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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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승급
일전에 페스타에 참가한 이들을 보면서도 느낀 것이지만, 집행자라고 해서 무조건 암살자를 연상시키는 종류의 스킬들만 획일적으로 익히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하기야 저마다 다른 사람들을 무조건 하나의 스킬 트리로 묶어버리는 건 다양성은 물론이고 효율성의 측면에서도 그리 좋지 못하다.
집행자들은 대체로 어떤 능력을 쓰니까 그것만 막으면 된다는 식의, 일반적인 대응 요소만 제거하더라도 암살 대상에게는 위협적일 수밖에 없다. 자신을 노리는 자가 어떤 식으로 암살을 시도할지도 모르고, 그 때문에 대응할 방법조차 모호하다는 사실만으로도 두려움을 자아내기엔 충분한 일이니까.
어쩌면 공포와 죽음에 의한 암살이 오랜 시간 동안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에는 이런 다양성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다양한 종류의 스킬이 있다면 고르는 것도 쉽지 않겠군요.”
형진의 말에 기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확실히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는 훌륭한 일이지만, 무엇을 선택하느냐의 문제가 되면 여러모로 곤란한 일일 수밖에 없죠. 사실 이것도 급하게 마음먹기보다는 조금 느긋하게 생각하면 딱히 곤란할 것까지는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만.”
그건 틀림없는 얘기지만, 혈통 자체가 빨리빨리를 선호하는 민족의 후예인 형진으로서는 쉽지 않은 얘기다.
“모두가 그렇게 느긋한 분만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아쉽게도 그렇지 못하니 문제가 되는 것이겠지요. 사실 저도 그리 느긋한 쪽은 아니고.”
“말씀대로입니다. 그래서 사실 스킬 마스터의 역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스킬 전수보다 개개의 집행자에게 적합한 스킬을 찾아 추천해주는 일입니다.”
“아하.”
과연 세심하기 이를 데 없는 공포와 죽음이시다. 일일이 스킬 마스터를 찾아가 배우도록 되어 있는 것이 조금 이상하다 싶었는데, 그런 이유가 있었던 것인가.
“진님에게 제가 권하고 싶은 스킬은 이 두 가지입니다.”
기젤은 그렇게 말하며 양손을 펼쳐 보였다. 그러자 각각의 손바닥 위로 두 개의 영상이 모습을 드러낸다.
대단하다. 마치 미리보기 화면처럼 일종의 홀로그램 비슷한 형태로 배우고자 하는 스킬의 시전 모습을 살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기젤 본인의 능력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것 역시 공포와 죽음께서 새로운 성도들을 위해 마련해 둔 배려라고 보는 편이 맞으리라.
“이쪽의 스킬은 스프린트형으로서 전율의 질주라는 스킬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대시형 스킬인 환영의 반딧불이라는 스킬입니다.”
형진의 기젤이 보여주는 영상을 유심히 살폈다.
전율의 질주는 스킬을 발동하는 순간 사용자의 몸이 새카만 어둠 속으로 잠긴다. 질주가 시작되어도 전신을 감싼 어둠은 사라지지 않는 기이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환영의 반딧불은 대시형이라는 설명처럼 짧은 거리를 순간적으로 이동하는 기술인데, 마치 마법처럼 중간에 모습을 감췄다가 나타나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마법적인 효과가 가미되어 있는 것 같은데, 아닙니까?”
“아닙니다. 온전하게 공포와 죽음의 권능을 빌어 사용하는 기술입니다.”
“오오…”
과연 공포와 죽음. 까도 까도 새로운 경이를 느끼게 하니 정말 양파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럼 각각의 기술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 드리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기젤의 설명에 따르면, 전율의 질주는 본래 습득에 별도의 조건이 필요한 특수 스킬에서 최근 기본 스킬로 바뀌었다고 한다. 스킬 발동시 이동 속도 증가는 물론이고, 어둠의 장막이라는 효과가 발동해 사용자를 감추어 주며, 스킬 레벨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올라가면 외부 충격에도 스킬 사용 상태가 해제되지 않는 수퍼 아머가 발동한다.
또한 필요한 경우, 어둠의 장막은 공포의 장막으로 변환이 가능하다. 공포의 장막이 발동되면 사용자를 인지하는 모든 대상은 밀려드는 공포를 견뎌내지 못할 경우 일정 시간 경직 상태를 유발하게 된다.
“와…”
이동기라고 해서 단순히 먼 거리를 빠르게 주파하는 식의 능력만을 생각했던 형진으로서는 절로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쯤 되면 단순한 이동기라기 보다는 잠입이나 퇴각 등 여러 가지 용도로 활용이 가능한 만능 스킬에 가깝다.
“이런 스킬이 겨우 기본 스킬이라고요?”
“물론 온전하게 그 기능을 다 활용하기 위해서는 최소 40레벨까지는 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극히 제한적인 기능만이 발휘되지요. 단점이 있다면 온전히 이동에만 전력을 다하는 스킬이 아니기 때문에 저레벨 상태에서는 다른 기본 스킬에 비해서 이동 자체의 효율은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만, 진님의 경우엔 음식을 통한 도핑이 가능하므로 큰 문제가 아닐 거라 판단했습니다.”
과연. 그래서 추천을 한 것인가. 다른 성도들이라면 몰라도 형진의 도핑은 분명히 염두에 두어야할 장점이다.
“그럼 고레벨 상태에서는 별 문제 없는 겁니까?”
“네. 오히려 다른 기본 스킬들보다 높은 등급의 스킬이기 때문에 레벨당 이동 속도 증가 폭은 더 큽니다. 물론 그만큼 숙련도가 오르는 속도가 조금 더디다는 문제도 있긴 합니다만.”
“과연. 그렇군요.”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이동 스킬은 무조건 최고 속도로 이동 가능한 스킬이 최고일 수도 있다. 하지만 형진은 음식을 통한 도핑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고, 그런 버프 효과 중에는 이동속도 증가 등도 포함이 되어 있으니 저레벨 상태에서 속도가 좀 떨어지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숙련도 증가가 다소 더딘 것도 마침 집행자 세트가 있으니 큰 문제는 아니고.
“그럼 환영의 반딧불은 어떤 스킬입니까.”
“설명 드리겠습니다.”
환영의 반딧불은 대시형의 스킬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마법에 재능이 없는 집행자를 위해 만들어진 순간 이동 스킬에 가깝다. 사실상 비마법형 순간 이동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 환영의 반딧불이라는 이름 자체가 발동했을 때의 모습이 어둠 속에서 깜빡 깜빡 빛나는 반딧불 같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정신력 소모가 큰 것이 단점이라 최근까지 조건부 습득이 가능한 특수 스킬이었지만, 이것 역시 얼마 전에 기본 스킬로 해금이 되었다고 한다.
저레벨에서는 쿨타임이 제법 길어서 이동기라기 보다는 위급한 상황을 빠져 나오기 위한 회피기에 가깝지만, 고레벨이 되면 쿨타임이 획기적으로 줄어서, 정신력이 충분할 경우 이름처럼 번뜩이는 모습으로 상대와의 거리를 순간적으로 좁힐 수 있는 위력적인 이동기로 탈바꿈하게 된다.
슬쩍슬쩍 모습을 드러낼 때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발동시 무적 상태가 유지되며, 순간이동과 마찬가지로 벽과 같은 장애물을 무시하고 이동이 가능하다는 장점 또한 있다.
“헐…”
설명만으로도 이미 넋이 나간 듯한 형진의 모습에 기젤은 씩 웃으며 단점에 대해 얘기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집행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스킬이기 때문에 마법사들의 순간 이동에 비해 정신력의 소모가 크다는 것이 가장 큰 단점입니다. 하지만 주문이나 기타 다른 복잡한 과정 없이 의지만으로 발동할 수 있기 때문에 숙련도가 높아지고 충분히 높은 수준의 정신력을 보유했다면 마법사의 순간이동보다 훨씬 위력적일 수밖에 없죠.”
“대, 대단하군요.”
힘이나 민첩처럼 정신력 수련도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을 절로 떠올리게 만든다.
사실 형진은 기젤을 방문할 당시만 해도 적당한 이동 스킬과 단검 숙련 같은 전투 관련 기본 스킬 정도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기젤의 설명을 듣고 보니 어머 이건 사야해 같은 말이 입에서 절로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다.
과연. 단순히 위장을 위해 옷장사를 하고 있는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떤 휴대폰을 살지 정하고 가게에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나올 때는 전혀 엉뚱한 휴대폰을 들고 나오는 것과 같은 상황이라고 해야 하나. 돈 주고 스킬을 판다고 해도 냉큼 사버렸을 것 같은 기분이다.
“이 두 가지 스킬을 습득하시겠습니까?”
“그,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미 아실 거라 생각됩니다만, 현재는 완전히 체득된 상태가 아닙니다. 반복 수련 등을 통해 레벨 1로 올라서게 되면 비로소 완전한 진님의 스킬이 되니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체득하시길 권합니다.”
“알겠습니다. 좋은 스킬을 추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요. 저야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어쨌든 스킬 전수를 마치고 다시 가게로 나오자, 마침 옷을 입고 거울을 보고 있던 유아가 화들짝 놀라며 형진을 바라보았다.
“어, 어때요?”
“흠…”
유아가 입은 것은 머메이드 스타일의 칵테일 드레스였는데, 일반적인 드레스보다 기장이 조금 짧은 대신 좀 더 발랄한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초점을 맞춘 듯 보였다. 아마도 전날 제랄딘이 입고 왔던 머메이드 드레스가 부러웠던 것이 아닐까 싶다.
“확실히 살이 찌긴 쪘네.”
“컥!”
예상 못한 형진의 대답에 얻어맞은 유아는 단숨에 그로기 상태에 빠졌다.
사실 형진이 나쁜 의도로 그런 말을 한 건 아니다. 처음 이 가게에 와서 이브닝 드레스를 샀을 때만 해도 볼륨감이 부족해서 일부러 가슴을 모아 키우는 식의 작업이 별도로 필요했었는데, 지금은 몸매가 또렷하게 드러나는 머메이드 스타일의 옷을 입어도 그럭저럭 어울리는 느낌이라 그런 식의 감상이 튀어 나온 것이다.
기젤은 두 남녀의 촌극을 보며 잔잔하게 웃다가 형진에게도 옷을 권했다.
“모처럼이니 진님도 한 벌 맞추십시오. 어울릴 만한 옷이 있습니다.”
“크흠.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공짜로 준다는데 사양할 형진이 아닌지라, 다시 정장 한 벌을 받아들고 나서야 옷가게를 빠져 나왔다. 그런데 나오면서 보니 뭔가 이상하다.
“그 꾸러미들은 뭐야?”
이전과 같은 참사를 막고자 다시 메이드복으로 갈아입은 유아가 당황하며 얼른 손에 든 꾸러미들을 등 뒤에 감춘다.
“벼, 별 것 아니에요.”
“별 것 아니긴. 그거 설마 다 옷이야?”
“그게…”
준다고 넙죽 넙죽 다 받아온 모양이다. 공짜니까 딱히 상관은 없지만, 도대체 스킬 전수 받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몇 벌이나 옷을 입어 본 건지 모르겠다. 나름 호구신의 사제 마인드에서 탈피하는 듯한 느낌이라 다행이다 싶긴 하지만.
잠깐. 그렇지도 않은가. 왜 주는지도 생각 않고 일단 받아놓고 보는 건 오히려 사기 당하기 딱 좋은 마인드 아닌가 싶기도 하고.
“유아.”
“네?”
“너… 나 말고 딴 사람이 맛있는 거 준다고 그래도 따라가면 안 된다.”
“당연하죠. 제가 애도 아니고.”
“…”
당연하다고 말하기는 하는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건지 모르겠다. 진짜 말 잘 듣는 충직한 개 한 마리 없나. 게임 같은 거 보면 펫 같은 것도 많던데. 더도 말고 그란웰의 그 만렙 토끼 같은 녀석 정도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은데 말이지.
어쨌거나 그렇게 일단 집으로 돌아온 형진은 곧바로 지하의 수련실로 들어가 집행자 세트로 갈아입은 다음 곧바로 수련을 시작했다.
“어차피 당장은 레벨이랄 것 자체가 없으니까 여기서도 충분하겠지.”
이동 스킬이기는 해도 아직 저레벨이라 제대로 활용이 힘든 상황이니 어쩔 수 없다. 게다가 사실 지하 수련장은 말이 실내일 뿐 상당히 넓은 면적을 자랑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잘은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농구장 두 개를 겹쳐놓은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