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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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상봉
탄식인지 탄성인지 헷갈리는 외침과 함께 구현자, 아니 이제는 스폰이 되어 버린 구현자는 몸의 겉면을 태우다 못해 내부로부터 불타며 입과 눈을 비롯한 모든 구멍으로부터 불길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기괴하다 못해 혐오스러운 그 모습에 형진은 눈을 찌푸리면서도 일격을 가하려 했다. 그러나 눈이 마주친 순간 그곳으로부터 불길이 채찍처럼 뿜어져 나왔기 때문에 놈의 명을 끊는 대신 그 공격부터 차단해야만 했다.
꽝!
다시 한 번 격렬한 폭발이 일어난다. 처음 이놈들과 마주쳤을 때라면 그 충격 때문에 물러나며 반대로 경직 상태에 빠졌겠지만, 지금 형진의 몸은 공포와 죽음의 힘이 채워져 있는 상태이기에 그대로 밀고 나가는 것이 가능했다.
놈의 정수리에 박힌, 이제는 확연하게 검은 빛으로 변한 파괴와 재생의 문장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
꽈광!
형진의 팔을 타고 뻗어나간 흑요호의 꼬리가 그것을 타격해 부숴버린다.
[좋지 않아.]하지만 다시금 인스턴트 킬이 터져 나와 스폰 하나를 잠재웠음에도 불구하고 공포와 죽음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스폰을 통해 전해져 오는 파괴와 재생의 힘이 예상보다 훨씬 더 막강한 것을 이해한 것이다.
어째서일까. 지구상에 존재하는 파편은 이미 형진이 반 가까이 회수했을 텐데. 남은 파편들도 회수는 하지 못했지만 존재는 확인한 상태인데.
“아차…”
잠시 의문에 빠졌던 형진이지만, 이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애초에 파편이 지구에만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 잘못이었다. 허세와 망상이 벌인 일을 추적하면서 드러난 파편에만 신경을 쓰다 보니, 그런 파편들이 지구가 아닌 다른 어딘가에 흩어져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허세와 망상 같은 이가 그것을 습득하는 것에만 신경을 집중하다보니, 정작 다른 곳에 흩어진 더 많은 파편들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못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기다린 보람이 있다 하였던가.
아마도 이전에 파괴와 재생의 강림을 막은 시점에서, 놈은 형진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었던 것은 지금처럼 형진이 다른 파편들을 모아 자신의 앞에 나타나기를 기다린 것이리라. 자신은 그 시간에 다른 곳에 방치된 파편들을 모으고, 알아서 형진이 파편을 모아다 바치기를 기다리는 쪽을 녀석은 선택했던 것이다.
신의 힘은 거느린 인간의 수에 비례하는 법. 금기를 어겨 스스로 언데드의 영역에 발을 디딘 파괴와 재생은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든 누이의 힘을 넘어설 때까지 자신 안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꾹 눌러 참은 채 이 시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광기 어린 집착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집념.
두 오누이의 힘을 그대로 전해 받은 스폰과 형진의 대결은 그렇지 않아도 가물어서 바짝 마른 숲을 태우기 시작했다. 생동감이 넘치던 숲이 어두운 불꽃에 휩싸여 부정한 죽음의 기운에 휩싸이자, 그렇지 않아도 타나토스에 들끓던 사기들이 반응하며 그곳에 현상을 촉발시켰다.
그구구구구구!
마치 자석에 이끌리는 것처럼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이 저편에서 숲에 가득한 사기와 타락해 버린 파괴와 재생의 힘에 이끌려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형진도 더 이상은 혼자서 이 모든 것을 상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 버렸다. 결국 그는 각지에서 유저들이나 지부장급이 감당하기 어려운 언데드들을 처리하고 다니던 아바타들을 불러들였다.
하지만 그것은 파괴와 재생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 이 장소에 있는 것은 그의 힘과 의지를 담은 스폰들 뿐. 온전히 존재를 담은 아바타와는 다르기에 인스턴트 킬로 죽여도 파편조차 떨구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 보면 불러들인 아바타의 수만큼 형진이 더 불리해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크하! 좋아! 아주 훌륭해!]역시나 파괴와 재생 역시 그것을 알아챘는지 새롭게 불려나온 아바타들은 몸 안에 공포와 죽음의 힘이 채워지자 곧바로 스폰들에게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형진은 그 와중에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야만 했다.
“하엘.”
“네? 커흑!”
형진의 본신은 왕성 라이언하트 안에 머물고 있는 또다른 구현자를 찾아가 그녀의 목덜미를 단숨에 움켜쥐었다.
“가, 갑자기… 왜…”
그렇지 않아도 형진이 지닌 파편 때문에 코앞에서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입장이었던 하엘은 감히 눈을 마주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몸을 바들바들 떨 뿐 저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역시 계약 덕분인가.
하엘은 이전에 보호와 균형의 이름 아래 계약을 맺은 전례가 있다. 그것이 파괴와 재생의 힘에 의해 침식되어 스폰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형진은 그런 생각을 떠올렸지만, 뒤이어 이것이 어쩌면 놈의 기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또한 떠올렸다.
“여보?”
놀란 미엘이 옆으로 다가오려 했지만, 형진은 손을 들어 그녀의 접근을 막은 뒤 여전히 두려움에 떨고 있는 하엘에게 강요했다.
“개종해라.”
“네?”
갑작스런 형진의 말에 하엘은 눈을 크게 떴고, 그것은 지켜보던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런 식으로 다른 이에게 개종을 강요하는 일은 몽마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미엘이 동생처럼 여기는 이라든가, 그렇지 않아도 수가 적은 흑요호라든가 하는 점 따위 형진의 염두에 남아 있지 않았다. 왕성 라이언하트는 그의 아내와 자식들이 살아가는 곳. 그런 곳에 하나라도 위험한 요소를 남겨두는 자체를 그는 용납할 수 없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죽여 없애는 것이겠지만, 그나마 함께 지낸 시간과 그 시간동안 식구들과 쌓인 정이 있음을 고려해 개종을 강요하는 정도로 봐주는 것이다.
하지만 하엘로서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다. 갑자기 개종이라니. 게다가 그녀가 굳이 파괴와 재생 같은 위험한 신의 추종자가 되었던 것은 발정기라는 천형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던가. 이제 와서 개종하여 다른 신을 섬기거나 하는 날에는 파괴와 재생의 힘으로 억눌러 왔던 그 모든 것들이 터져 나와 버릴지도 모른다.
“어, 어째서…”
형진은 와들와들 떨고 있는 하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파괴와 재생은 해서는 안 될 금기를 깨뜨렸다. 이제 그는 나와 내가 모시는 신의 완전한 적. 이것은 허세와 망상이 만들어 놓은 상황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위험한 사태이기에, 나는 더 이상 나와 내 가족이 사는 곳에 그의 추종자가 남아 있는 것을 방치할 수 없다.”
“아…”
아기들과 간식을 나누어 먹다가 갑작스럽게 시끄러워지자 무슨 일인가 싶어 슬며시 고개를 내밀었던 꼬맹이 신들이 금기라는 말에 화들짝 놀란다. 다른 이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신들은 대번에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이해했다.
하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형진의 시선으로부터 강한 의지가 전해져 온다. 그녀는 그 의지를 직시하자 그 의미 또한 이해했다. 지금 여기서 자신이 개종을 거부하면 그는 더 이상의 망설임 없이 자신을 죽여 없앨 것이다. 하엘은 환수 중에서도 특히 강력한 존재인 흑요호였지만, 지금 이 남자가 뿜어내는 힘과 의지는 그녀를 아득하게 뛰어 넘고 있었다.
이 남자는 지금 자신에게 개종을 강요하는 것이 가져올 또다른 결과에 대해 알고는 있는 걸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저 자신의 가족들이 머무는 곳에 위험 요소를 남겨두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이렇게 자신을 겁박하는 것이리라.
그에게 딱히 애정 같은 것은 느껴 본 적도 없는 하엘이지만, 이렇게 된 이상은 결국 선택을 해야만 한다. 허나 이미 결론은 나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목숨을 바쳐 파괴와 재생을 섬길 이유도 없을뿐더러, 죽는 것에 비하면 차라리 발정기를 겪는 것이 백배 낫기 때문이다.
흑요호든 뭐든, 죽어버리면 결국 그걸로 끝이니까.
“개종… 할게요.”
“좋아.”
형진은 하엘에게서 답이 나오자, 근처에 몰려와 있는 꼬맹이 신들을 부르려 했다. 하지만 미처 그의 입에서 다른 말이 나오기도 전에, 목을 잡고 있던 그의 손목을 하엘의 완강한 손이 움켜쥔다.
“이건 무슨 의미지?”
갑작스런 행동에 형진이 얼굴을 찌푸리며 그렇게 묻자, 하엘은 굳은 표정으로 답했다.
“기왕 그래야 한다면, 당신을 섬기겠습니다.”
“뭐?”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다른 신들이 이렇게 많은데 굳이 자신을 섬기겠다니. 물론 자신 또한 언젠가 신위를 얻을 수 있겠지만 아직은 인간에 불과한 것도 사실이고.
하지만 하엘은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제가 파괴와 재생을 섬긴 것은, 그것이 제 발정기를 억누르는 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은 이미 당신으로 인해 효과가 거의 사라졌죠. 하지만 당신이 지닌 힘이 또한 파괴와 재생으로부터 비롯된 것도 사실. 그렇다면 다른 신을 섬기는 것보다 당신을 섬기는 것이 제가 직면한 상황을 모면하는데 더욱 효과적이지 않겠습니까?”
“그건…”
하엘로서는 도박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만약 성공한다면 그녀는 다시 한 번 발정기를 억누를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 하지만, 실패한다면 이번에야 말로 그녀는 빼도 박도 못하고 발정기라는 이름의 천형에 침식되어 아이를 가질 수밖에 없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 상대는 볼 것도 없이 그녀의 몸과 영혼을 장악해 버린 형진이 될 것이다.
“…”
형진은 하엘의 굳은 표정과 시선에서 그러한 의지를 읽었다. 이런 와중에도 천형을 신경 써야만 하는 흑요호의 신세가 참으로 안타깝게 느껴졌지만, 그것보다도 큰 문제는 과연 그녀의 주장이 실제로 성립 가능한 일인가 하는 점이다.
바로 그때, 뒤쪽에서 이 모든 모습을 훔쳐보고 있던 꼬맹이 여신들이 앞으로 나섰다.
“그런 일이라면 저희가 도울게요.”
“그래요. 진님이라면 자격이 있으니까요.”
“저도… 도울게요.”
무엇을 어떻게 돕는다는 얘길까. 형진이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들을 돌아보자 꼬맹이 여신들이 말했다.
“완전한 신은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는 위치로 올려드릴 수 있어요.”
“그렇게 된다면, 제한된 숫자이긴 하지만 추종자를 받아들이는 것 또한 가능하죠.”
“자격 요건이 다소 복잡하기는 하지만, 지금의 진님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에요. 아, 잠시만요.”
황혼과 망각이 잠시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는가 싶더니, 파티라도 참석할 것처럼 요란한 드레스를 몸에 두른 희망과 생명이 공간을 넘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흥. 이쁜 구석은 없지만, 이런 일에 내가 빠질 수는 없지.”
뒤이어 다희의 품에 안긴 비와 낭만도 모습을 드러냈다.
“상황이 급박하니 저도 돕겠습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가. 완전한 신은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위치로 올린다니.
“잠시만요. 누가 좀 더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시겠습니까?”
그러자 희망과 생명이 콧방귀를 뀌며 답했다.
“아직 그것도 설명하지 않은 거야? 간단해. 널 지금 이 순간 반신으로 올리겠다는 얘기야.”
“네?”
“완전한 신은 아니야. 그저 신으로 가는 관문 같은 것이지. 그 상태에서 자신의 본질을 깨달아 온전한 신위를 깨달으면 그 순간 너는 신이 될 수 있어. 바꿔 말하자면, 신위가 없는 신이라고나 할까.”
“아…”
희망과 생명은 진지한 표정으로 형진을 직시하며 말을 이었다.
“나는 이제 엘리시온의 일좌를 차지한 신 희망과 생명의 이름으로 자격을 갖춘 인간 진에게 반신의 위를 부여하고자 한다.”
그러자 다른 꼬맹이 신들이 그녀의 뒤를 이어 말했다.
“나는 이제 엘리시온의 일좌를 차지한 신 보호와 균형의 이름으로 자격을 갖춘 인간 진에게 반신의 위를 부여하고자 합니다.”
“나는 이제 엘리시온의 일좌를 차지한 신 꽃과 바람의 이름으로 자격을 갖춘 인간 진에게 반신의 위를 부여하고자 해요.”
“나는 이제 엘리시온의 일좌를 차지한 신 황혼과 망각의 이름으로 자격을 갖춘 인간 진에게 반신의 위를 부여하겠습니다.”
“나는 이제 엘리시온의 일좌를 차지한 신 비와 낭만의 이름으로 자격을 갖춘 인간 진에게 반신의 위를 부여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뒤이어 잠시 머뭇거리는 듯한 느낌과 함께 또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나는… 이제 엘리시온의 일좌를 차지한 신 공포와 죽음의 이름으로 자격을 갖춘 인간 진에게 반신의 위를 부여한다.]그렇게 여섯 신의 선언이 끝나자, 희망과 생명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이렇게 선언했다.
“이제 희망과 생명, 보호와 균형, 꽃과 바람, 황혼과 망각, 비와 낭만, 공포와 죽음, 이렇게 여섯 신의 총의를 모아 자격을 갖춘 인간 진에게 반신의 위가 부여되었음을 선포한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진의 몸과 영혼이 변화했다. 지금까지 그의 몸과 영혼 안에서 이물질처럼 남아 있던 파편이 녹아 그의 존재 속에 섞여 들어갔다. 그리고 그 변화의 끝에서 과거 주정뱅이로부터 받았던 공포와 죽음의 낙인이 사라지고 지금까지 본적이 없는 새로운 형상의 문양이 그 자리를 대신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한 변화는 또한 그와 싸우고 있던 누군가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네 놈! 감히… 감히 무슨 짓을!]============================ 작품 후기 ============================
오늘은 여기까지.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