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525
525====================
118. 변혁
“이게 뭐야!”
졸리지도 않는데 괜히 방 안에 틀어 박혀 있던 희망과 생명은 기겁을 하고 뛰쳐나왔다. 선고를 마치고 긴 숨을 몰아쉬던 형진은 조금 지친 기색으로 소파에 기댄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주무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질러 놓고도 태연한 그의 모습에 희망과 생명은 얼른 그의 앞에 다가가 앉으며 말했다.
“오던 잠도 달아나겠다.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질러 놓은 거야!”
버럭 소리를 지르는 희망과 생명에게 형진은 어깨를 으쓱 해버렸다.
“짓이라뇨. 주신 명령서를 좀 썼을 뿐인데.”
담담한 반응에 희망과 생명은 오히려 말문이 막혀 버렸다.
“아니, 쓰라고 준 거야 맞지만 이건…”
희망과 생명은 공헌도가 많다. 아주 많다. 다른 신들은 감히 올려다 볼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하지만 많다는 것이 무한하다는 뜻은 아니다.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압도적인 양의 신앙과 공헌도를 쟁여놓고 있기는 하지만, 그 한계는 명확하다는 의미다.
침대에 누워 있다가 형진의 선고를 인식하고, 그것이 발동되자 세상이 벼락으로 뒤덮이며 신앙과 공헌도가 엄청난 속도로 소모되기 시작했다. 얼마나 빠르게 소모되는지, 공헌도 따위 써도써도 남아돈다고 스스로 말할 정도의 희망과 생명조차 기겁을 하고 뛰쳐 나올 정도다.
신이라고 해도 인과율을 벗어난, 이른바 기적이라는 행위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반대급부가 필요하기 마련. 하지만 이건 해도 너무 했다. 무한에 가깝다고 칭해지던 신앙과 공헌도가 급속도로 쪼그라드는 걸 보니 제 아무리 그깟 공헌도 운운하던 희망과 생명이라도 겁이 덜컥 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자기가 쓰라고 준 것이 맞는지라 뭐라 하지도 못하고 한숨만 푹푹 내쉬는 희망과 생명을 보며 형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생각해 보니까 그렇더라고요.”
“뭐가?”
형진은 요안나가 건네주는 찻잔을 기울여 입술을 적시고는 말을 이었다.
“세상에 퍼져 있는 부조리가 노예 제도인 것만은 아니라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나 할까요. 하나씩 해결해 나가는 건 뭐랄까… 너무 번거롭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매번 이런 일을 되풀이 할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그거야… 그렇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이 있다. 나쁜 화폐가 좋은 화폐를 밀어내고 시장을 점유하는 이런 현상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이기심으로부터 시작되기 마련이다. 좋은 화폐를 쌓아두고 나쁜 화폐를 쓰는 것이 이득이란 것을 알기에, 그것이 좋지 않은 일임을 알면서도 행하게 되는 것이라고나 할까.
부조리란 결국 그렇게 인간의 이기심으로부터 피어나는 곰팡이와 같은 것이다.
“법은 엄격하게, 적용은 관대하게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너무 강하게 법이라는 잣대를 들이댈 경우, 그 자체로 사회가 경직되고 인간미가 사라질 수 있기에 만들어진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경우에 따라 관대한 적용을 할 수 있다는 의미지. 무조건 관대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모두들 그것을 알고 있지만, 실제로 자신이 그 법의 적용을 받게 될 때는 무조건 관대하게 적용되기를 바라는 것이 결국 사람의 마음이란 얘기죠.”
그 말에 희망과 생명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되물었다.
“그래서, 이제는 이 모든 것을 엄격하게 적용해야만 한다는 얘긴가?”
형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닙니다.”
“그럼?”
“절대적인, 누구도 함부로 그것을 넘볼 수 없는 엄격한 집행의 기준이 필요하다는 얘깁니다.”
희망과 생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런 말을 한 것이로군. 지켜라, 너희가 정한대로.”
“그렇습니다. 필요성에 의해 법을 만들었다면 그것을 지켜야 하는 법인데, 스스로 집행의 자격을 얻게 되면 사람은 스스로에게 관대해지고자 하는 욕구를 일으키게 됩니다. 권력이 있으니, 돈이 있으니, 어리니까, 술을 먹었으니까, 종교적 가르침이니까… 이런 식으로 처음에는 선의로 만들어진 것들을 이용해 빠져 나가려는 욕구가 생기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자는 벌을 받는다. 누구나 알고 있는 이 당연한 가치를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희망과 생명은 팔짱을 끼고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무슨 얘긴지는 알겠어. 하지만 이렇게 단숨에 몰아붙이는 건 오히려 부작용이 생기지 않을까.”
형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맞는 말씀입니다. 사실 세계 인권 선언이 막 만들어진 시점이라면 저도 이렇게 강경하게 밀어 붙이지는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미 만들어진지 50년이 넘었고, 300여개 언어로 세계에 퍼졌습니다. 대부분의 나라가 이것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완벽하게 정착시키기엔 뭔가 한 가지가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죠. 저는 그 마지막 방점을 찍었을 뿐입니다.”
그 말에 희망과 생명은 쓴웃음을 지었다.
“마지막 방점이라기엔 소모되는 힘이 너무 큰 것 같다만.”
“그건 가중 처벌을 적용해서 그렇습니다.”
“가중 처벌?”
형진은 이렇게 설명했다.
“한 번쯤은 괜찮겠지 하는 얄팍한 생각으로 어긴 자와, 상습적으로 수십년간 같은 짓을 해온 자의 형벌이 같을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죄를 지은 만큼, 그 죄의 무게에 따라 벌을 더 많이 주고자 했을 뿐입니다. 삼십 년동안 한 사람을 노예처럼 부렸다면 대충 구백 번 정도 천벌을 두들겨 맞겠군요. 두 사람이면 그 두 배. 그런 식입니다.”
“구백 번… 맙소사.”
천벌이 무서운 것은 그렇게 영혼이 저며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면서도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데 있다. 솔직히 천벌을 구백 번 정도 두들겨 맞으면 혼이 달아나 버릴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될 것이고, 죄를 짓고자 하는 생각 자체를 떠올리지 못하도록 인격 개조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리고 그렇게 천벌을 두들겨 맞는 모습을 보면, 죄를 짓지 않은 사람도 경각심을 지닐 수밖에 없는 일이다.
희망과 생명이 이마를 감싸 쥐는 모습을 보고 형진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소모된 힘이라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왜?”
“강력한 처벌이 내려진 만큼, 사람들은 생각하겠죠. 희망과 생명이 그냥 진통제 대신 쓸 수 있는 편한 이름이 아니구나. 선한 만큼 불의에는 가차 없는 그런 광명정대한 신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의식 속에 뼈저리게 파고들지 않겠습니까? 굳이 포교를 할 것도 없이, 조만간 그들의 마음속에 신앙이 싹트고 자라나 다시 여신께 돌아올 겁니다. 솔직히 이쯤 되면 제가 모시는 공포와 죽음께서 오히려 질투를 하지 않으실까 싶을 정도입니다.”
“끙…”
당장 이 자리에 있는 스탭들만 보더라도 자신들과 함께 일했던 대여배우가 이 정도로 강력한 힘을 지닌 여신일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는지 상당히 놀란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활주로를 놓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사는 집이나 시가지와는 상당히 떨어진 곳에 저택이 위치하고 있음에도 멀리서 은은하게 벼락 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을 정도다.
[나름의 보상이라고 해두지.]문득 공포와 죽음의 목소리가 들려서 형진은 되물었다.
[보상이라면?] [자업자득이라고는 해도, 봉인을 시켜서 몹쓸 일을 겪게 만들었잖아.] [아하.]형진은 피식 웃고는 희망과 생명에게 그 말을 전했다.
“공포와 죽음께서 그러시네요.”
“뭐라고?”
“자업자득이긴 해도, 봉인을 시켜서 몹쓸 일을 겪게 했으니 그것에 대한 나름의 보상으로 양보하신 거라고요.”
“흥.”
어쨌든 가중 처벌의 대상들이 의외로 꽤 많았던 탓에 천벌이 모두 시행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특히나 폐쇄되고 고립된 사회일수록 이런 경향이 많았다. 그런 작고 폐쇄된 사회의 경우는 고래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삼는 경향이 있어서 이런 식의 인권 조례 같은 것이 무시되기 일쑤였지만, 이제는 그런 모든 가치들에 우선하는 신의 법이 그들 머리 속에 각인되고, 그것을 어겼을 때 어떤 형벌에 처해지는지 보았으니 달라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세계 인권 선언이란 건 그야말로 기본적인 내용을 담고 있을 뿐이다. 애초에 선언을 하게 된 계기 자체가 인류의 보편타당한 도덕 기준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니까. 다만 그것을 시행함에 있어서 자신들의 이익과 배치되는 것을 적당히 피하고 회피하려 했을 뿐이다.
한국의 예만 놓고 보더라도 헌법 재판소에서 세계 인권 선언을 관습법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식의 판례를 내놓은 적이 있을 정도다.
법이란 것이 모든 자의 권익이 아닌 기득권의 이익을 대표하게 되면, 그것은 곧 부패를 막을 안전장치 자체가 사라진다는 의미.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누구도 어길 수 없는 절대적인 기준이란 반드시 필요하게 마련이다. 게다가 그 기준이라는 것이 형진이 임의로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오십 년 전에 만들어져 삼백 여개 언어로 널리 배포된 것이라면, 그것을 부정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일이 되어 버린다.
인류의 역사를 살피면, 법은 엄격과 관용의 과정을 되풀이 해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엄격하면 그것에 피로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관용을 갈구하게 되고, 관용을 베풀면 그 빈틈을 노려 자신의 이득을 노리는 자가 득세한다. 그로 인해 피해를 본 자들은 다시 엄격을 갈구하게 되고 앞서의 과정이 다시 반복되는 것이다.
과거 전제주의가 만연하던 시기에는 이와 같은 흐름이 왕조의 흥망과도 직접적으로 연관이 되었으나, 여러 가지 완충 장치가 더해진 지금은 그런 흐름 자체도 어느 정도 완만해진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의 세태는 관용이 지나쳐 그것으로 인해 오히려 피로를 느끼는 자들이 많아지고 있는 상황.
멀리 볼 것도 없이 최근의 여론 조사 추이가 중범죄에 대해 너무 형벌이 가볍다는 식으로 기울어 가는 것도, 이런 식의 관용에 대한 피로감이 급격하게 늘어가고 있음을 뜻하는 방증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시기는 전통적으로 철권 정치를 휘두르는 독재자가 출현하기 쉽다. 온유한 것이 지나쳐 방만해진 국정에 지친 사람들이 강력한 권력으로 엄격한 법집행을 관철하는 강력한 지도자를 찾고, 그에게 힘을 실어주다가 독재자를 만들어 낸다고나 할까.
하지만 이제 세상은 그런 일반적인 독재자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막강한 권위를 가진 존재와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것은 어찌 보면 폭거라고도 할 수 있는 일.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때문에 사람들은 하늘을 새하얗게 뒤덮은 천벌에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아이가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때가 도래했음에 안도했다.
“맙소사.”
하지만 갑작스런 그 같은 사태로 가장 놀란 것은, 역시나 허세와 망상이었다. ‘
세상을 뒤덮어 버린 엄청난 힘의 물결. 그리고 그것을 통해 이루어지는 수많은 이적의 여파. 그 모든 것을 보통의 인간과는 달리 그대로 여과 없이 느낄 수 있는 허세와 망상으로서는 이 말도 안 되는 힘의 투사에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희망과 생명이라고…”
이제는 공포와 죽음이 희망과 생명을 어떤 식으로든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것이 확정적으로 굳어지고 말았다. 어느 한 쪽도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존재임을 감안하면, 허세와 망상은 이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절대로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없게 되었다고 무방할 것이다.
“…”
허세와 망상은 고민했다.
이제 사실상 이 세계에서는 더 이상 상황을 뒤집을 수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지금 상태로는 다른 파괴와 재생의 파편을 찾을 수도 없을뿐더러, 찾는다고 해도 토너먼트에 응할지조차 의문이다. 자신에게는 더 이상 토너먼트에 걸 무언가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은 있다.
차마 손을 대지 못한 금단의 방법이.
“하지만… 그건…”
하지만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라도, 허세와 망상은 그것을 감히 꺼내들 수 없었다. 신에게조차 금단인 이유는, 그것이 그만큼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허세와 망상은 결국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엘리시온으로 돌아가 휴면 상태로 돌아가는 일이 있어도 그것은 역시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아무리 무책임한 그라도 최소한 신으로서의 자각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렇지 않은 존재도 있었다.
신으로서의 존재를 잃고, 사념으로만 남아 신으로서의 자각조차 잊은 존재가.
허세와 망상은 그 존재를 깨울 단초를 자신이 만들었다는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두 편째.
오랜만의 오전 연재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