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52
52====================
11. 승급
“일단 도핑부터.”
은신과 잠행을 수련할 때만 해도 요리 스킬을 올리지 못한 상태라 원하는 대로 도핑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일부러 시간을 들여서 요리 스킬을 올린 것은 그것에 들이는 시간을 전부 포함하더라도 훨씬 수련에 이득이 되기 때문이다.
제랄딘의 요구에 따라 기사단의 전투 식량 세 가지를 만들어내긴 했지만, 중요한 것은 역시 자신의 문제이기에 그와는 별도로 수련용의 정찬을 만들어 냈다.
그것이 바로 유형진 전용 스킬 도핑 정식!
“이동 스킬용이… 어디보자. 이쪽이었지.”
형진은 인벤토리에 담겨져 있는 음식 가운데 하나를 선택했다. 판매용이 아니라서 저택 안에 있던 남는 용기에 담아 놓기는 했지만, 미엘이 약식 룬 조합을 통해 만들어낸 도시락 용기보다 훨씬 더 훌륭한 보존성을 갖춘 인벤토리가 있으니 아무 문제 없다.
용기의 뚜껑을 열자 막 만든 음식처럼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름과 동시에 천상의 향기가 후각을 자극한다.
“후… 내가 만들긴 했어도 정말 끝내준다.”
잠시 코를 통해 전해지는 그 매혹적인 향기를 만끽하던 형진은 음식을 섭취하기 시작했고, 그러자 곧바로 도핑이 성공했음을 알리는 메시지들이 시야에 가득 아로새겨진다.
[‘신성한 생명력의 바삭한 야채 튀김’을 섭취하여 일정시간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신성한 생명력의 달콤한 치즈 수플레’를 섭취하여 일정시간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신성한 생명력의 상큼한 돌마데스’를 섭취하여 일정시간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신성한 생명력의 향긋한 크라우트비케를’을 섭취하여 일정시간 능력치가…획득할 수 있는 버프만을 따져서 요리를 구성하다보니 전채나 본선의 구분은 물론이고, 국적 또한 뒤죽박죽인 기괴한 구성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막 중구난방으로 먹어도 되는 건가 싶기는 한데, 먹어보니 일단 문제는 없는 것 같다.
“후아아…”
음식을 다 먹고 나자 이십여 개에 가까운 도핑 효과들이 형진의 몸을 달군다. 이동 속도 증가부터 시작해서, 지구력이나 반응속도 향상 같은 보조 효과도 빠짐없이 챙긴 터라 보는 것만으로도 든든해지는 느낌이다.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이전에 느껴졌던 거의 현실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강력한 맛의 폭풍이 낙인 업데이트로 인해 효과가 감소했다는 것 정도. 물론 맛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뜨거운 감동의 회오리를 다시 경험할 수 없게 된 건 좀 아쉬운 일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이제 도핑이 끝났으니 본격적으로 수련을 해볼까.
일단 천천히 수련장을 한 바퀴 돈다. 나름의 준비운동이다. 신체를 수련에 맞게 활성화시킬 필요도 있고, 어느 정도 속도감에 익숙해질 필요도 있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워밍업이 끝나자, 형진은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는 마침내 스킬 ‘전율의 질주’를 발동했다.
그러자, 순간 시야로 검은 안개 같은 것이 몰려오더니 순식간에 형진의 몸이 어둠 속에 잠긴다. 하지만 형진은 그런 주위의 변화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으아아앗!”
갑자기 멀찍이 떨어져 있던 수련장의 벽이 확 끌어당기듯 다가왔기 때문이다.
다급하게 스킬 발동을 해제하긴 했지만, 일단 붙어버린 가속도 때문에 형진은 결국 벽과 충돌해야만 했다.
쿵!
“응?”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지부장 기젤의 옷가게에서 받아온 옷들을 보풀 하나라도 잘못 일어날까 싶어 조심스럽게 정리하고 있던 유아는 어디선가 들려온 작은 충돌음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마치 도토리를 따려고 커다란 나무망치로 나무를 두드리는 듯한 소리인지라 잠시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둘러봤으나, 딱히 이상한 것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창밖을 살피던 유아는 마음 편하게 잘못 들었나보다 생각하며 다시 옷 정리를 이어간다.
“이건… 역시 너무 야하지 않을까?”
유아가 형진 몰래 옷가게에서 받아온 옷 중에는 야시시한 분위기의 잠옷도 있었다. 물론 유아는 형진이 선물해준 면 소재의 부드러운 잠옷이 좋다. 그러나 남녀가 한 지붕 아래 단 둘이 사는 것도 모자라 뻔질나게 서로의 침실을 드나들면서도 그 이상의 핑크빛 분위기가 일어나지 않는 건 역시 자신의 매력이 부족한 탓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저버릴 수 없었고, 그래서 그것을 보충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이런 잠옷의 도움을 받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라는 여급들의 충고에 귀가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 아침만 해도 그렇다. 기왕이면 좀 로맨틱한 방법으로 깨우러 올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이를테면, 뺨에 살짝 해주는 키스라든가. 코에 살짝 해주는 키스라든가. 이마에 살짝 해주는 키스라든가.
“꺄아!”
유아는 상상만으로도 얼굴이 화끈 거리는 느낌에 몰라 몰라를 시전하며 어쩔 줄 몰라 한다.
푼수데기 메이드가 그렇게 자신의 방에서 공상 내지는 망상에 빠져 있을 때, 형진은 어두운 수련실 구석에 널브러진 채 보일 리 없는 별이 천장에 떠다니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끙…”
머리가 딩딩 울린다. 예상 외로 버프 효과가 너무 뛰어난 탓에 속도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것도 문제지만, 이동 스킬을 수련하기에 이 수련장은 역시 너무 좁은 것이 이로써 확실하게 증명되었다.
분명히 저레벨 단계에서는 다른 기본 스킬보다 이동 속도가 떨어진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기젤이 했던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예상보다 훨씬 더 버프 효과가 강력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맞을 듯 하다.
하지만 효과는 분명히 있었다. 단 한 번, 그것도 아주 잠깐 스킬을 실행한 것 뿐인데도 불구하고 1레벨이 되기 위해 필요한 스킬 숙련도의 삼분의 일 가량을 습득한 것이다. 찬양하라 도핑, 경배하라 부스터.
“역시 밖으로 나가서 수련해야겠어.”
아무래도 이곳에서 더 수련을 시도했다가는 머리통이 남아나지 않을 상황이라, 형진은 그렇게 결정을 내리고는 일단 집행자 세트를 벗은 뒤 수련장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잠시 나갔다 오겠다고 말하기 위해 유아의 방을 찾았다가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헤헤… 역시 좀 야한가?”
역시가 아니다. 이 바보 메이드야.
유아는 속살이 훤히 비치는 하얀 색 망사로 된 슬립을 입고는 거울에 그런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고 있었다. 물론 안에 속옷도 입고 중요한 부위는 다 가리고 있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야시시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어쩐지 이상하더라니. 옷가게에서 받아온 옷 꾸러미를 숨기려고 들었던 이유는 그래서였던가.
“어이, 바보 메이드.”
형진이 그렇게 부르자, 자기가 봐도 부끄러운지 거울을 보며 살짝 얼굴을 붉히고 있던 유아의 모습이 마치 정지화면을 누른 것처럼 굳어 버린다.
“나 잠깐 나갔다 온다.”
“…”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은밀하고 사적인 시간을 가질 때는 종종 문을 열어두도록 해. 덕분에 좋은 구경했다.”
형진은 그와 같은 말을 남기고는 그녀의 방에서 멀어졌다.
자신의 방으로부터 발소리가 점차 멀어져 마침내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될 때까지 유아는 마치 석화되기라도 한 것처럼 거울을 보며 그대로 굳어 있었다. 너무나 놀라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한참이나 지나서야 유아는 겨우 삐걱 소리가 날듯한 움직임으로 고개를 돌려 열려진 문틈을 바라보더니,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하하… 꿈일 거야. 그렇지? 누가 제발 꿈이라고 말해줘…”
그렇게 말한다고 누가 대답할 리도 없다. 물론 대답하면 대답하는 대로 또 놀라서 굳어버릴 테지만.
유아를 그렇게 반강제로 여러 가지 의미에서 망부석으로 만들어버린 형진은 집을 나와서 곧바로 인적이 드문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우선 사냥개의 코장식을 이용해 주위에 인적이 없는지 살핀다. 그리고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자, 곧바로 집행자 세트를 포함한 모든 장비를 꺼내 착용한 뒤, 가볍게 심호흡을 한다.
수련장에서와는 달리 심연의 눈가리개와 사냥개의 코장식을 통해 시시각각 변화하는 주위의 정보가 신경을 타고 형진의 두뇌로 전해진다. 그렇게 전해진 정보의 취합이 끝나자, 형진은 수그리는가 싶더니 곧바로 전율의 질주를 발동했다.
화아악!
형진의 몸으로부터 검은 불꽃과도 같은 것이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삽시간에 몸 전체가 검은 어둠으로 뒤덮여 버린다. 캄캄한 어둠 속이라면 모를까, 이제 막 해가 중천에 떠오르기 시작한 그 즈음의 광경 속에서 그렇게 시커먼 어둠이 질주하는 모습은 일견 이질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가속이 시작되자, 이번에도 역시나 멀찌감치 보이던 담벼락이 마치 줌을 당긴 것처럼 확 밀려온다. 하지만 지금은 사방은 물론이고 천장까지 막힌 수련장이 아니다. 더구나 저 담은 고작해야 사람 키 정도 높이 밖에 되지 않는다!
탓!
땅을 딛은 발과 다리에 힘을 주자 거짓말처럼 몸이 둥실 떠오른다. 단순히 형진의 각력만으로 점프를 시도한 것이었다면 담을 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지금은 이속 관련 풀도핑을 한 상태. 그 중에는 당연히 점프력 증가의 버프도 포함되어 있었다.
강화된 점프력과 그것을 뒷받침할 충분한 가속도의 도움을 받은 형진의 몸은 검은 빛의 환영처럼 단숨에 담장을 뛰어 넘었다. 하지만 허들을 넘듯 가볍게 담을 넘은 형진의 눈앞에 곧바로 새로운 장애물이 등장한다. 바로 반지하로 된 창고의 것으로 보이는 야트막한 지붕이 그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장애물의 출현에도 형진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심연의 눈가리개와 사냥개의 코장식을 통해 전방에 어떤 식의 장애물들이 위치하고 있는지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타닷!
다시 한 번 발이 지면을 박차고 연이어 지붕을 밟고 올라서기를 몇 차례, 어느 틈엔가 형진의 시야에는 넓게 펼쳐진 그리칸 시내 가옥들의 지붕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축하합니다! ‘전율의 질주’를 체득하여 Lv.1을 달성하였습니다.]문득 눈앞에 그런 메시지가 나타남과 동시에, 그렇지 않아도 빠르게 질주하던 형진의 몸이 더 빠르게 가속하기 시작한다. 레벨 0 상태를 벗어남과 동시에 본래 스킬이 가진 속도 증가 효과가 제대로 적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멋지다!
형진은 지금까지 스피드라는 것을 제대로 즐겨본 적이 없었다. 운전도 할 줄 알고 차도 가지고 있긴 했지만, 기껏해야 집과 직장을 쳇바퀴처럼 왕복하는 것이 고작인 삶에서 속도란 지각을 면하기 위한 수단일 뿐 그것 자체를 즐겨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형진은 속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무한한 자유와 해방감이 무엇인지 절실하게 깨닫고 있었다.
“응?”
“왜?”
“방금 저기 지붕 위로 뭔가가 지나간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어이, 장난치지 마. 나 그런 거에 약한 거 잘 알면서 그래.”
“아닌데. 진짜 뭐가 지나갔는데.”
몇몇 사람들이 지붕 위를 질주하는 형진의 모습을 보았지만, 그들 중에 순간적으로 훅 하고 지나가는 검은 그림자의 모습을 사람으로 인식할 정도로 안력이 좋은 사람은 없었다.
“이건…”
그렇게 거침없이 지붕 위를 질주하던 형진은 문득 눈앞에 큰 길이 가로 놓여 있음을 감각을 통해 확인했다. 아무리 점프력 증가나 기타 다른 버프 효과가 부여되어 있다 해도 이건 아무래도 단순한 점프만으로는 건너기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형진은 멈추거나 방향을 틀지 않았다. 오히려 불가능에 도전하려는 듯이 속도를 높이기까지 한다.
탓!
마침내 형진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른다. 하지만 역시 예상했던 대로 단순한 점프만으로 뛰어넘기에는 눈앞에 가로 놓인 대로가 너무 넓었다.
하지만 뛰어오른 형진의 몸이 정점에 도달하는 순간, 검은 불꽃과도 같은 모습이 일순 사라져 버리는가 싶더니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확하고 나타난다.
형진은 또 다른 이동 스킬인 ‘환영의 반딧불’을 실행함으로서 부족한 거리를 메워버린 것이다.
“레벨 0 단계에서 쿨타임 10초… 상당히 길군.”
그러나 지금 수준에서도 방금 전처럼 전율의 질주만으로 통과하기 어려운 장애물을 돌파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고, 다시 몇 번 더 같은 방식으로 사용하자 형진의 눈앞에 또다시 메시지 하나가 나타난다.
[축하합니다! ‘환영의 반딧불’을 체득하여 Lv.1을 달성하였습니다.]확실히 쿨타임이 길다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쿨이 돌아올 때마다 계속 사용하면서 질주를 계속하니 대충 어떤 타이밍에 써야 할지 감이 잡히기 시작한다.
멀찍이 그리칸의 성벽이 보이기 시작한다. 형진은 성벽을 인지하기가 무섭게 감각을 총동원해 그곳에 이르는 최단 경로를 산출해 냈고, 한 치의 빈틈도 없는 도약의 끝에 환영의 반딧불이 펼쳐지자 그의 몸은 단숨에 성벽을 넘어 그 너머의 언덕 위에 도달했다.
“윽!”
예상보다 성벽의 높이가 훨씬 더 높았기 때문에 허우적거리며 떨어진 뒤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야 했으나 낙하 피해 감소의 효과 덕분에 달리 부상을 입지는 않았다.
“후아아…”
형진은 잠시 언덕 위에 대자로 누운 채 하늘을 바라보며 터질 듯이 박동하는 자신의 심장 소리를 즐겼다. 그리고 전신에 스며드는 기분 좋은 피로감을 느끼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