 그곳은 동화에나 나올 법한 아름다운 성이었다. 구름까지 닿을 듯한 느낌의 예쁜 탑, 푸른 언덕 위에는 커다란 바퀴 같은 모양의 대관람차가 움직이고 있었고, 그 아래로 이어진 성벽은 꽃덩굴로 뒤덮여 있다. 에메랄드빛 바다 위에는 아기자기한 모양의 별궁들이 서 있는데, 여기저기 요정과 토끼들이 바쁘게 오가는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꿈인지 현실인지 확인해 보고 싶어질 정도다.
“그란웰과 그리칸입니다.”
아란의 말에 요정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같이 오신 거에요? 가족이신가요?
귀여운 요정의 말에 아란은 얼른 손을 내저었다.
“그건 아니구요. 같은 신전을 이용하다보니 같이 오게 되었어요.”
-아하, 그럼 숙소는 따로 잡아드려야겠네요. 아이들은… 어떤 분의 일행인지 물을 필요가 없겠군요. 잠시만요.
“네.”
아이들은 아란의 뒤에 숨어서 요정들의 모습을 신기한 듯 바라보다가, 이내 턱시도를 입은 토끼가 자신들의 짐을 커다란 발판 같은 것에 올려놓는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실 아란이 아이들을 데리고 온 것은 스스로 공포와 죽음에게 특별히 청한 일이기도 했다. 왕성 라이언하트로의 휴가라는 말에 사실은 거절할 생각으로 청을 한 것인데 의외로 간단하게 허락을 받아서 솔직히 당황해버렸다. 덕분에 그녀는 지금 자칫 아이들에게 자신이 집행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어쩌나 싶어서 조마조마해 하고 있는 중이다.
“수고했어. 가서 다른 분들도 도와드리렴.”
요정의 말에 척 하고 거수경례를 한 뒤 사라지는 토끼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감탄을 자아낼 정도였고, 아이들은 토끼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숙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아…”
요정이 손을 한 번 휘저어 보이자 왕성 라이언하트의 간략한 입체 지도가 펼쳐지며 숙소의 현황이 나타난다.
-파란색은 이미 손님이 정해진 곳이고요. 밝게 빛나는 부분은 아직 손님이 정해지지 않은 곳입니다. 마음에 드는 장소를 선택해 주세요.
그러자 아이들이 얼른 아란의 치마를 잡아당기며 외쳤다.
“엄마! 저기요!”
“어디? 여기?”
“네!”
“…”
아란은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들이 선택한 곳은 눈앞에 보이는 수상 가옥의 최상층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잔뜩 기대한 표정을 보니 안 된다고 하기도 뭐해서 결국 그곳으로 정하고 말았다.
“그럼… 저흰 여기로.”
-좋은 선택입니다. 참고로 그곳은 대관식때 라야바르트의 레나리스 왕녀님이 묵고 가신 곳입니다. 발코니에서 바라보는 경관이 아주 멋진 곳이죠.
“와아! 왕녀님이요? 정말이에요?”
-네. 물론입니다. 상당히 귀여운 왕녀님이셨지요.
룸은 정중하게 아이들에게 대답을 하고는 점잖게 서 있는 신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신사 분께서는 어느 곳을 원하십니까.
바로 그 신사, 기젤 선트는 쓰고 있는 외알 안경을 잠시 만지작거리더니 이렇게 답했다.
“낚시를 할 수 있는 곳이 있겠습니까.”
-그거라면 바다와 인접한 어느 곳이든 가능합니다. 이곳의 바다는 특히 맑고 깨끗해서 아주 맛있는 물고기들이 많이 살고 있어요.
“좋군요. 특히 추천할만한 곳이 있으신지.”
요정 룸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입체 지도에 표시된 곳 가운데 바깥 바다와 인접한 방갈로 같은 느낌의 건물들을 가리켰다.
-그렇다면 이쪽은 어떠십니까. 수상 가옥들에 비하면 내부 시설이 조금 빈약하긴 합니다만, 한가롭게 바다의 운치를 즐기시고 싶다면 이쪽의 건물들이 마음에 드실 겁니다.
기젤은 외알 안경을 고쳐 쓰며 룸이 가리킨 건물들을 바라보더니 이내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쪽으로 정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숙소로 안내하겠습니다.
룸은 곧바로 짐이 쌓여 있는 발판 위로 움직였다. 그러자 그녀의 머리와 손, 발에 밝은 빛의 띠가 생겨나며 발판이 둥실 떠오른다. 이를테면 공중 부양형 카트인 셈이다.
-가시죠.
“네.”
먼저 아란의 가족들이 숙소로 안내되었다. 나선형의 계단을 올라가 3층의 숙소로 안내된 그들은 이내 탁 트인 전망과 함께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 그리고 찰랑거리는 실내 풀장에 매료되었다.
-이 풀장에는 균형의 권능이 담겨 있어서 몸에 쌓인 피로를 풀어줍니다. 외부에서는 볼 수 없도록 조치되어 있으니 마음껏 즐겨 주세요. 아, 물놀이용 복장은 이쪽의 옷장에 있습니다.
“와아아…”
-혹시 궁금하신 것이 있으시다면 입구에 놓여져 있는 벨을 울려주세요. 숙련된 요정 메이드들이 대기중이니까요.
“감사합니다.”
-그럼 편안한 휴가 되시길.
룸은 곧바로 기젤을 성벽 바깥에 위치한 방갈로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 도착해 보니 이미 선객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상체가 상당히 과장되어 보이는 느낌의 남자, 그리고 날렵한 체구의 여자와 구부정한 느낌으로 앉아 있는 남자, 이렇게 셋이다.
“혹시… 총괄 지부장님 아니십니까?”
살짝 지쳐 보이는 인상의 중년 남자는 기젤의 말에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반가운 기색을 보였다.
“음? 아… 기젤 군이었군. 이게 얼마만이지. 반갑네.”
“하하. 저야 말로 반갑습니다. 그런데 이쪽은…”
총괄 지부장 탁스 두겐은 자신의 옆에 있는 남녀를 소개해 주었다.
“아, 자네는 처음 보겠군. 이쪽은 헤르타 지부의 힐 데 마그. 그리고 이쪽은 그 오빠인 할 데 마그.”
“힐 데 마그에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할 데 마그입니다. 전에 뵌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리칸 지부장인 기젤 선트입니다. 얼핏 본 기억이 나는군요. 진님과 같이 지내시는 분이셨죠.”
“맞습니다. 하하.”
그렇게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있던 요정 룸은 조심스럽게 기젤에게 말했다.
-짐은 먼저 숙소에 가져다 놔도 괜찮겠습니까?
“아차. 내 정신 좀 보게. 총괄 지부장님. 일단 짐부터 풀고 다시 오도록 하겠습니다.”
“천천히 하게. 급할 것 없으니.”
“하긴 그렇군요. 하하.”
기젤 선트가 배정된 숙소에 짐을 풀러 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힐 데 마그는 문득 옆에 서 있는 오빠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을 걸었다.
“오빠.”
“응?”
“뭔가 아는 거 없어?”
“아는 거라니?”
“…”
힐 데 마그는 능청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할을 잠시 노려보더니 문득 품에서 동전 몇 개를 꺼냈다.
“오빠.”
“응?”
“아직, 천벌이란 거 유효하지?”
무슨 소린가 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할은 여동생의 손에 쥐어진 동전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버렸다.
“노, 농담이지? 참아 줄래? 그거 진짜 아프다고. 얼마나 아픈지 넌 절대 모를거야. 그러니 그만 둬.”
“응? 내가 뭘 어쨌길래?”
“크으…”
할은 앓는 소리를 내며 낚싯대를 드리운 채 쭈그려 앉아 있는 탁스 두겐을 바라보았지만, 총괄 지부장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파도에 흔들리는 찌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뭘 알고 싶은 건데…”
결국 할에게서 항복 선언이 나오자, 힐 데 마그는 씩 웃더니 동전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으며 물었다.
“이번 휴가. 아무래도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거든. 뭔가 아는 거 없느냐는 얘기야.”
“그게…”
할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거… 사실은 비밀인데… 아마도 지부장급들을 모아서 뭔가 임무를 내리시려는 모양이야.”
“공포와 죽음께서?”
힐 데 마그는 물론이고 옆에서 모른 척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던 탁스 두겐마저 놀란 표정을 짓는다.
말이 쉬워서 지부장급이지, 각 지역의 최강자라 해도 좋을 사람들이다. 그런 인물들을 모아서 맡길 임무라니, 어딘가의 마왕이라도 잡으러 가는 건가.
“헤취!”
어딘가의 마왕님 오귀스트는 덩치가 아까울 정도로 귀엽게 재채기를 하고 말았다.
“괜찮아요?”
어지간한 남자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힘세고 강한 새색시 하마란이 얼른 그런 남편을 챙긴다.
“응? 괜찮아. 그냥 갑자기 재채기가 좀 나서.”
“몸 상태가 안 좋으면 그냥 쉬시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괜찮아. 그런 당신이야 말로 좀 쉬지 그래.”
결혼한지 몇 달 정도 지났으면 이제 슬슬 저런 닭살스런 분위기 좀 과시하지 않을 때도 된 것 같은데 말이지.
사실상 반쯤 잊혀진 느낌으로 오늘도 메이드복을 입고 한쪽에 가만히 서 있던 하엘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어때. 다들 도착했나?”
형진의 질문에 제랄딘이 현황을 살피고는 바로 대답했다.
“아직이요. 하지만 속속 신전을 통해 넘어오고 있으니 만찬 전에는 모두 도착하실 것 같아요.”
“그래? 다행이군. 림!”
-네, 스승님.
“만찬 준비는 어때?”
림은 가슴을 탁 하고 치며 크게 대답했다.
-말씀하신 대로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당장이라도 시작할 수 있어요!
“좋아. 수고했다.”
-이 정도쯤이야 당연하죠. 헤헤.
림과 함께 미리 준비해둔 식재료의 상태를 살피고 있자니, 문득 미엘이 다가와서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온다.
“진.”
“응?”
“아란씨도 왔어요. 아이들과 함께.”
“…”
형진은 순간 아차 싶은 표정이 되어 버렸다. 지부장급이 모인다면 당연히 그란웰의 지부장인 그녀도 오게 된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은 것이다.
미엘은 그런 형진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 얼굴을 보니 미처 생각 못한 모양이군요.”
“그, 그게…”
아란은 이를테면 과거의 여자다. 어설프게나마 마무리를 짓기는 했지만, 마눌들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내보이기는 좀 그렇다. 미엘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유아 같은 경우는 아이를 가진 시점이기도 하고.
그런 사람이 태연하게 요안나를 데리고 들어왔냐고 물으면 할 말은 없지만, 아무튼 이래저래 복잡한 느낌이란 얘기다.
“어쩌지?”
그걸 자신에게 물으면 어쩌라는 건지. 미엘은 그런 형진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말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온 걸 보면 당신과는 선을 긋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런가?”
“아마도요.”
어떤 식으로든 둘만의 시간을 만들고 싶다면 아이는 데리고 오지 않았어야 옳다. 바꿔 말하자면 공연히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상황을 피하고 싶다는 의사표현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제가 나중에 한 번 만나볼게요.”
“고마워.”
“말로만요?”
“하하…”
어쨌든 시간이 지나자 지부장들이 모두 도착했고, 저녁 시간이 되자 바로 만찬이 시작되었다.
왕성의 중앙 정원에 마련된 연회장의 문이 열리자, 호기심 가득한 표정을 지은 사람들이 하나 둘씩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많다…”
“지부장들만 모았는데도 이 정도라니.”
사실 공포와 죽음이 전 세계를 아우르는 신 가운데 한 명이라고는 해도 그 교세가 어느 정도나 되는지 실감할 수 있는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희망과 생명 같은 경우는 신전이라는 건축물이 존재하고 그곳에 기거하는 사제들이나 방문하는 신도들이 있기 때문에, 호구니 뭐니 해도 세계에서 가장 큰 교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그러나 공포와 죽음 같은 경우는 지부가 있긴 해도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으니 교단이란 것의 실체를 확인하기가 어려운 점이 많다.
그런데 이렇게 전 세계의 지부장들을 모두 모아 놓고 보니, 역시 전 세계를 아우르는 신이라는 느낌이 절로 팍팍 느껴진다. 지부장급만 거의 천명 가까운 수준이라면, 그 밑에서 활동하는 집행자는 과연 몇이나 된단 말인가.
“음, 좋아.”
형진은 흡족한 표정으로 연회장에 들어서는 지부장들을 바라보다가, 꼭 닮은 쌍둥이를 데리고 들어오는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바로 그란웰 지부장인 아란이었다.
미엘에게 미리 얘기를 듣긴 했어도 이렇게 막상 눈이 마주치지 뭔가 마음이 싱숭생숭한 느낌이다. 하지만 아란은 그렇게 자신을 바라보는 진의 시선을 알아차리자 가만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해온다. 분명 편안한 미소이고 예의를 갖춘 인사이긴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벽이 느껴진다.
마찬가지로 그녀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형진은 지부장들이 모두 자리를 잡고 앉자 자리에서 일어나 발언을 시작했다.
“먼 곳에서 어려운 걸음을 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변변치는 않지만 성의껏 준비했으니 오늘만큼은 마음껏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공포와 죽음께 경의를.] [공포와 죽음께 경의를.]이어진 말은 집행자들만이 들을 수 있는 메시지를 통해 전해졌고, 지부장들 역시 메시지로 답한 다음 잔을 들어 올려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을 자신들의 신에게 경의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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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한편.
편안한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