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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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상봉
파괴와 재생으로서는 뒤통수를 맞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금 형진 앞에 모습을 드러낸 모든 스폰들이 단숨에 파괴되어 버린 것보다도 어떻게 보면 더 큰 타격일 수밖에 없다. 이제 그는 두 번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언데드의 영역에 발을 들이는 순간, 그 신은 강대한 힘을 얻는 대신 한 가지를 각오해야만 한다.
그것은 바로 엘리시온에서의 추방.
엘리시온은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별 의미가 없는 곳이다. 그러나 신격에 타격을 입어 달리 복구할 방법이 없을 경우, 엘리시온은 그것을 복구할 마지막 방법으로서 존재한다. 다시 말해, 형진의 위계가 반신으로 승격되며 파편이 그의 몸과 영혼 속에 함께 녹아 섞여 버리는 순간, 파괴와 재생은 존재하는 다른 모든 파편들을 전부 모아 흡수하더라도 본래 자신이 지니고 있던 신격을 회복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네 이놈! 네 이노오옴!]미치고 팔딱 뛸 일이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머리끝까지 화가 난 파괴와 재생은 길길이 날뛰며 형진의 아바타들을 찢어 죽일 것처럼 달려들었다.
“?…”
이제까지 인스턴트 킬을 제외하면 몸 안에서 따로 노는 느낌이었던 파편들이 마침내 하나로 합쳐진 탓일까. 형진은 아까보다도 더욱 몸이 가벼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꽝!
[인스턴트 킬! ‘파괴와 재생의 스폰’이 죽었습니다.]이성을 잃은 것처럼 발광하는 스폰은 얼핏 두려움이 느껴질 정도의 살벌한 광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확연하게 공격력이 높아지긴 했지만, 그것은 반대로 빈틈이 많아졌음을 의미하는 일이기도 했다. 공격 자체를 인스턴트 킬로 지워버릴 수 있는 형진으로서는 오히려 상대하기 쉬워진 셈이다.
“말씀드렸던 대로, 당신의 추종자가 되고자 합니다.”
“…”
고개를 숙인 하엘의 머리 위로 형진의 손이 얹어지자 그녀에게 남아 있던 파괴와 재생의 문양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형진의 문양이 자리 잡는다.
하엘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입술을 깨물고 금방이라도 덮쳐 올지 모르는 무언가를 대비했다. 하지만 행인지 불행인지 그녀가 각오했던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실 인간의 형태, 그 중에서도 꼬리조차 내지 않은 형태에서는 적절한 마법만으로도 충분히 발정기를 막을 수 있다. 실제로 미엘은 파괴와 재생의 힘을 빌리지 않은 채 그것만으로도 오랜 세월 동안 발정기를 견뎌왔던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하엘의 경우 문제가 되었던 점은 오랜 세월동안 방파제처럼 발정기라는 천형을 막고 있던 힘이 사라지면서 그 반동이 나타나지 않을까 했던 것이지만, 그 문제는 형진의 힘이 그 자리에 대신 들어서게 되면서 어느 정도 해결이 되었다.
반신이 되면서 형진은 공포와 죽음의 추종자로서의 자격은 잃었지만 기존에 다른 신들과 맺었던 계약 같은 것은 여전히 유효했다. 그것만이 아니다. 유아를 매개로 해서 사용하곤 했던 희망과 생명의 힘 또한 여전히 운용이 가능했다. 바뀐 것이라고는 오직, 추종자로서의 지위가 반신의 그것으로 바뀐 것 뿐이다.
앞서 여신들이 선언하는 와중에 공포와 죽음이 잠시 머뭇거렸던 이유 또한 결국 그것 때문이다.
사실 공포와 죽음은 이미 오래 전에 그가 반신으로서 자격이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추종자로서의 그를 잃고 싶지 않았던 관계로 가만히 함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만약 상황이 지금 같지 않았다면, 그녀는 반신의 과정조차 필요가 없을 정도로 성장하여 스스로 신위를 얻고 신이 되지 않은 이상, 이런 식으로 형진을 놓아주지 않았을 것이다. 파괴와 재생이 지금 언데드의 영역에 발을 딛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상태에서, 그에게 복구 불가능한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 형진을 반신으로 올리는 것이기에 마지못해 승낙을 한 것일 뿐이다.
“좋아. 아주 좋아. 아하하하하하!”
반신이 된 형진의 모습을 보며 가장 즐거운 표정으로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희망과 생명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공포와 죽음은 지금까지 형진이라는 대리자를 통해 여기 모인 신들을 간접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형진이 추종자의 자리에서 벗어나 반신의 자격을 얻는 순간 그런 종적인 지배 관계는 파훼되었다. 심정적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직접적인 지배 관계는 이것으로 청산이 되어 버린 것이다.
희망과 생명은 유아의 몸에서 그와 반강제적으로 신혼 생활을 누리다보니 더 이상 형진을 남처럼 여길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그녀의 높은 자존심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은 하필 그 남자가 공포와 죽음의 추종자라는 사실. 때문에 그녀는 황혼과 망각에게서 이번 일의 자초지종을 전해 듣는 순간 득달 같이 달려와 형진을 반신의 위계에 올리는 일을 적극적으로 주도한 것이다.
꽝!
[인스턴트 킬! ‘파괴와 재생의 스폰’이 죽었습니다.]또 하나의 스폰이 형진에게 파괴당했다. 하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급박해지고 있었다.
파괴된 스폰을 대신해서 검은 불꽃에 의해 불타버린 숲으로부터 새로운 언데드가 출현하고 있었다. 앞서 등장했던 무언가보다 더 크고 강력한 힘을 지닌 무언가가 파괴와 재생의 분노를 잔뜩 뒤집어 쓴 채 괴성을 터뜨리며 세상 모두를 파괴할 것처럼 난동을 부리기 시작한다.
“칫!”
형진은 입술을 깨물며 흑요호의 힘을 불러일으켰다. 힘을 잔뜩 불어 넣어 거대화시킨 흑요호의 형상으로 하여금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거대한 언데드의 난동을 막으려 한 것이다.
“어?”
하지만 예상 외의 일이 일어났다. 엉뚱하게도 지금 이 순간 그의 눈앞에 미엘이 뿅 하고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뭐야? 당신이 왜?”
“저도 몰라요. 갑자기 무언가가 끌어당기는 듯한 느낌으로 이곳에 불려와 버렸어요.”
“뭐?”
“꺄악!”
형진은 당황한 와중에도 미엘의 허리를 안아 자신의 품에 안으며 그녀를 보호했다.
[계약이 역전되어 버렸다.] “네? 역전이라고요?”[그래. 너의 위계가 미엘의 그것보다 높아지면서 계약의 주체 또한 너에게로 옮겨온 것이다.]
미엘은 인간보다 강력한 힘을 지닌 환수. 보통의 경우 계약을 맺게 되면 그녀가 인간에게 힘을 빌려주는 식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형진이 반신으로 올라서면서 그 계약의 상하 관계는 역전이 되었고, 그의 의지가 흑요호의 힘을 원한 순간 단순히 힘을 빌려주는 것을 넘어 미엘 자신이 그에게 끌려와 버린 것이다.
“망했다. 어쩌지?”
흑요호의 힘은 그가 지금까지 아주 유용하게 써왔던 능력이다. 너무나 유용한 탓에 토끼들에게 얻은 몇 가지 격투 스킬 외에는 달리 스킬을 익힐 필요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계약이 역전되며 오히려 형진이 미엘에게 힘을 빌려줘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형진으로서는 강력하고 유용한 수단 하나가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게 되어 버린 셈이다.
[그녀에게 힘을 주면 된다.] “네? 하지만…”[너는 지금 다른 신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 양의 공헌도를 소유하고 있다. 그것을 이용한다면, 그녀에게 일반적인 흑요호를 뛰어넘는 힘을 부여할 수 있게 된다.] “정말입니까? 하지만 어떻게…”
[힘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오직 너의 의지에 달린 일. 또 모르지. 그것이 기회가 되어 네가 신위를 얻을 수 있을지도.]
비록 더 이상 자신의 추종자가 아니게 되었으나, 공포와 죽음은 지금 이 순간 성심껏 그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자신이 직접 모습을 드러내 싸울 수 없는 상황임을 고려하면, 오직 형진만이 파괴와 재생으로 인해 촉발된 지금의 사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형진은 고민했다. 지금 이 상태에서 미엘에게 힘을 부여하는 것이 오히려 그녀를 위험으로 몰고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형진을 향해 미엘은 방긋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진. 잊었어요? 전 집행자 중에도 가장 강한 자들 가운데 하나인 종결자에요. 비록 이제는 당신이 저보다 강해졌지만, 저도 그리 약한 존재가 아니라고요.”
“하지만…”
“절 보호하고자 하는 당신 마음은 이해해요. 하지만, 정말로 절 보호하고 싶다면 품에 안고 있지만 말고 저에게 힘을 주세요.”
“…”
“전 당신의 아내이자, 또한 아이들의 엄마이기도 해요. 인간들에겐 그런 말이 있죠?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고. 전 여자일 때도 강했으니, 엄마가 된 지금은 더 강해질 수 있을 거에요.”
형진은 미엘의 말에 담긴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힘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리고 손을 꼭 마주 쥔 채로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너 이노오옴! 감히 날 무시하는 거냐! 어디서 헛짓거리야!]그 모습이 눈꼴시었는지 파괴와 재생이 분노의 노호성을 터뜨리며 스폰과 언데드을 몰아 그를 공격해 왔다. 그러나 시기적절하게 앞을 가로 막은 형진의 다른 아바타들 때문에 그 공세는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고, 형진과 미엘은 마치 의식을 치루는 듯한 느낌으로 빛의 회오리에 휩싸인채 허공으로 떠올랐다.
“아!”
미엘은 가만히 그의 입술이 자신의 이마에 와닿은 것을 느끼고 있다가 어느 순간 탄성을 터뜨리며 몸을 뒤로 젖혔다. 입고 있던 옷이 터져 나오는 힘을 견디지 못하고 찢어지며 나신이 드러나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그녀의 몸은 거대한 흑요호의 몸으로 변화했다.
“아…”
하지만 형진의 시야에 들어온 그녀의 모습은 이제까지 봐왔던 칠흑같은 검은 빛의 흑요호가 아니었다. 마치 눈이 내린 것처럼 새하얀 빛에 물든 그녀의 모습은 지금까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성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흑요호라고 부르지 못하겠는걸.”
형진의 나직한 중얼거림과 함께 미엘은 변화를 마치고 눈을 떴다. 그리고 전신에 끓어오르는 강한 힘에 전율하며 커다란 포효를 터뜨렸다.
“컥!”
“크헉!”
인간의 언어로는 실로 표현하는 것조차 어려운 느낌의 강렬한 어떤 의미가 사방에 휘몰아쳤다. 신의 힘을 그대로 전해 받아, 그것을 야수의 포효로 형상화시킨 그 공격은 일순 검게 타오르던 사악한 불길을 잠재워버릴 정도로 강력했다.
[이게… 무슨?]형진이 공헌도를 몰아주는 순간 미엘은 더 이상 흑요호라는 이름의 환수가 아닌, 성수라고 부르기에 충분한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퍼펑!
순간 미엘의 꼬리들이 폭죽처럼 터지며 분신들을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연이어 터지는 포효에 주춤거리는 스폰과 언데드들을 향해 성난 모습으로 달려들기 시작한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계약이 역전 되는 순간 미엘은 또한 형진이 본래 지니고 있는 능력 가운데 하나를 받아들였다. 바로 인스턴트 킬이 그것이다.
물론 형진처럼 완전한 형태로 그것을 구사할 수는 없었지만, 상대의 공격이나 몸에 존재하는 치명적인 약점을 어렴풋이나마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냥도 강력한 힘을 지닌 성수 미엘에게 그와 같은 능력이 부여된 것은 그야말로 호랑이에게 날개를 단 격이나 마찬가지.
쾅! 콰광!
연이은 폭음과 함께 스폰들은 힘없이 미엘의 공격 앞에 소멸되었고, 거대한 형체를 자랑하던 언데드 또한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하고 그대로 갈기갈기 찢겨 해체되어 버리고 만다.
[용서 못해… 용서 못해! 두고 봐라… 내 너희들을 반드시!]수족이 될 스폰과 언데드가 모두 사라지자 파괴와 재생은 더 이상 이 세계에 자신의 의사를 전할 수단을 잃어 버렸고, 그렇게 메아리치는 고함 속에서 존재감이 서서히 사라져갔다.
“후아…”
숲에 남은 검은 불꽃의 작은 불씨 하나까지 모조리 지워버리고 나서야, 미엘은 다시 형진의 눈앞에 작고 귀여운 동물귀의 아가씨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인간의 형상이 되어서도 여전히 성수로 변화한 후유증은 남아 있었다. 뭔가 반짝 반짝 빛나는 듯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잠시 뒤 그러한 반짝임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뭔가 신비한 분위기가 그녀의 주위에 맴돌고 있음을 형진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수고했어.”
“별 말씀을요.”
미엘은 미처 옷을 챙겨 입기도 전에 자신을 품에 안는 형진의 모습에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가만히 그의 품으로부터 전해지는 안락함을 느꼈다.
하지만 잠시 뒤, 전투 후의 긴장감이 어느 정도 해소되고 나자 미엘은 그의 품에서 벗어나며 이렇게 말했다.
“진.”
“응?”
“당신의 아내로서 부탁이 있어요.”
“무슨?”
형진의 말에 미엘은 단호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하엘과 계약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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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한편.
안녕히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