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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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낭원
“처형의 날…”
아사드는 조용히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지켜보다가 문득 자신의 손으로 시선을 당겼다. 그러자 마치 그의 의지에 호응하듯 불꽃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은 단순한 불꽃이 아니다. 그의 마음 속에 담겨져 있는 분노가 형상화된, 그의 마음 그 자체를 표현하는 수단이다.
아사드는 허세와 망상을 만나기 전부터 분노를 마음 속에 품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신에 의해 간직하고 있던 파편의 힘이 눈을 떴을 때, 그는 불이라는 형태로 그것을 표현해 냈다. 불은 바로 아사드 그 자체인 것이다.
아사드는 손아귀 속에서 타오르고 있는 불꽃을 마치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어쩌면… 지금이라면, 언제나 자신의 마음속에서 조용히 타오르던 불꽃을 이 세상에 드러낼 수도 있지 않을까.
세계는 지금 죽음의 천사와 그의 동료들로 보이는 자들에 의해 처형되는 악인들에 대한 얘기로 들끓고 있었다. 각국의 수사기관들은 이러한 사태에 대비해 공조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지만, 여론 때문인지 아니면 실질적인 두려움 때문인지 적극적인 움직임은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사드는 생각했다. 지금이라면, 죽음의 천사라는 이름 뒤에 숨어서 복수를 실행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힘이라면 충분히 갖춰졌다. 지금이라면 권총을 든 갱단이라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허세와 망상의 말대로 그는 약한 존재였지만, 엘리시온이라는 이름의 거짓된 천국에서 단련을 거치면서 이제는 어느 정도 자신이 지닌 힘을 똑바로 직시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게다가 무대 또한 갖춰졌다.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행동 또한 처형의 날이라는 거대한 이름 속에 묻힐지도 모른다. 이런 초월적인 힘을 지닌 존재가, 저들 외에 또 있을 거라고 사람들은 생각하기 어려울 테니까.
그리고, 그들 역시 죽어 마땅한 자들이니까.
“후우우우…”
아사드는 깊게 숨을 몰아쉬었다. 냉정해야 한다. 자칫 한 발자국만 잘못 내딛어도 오히려 자신이 당할 수도 있다. 그러니, 차분하게 움직여야 한다.
먹이를 노리는 맹수가 되리라.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다가, 단숨에 목덜미를 물어 뜯어 숨을 끊어 놓는 그런 맹수가.
그렇게 잠시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던 아사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벽에 걸린 검은 색의 후드티를 몸에 걸친 다음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는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어두운 도시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이 정도면, 작은 소년 하나 정도는 충분히 감추어 줄 수 있을 정도의 무겁고 짙은 어둠이다.
허세와 망상이 찾아낸 첫 번째 파편이 그렇게 어두운 밤거리로 스며들 즈음, 또 다른 파편 하나 역시 일탈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룰룰루, 룰룰루… 아얏!”
서툰 바느질로 옷을 만들고 있던 아유무는 짤막한 비명과 함께 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이미 그녀의 손가락은 반창고가 덕지덕지 달라붙어서 거의 골무 비슷한 꼴이 되어 있었지만, 눈이라도 달렸는지 바늘은 빈틈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정확히 말하자면, 여기저기 찔러대다가 빈틈을 찔리고 나서야 인지하고 있는 것 뿐이지만.
“됐다!”
아유무는 완성된 옷을 몸에 대보며 포즈를 취해 보았다.
“역시 아저씨들에겐 코스프레가 직빵이지. 우훗. 뇌살시켜 주겠어!”
허세와 망상이 봤다면 뇌살은커녕 뇌졸중에 걸릴 것 같은 느낌. 뭔가 이 소녀가 가진 아저씨라는 종족에 대한 인식은 상당히 엉뚱한 방향으로 편중된 느낌이다.
이래서 단순히 파편을 찾는 것을 넘어 관리가 중요한 것이다. 기껏 찾아놓으면 뭐하나. 관리가 안 되니 죄다 엉뚱한 방향으로 엇나가 버리는데.
단순히 부익부 빈익빈이라기엔 뭔가 방향성 자체가 잘못 되었다. 미라지 코어에서도 그랬지만, 허세와 망상은 역시 관리라는 말과는 거리가 있는 모양이다.
“후와아…”
바로 그 미라지 코어의 실리콘 밸리 지사에서는 지금 한 사람이 막 사무실을 옮기는 일을 마치고 있었다.
이 남자의 이름은 프리츠 베커. 새롭게 미라지 코어의 최고 기술 책임자의 자리로 영전한 인물이다.
직급 자체는 최고 경영자보다 아래인 최고 기술 책임자. 그러나 그의 근무 위치가 사실상 미라지 코어 개발의 중핵이라 할 수 있는 실리콘 밸리의 지사임을 감안하면,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그가 최고 책임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간단하게나마 짐 정리를 마치고 널찍한 자신의 사무실에서 실리콘 밸리의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인터폰이 울린다.
“제이미, 무슨 일이죠?”
-손님이십니다.
“손님?”
-본사의 경영지원실장님이십니다.
“응?”
프리츠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는 이번에 경영진이 교체되면서 생긴 새로운 직급 가운데 그런 이름이 있었던 것을 떠올리고는 화들짝 놀라 얼른 대답했다.
“어서 안으로 모시게.”
-알겠습니다.
기억이 맞다면 아마 경영지원실장은 부사장급이었을 것이다. 자신 또한 부사장급이라서 상하 관계를 따지기는 애매하지만, 어쨌든 새로운 경영진과 불화를 빚는 건 곤란하다. 자신을 이 자리로 올려준 보스를 생각해서라도 공연히 일을 만드는 건 좋지 않은 일이다.
허겁지겁 흐트러졌던 옷차림을 고치고 있는데, 문이 열리며 비서인 제이미가 모습을 드러낸다. 조금 딱딱한 느낌의 중년 여성이긴 하지만, 업무 능력 하나만큼은 나무랄 데가 없다.
“이쪽입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프리츠는 인사를 하려고 앞으로 나서다가 문을 통해 들어오는 남녀를 보고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헐?”
얼마나 놀랐는지 자신도 모르게 그런 소리를 내고 말았을 정도다.
그럴 수밖에 없다. 엉뚱하게도 지금 이 순간 그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선 것은 바로 자신을 이 자리에 올려준 보스와 그를 그림자처럼 수행하는 금발의 미녀였기 때문이다.
“프리츠 베커씨, 만나서 반갑습니다. 경영지원실장 진입니다. 이쪽은 제 비서인 요안나고요.”
“반갑습니다. 미스터 베커.”
“바, 반갑습니다.”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며 악수를 청하는 보스의 모습에 프리츠는 정신이 화들짝 들어서 엉겁결에 그렇게 인사를 하고 말았다.
비서인 제이미가 밖으로 나가 문을 닫고 나서도 프리츠는 잠시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 몰라 버벅거리기만 했다.
“보스. 이게 갑자기… 어떻게…”
“뭐… 자세한 얘기는 일단 앉아서 하도록 합시다.”
“알겠습니다.”
일단 자리를 나누어 앉기는 했는데, 프리츠로서는 좌불안석이다. 느닷없이 직속상관이 이런 식으로 직장에 불쑥 찾아왔는데 당황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하지만 막상 형진은 그런 프리츠의 모습에 피식 웃고는 사무실을 한 번 둘러본 뒤 다시 말을 꺼냈다.
“어떻습니까. 새로운 사무실은.”
“그, 그게… 이제 막 짐을 옮긴 터라.”
“아하. 그렇군요. 제가 너무 일찍 와버렸나요.”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하하…”
별 다른 말이 오간 것도 아닌데 식은땀이 삐질 삐질 흐른다. 형진이 그런 프리츠의 모습에 잠시 웃고 있자니, 그의 윗주머니로부터 작은 머리 하나가 불쑥 솟아나왔다. 다름아닌 보호와 균형이다.
“혹시 몸이 안 좋으세요? 자아… 이제 괜찮아질 거에요.”
“감사… 합니다.”
아닌게 아니라 보호와 균형이 다가와 균형의 권능을 써주니 확실히 놀랬던 마음이 안정된다. 하지만 문득 프리츠는 이런 비일상적인 상황을 당연한 듯 받아들이는 자신의 상태에 절로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겁니까. 깜짝 놀랐습니다.”
“경영지원실장이란 직책 말씀이십니까. 별 건 아닙니다. 갑자기 미라지 코어 같은 전도유망한 기업의 경영자로 나서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아서 이것 저것 배워볼 겸 곁가지로 작은 직책을 하나 얻었을 뿐이죠.”
“아하… 그런 거군요.”
프리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느닷없이 CEO로 올라서면 누구라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당연한 일. 물론 부사장급의 임원이라는 직책도 대단한 건 사실이긴 하지만, 그래도 당장은 최고 경영자 쪽에 시선이 더 쏠릴 수밖에 없으니 나름 좋은 선택인 셈이다.
“그럼 사무실은 본사 쪽에 두실 예정이십니까?”
“그렇긴 한데, 어차피 주로 여기저기 출장을 다니는 식으로 처리될 겁니다.”
“하긴. 한창 바쁘시니까요.”
프리츠는 진이 죽음의 천사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그런 그로서도, 요며칠간 벌어진 일들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자신도 언젠가는 저런 일들을 해야 하는 건가 싶어 걱정스러운 기분도 들었지만, 이미 저토록 많은 집행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어쩐지 든든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때 요안나가 간단한 다과를 테이블에 꺼내 놓았다. 프리츠 자신도 가지고 있는 능력이긴 하지만 허공에서 커피포트며 아름다운 찻잔 같은 것이 나타나 테이블에 차려지는 모습 같은 건 언제봐도 신기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알아서 했어야 하는데.”
“괜찮습니다. 그보다는, 이렇게 불쑥 찾아온 용건부터 설명을 드리고 싶군요.”
“말씀하십시오.”
프리츠는 긴장한 표정으로 자세를 바로하고 형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어떻게 보면 CTO로 영전한 뒤 이루어지는 첫 번째 업무지시이니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우선, 개발부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아직은 좀 혼란스러운 상황입니다. 잘릴 줄 알고 재취업 자리를 알아보고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는 중이죠. 솔직히 저 역시도 새로운 경영진이 들어서면 가장 먼저 개발부부터 정리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중이니까요.”
“역시 그런가요.”
형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요안나가 타준 차를 입안에 머금었다. 그러자 냄새를 맡은 다른 여신들 또한 그의 품속에서 고개를 내밀고는 슬그머니 테이블로 내려와 요안나가 건네주는 작은 찻잔을 건네받고는 자기들끼리 다과회를 즐기기 시작한다.
여신들의 그런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형진은 다시 이렇게 말했다.
“미리 말해두는 것이 좋겠군요. 앞으로 개발부는 더욱 크게 확장될 겁니다.”
“그렇습니까?”
“다만, 업무는 좀 더 세분화될 필요가 있겠지요. 새로운 사업 분야가 생길 테니까요.”
“어떤 식으로…”
아무래도 자신이 담당하게 될 영역의 일이라 그런지 프리츠는 눈을 빛내며 진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미 아이까지 있는 남자가 그런 식으로 반짝이는 시선을 들이대니 좀 거북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그만큼 일에 대한 열정이 넘친다는 의미인지라 진은 이번에도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직접 보는 것이 빠르겠죠. 가장 먼저 상품화할 물건은 바로 이것입니다.”
형진이 품에서 꺼내 보인 것은 길쭉한 널빤지 비슷한 물건이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품에서 이런 커다란 물건이 갑자기 튀어나온 것에 놀랐겠지만, 프리츠는 그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용도의 물건인지 이해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게 뭐죠?”
“대단한 건 아닙니다.”
형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널빤지에서 손을 떼었고, 프리츠는 이내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이, 이건…”
떠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실을 연결해 둔 것처럼 널빤지는 그렇게 허공에 둥실 떠 있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만, 공중부양형의 킥보드 같은 물건입니다.”
“이걸… 만들어 판다는 말씀이십니까?”
“정확히는 저쪽에서 만들어진 걸 미라지 코어가 판매하는 형식이 되겠죠.”
“하지만… 하지만 이런 걸 갑자기 내놓는다면…”
그렇지 않아도 미라지 코어는 이런 저런 신기술들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추측을 자아내고 있는 기업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이런 식으로 현실과 동떨어진 느낌의 제품이 툭 하고 떨어진다면 과연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반응하게 될까.
“지구의 어떤 소설가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죠.”
“…”
“충분히 발달된 과학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 라고.”
기억이 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어떤 SF 작가의 말이었던가. 아마도 세 가지 법칙 가운데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진은 공중에 떠 있는, 그가 날틀이라고 이름 붙은 널빤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구의 기술은 이미 충분히 발전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의 이 시대가 그 말이 현실화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프리츠는 비로소 깨달았다. 눈앞에 앉아서 미소를 짓고 있는 이 남자가 자신을 이 자리에 앉힌 진정한 이유를.
그는 자신으로 하여금, 지구라는 별에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하는 것이다.
============================ 작품 후기 ============================
일단 한편.
편안한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