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600
00600 136. 격돌 =========================
형진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자신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또 한 사람의 공포와 죽음, 제랄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란의 경우는 차라리 이전에 들었던 얘기가 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제랄딘의 경우엔 아무런 예측도 하지 못했다. 때문에 형진으로서는 뒤통수를 커다란 망치로 두들겨 맞은 것 같은 기분마저 느끼며 아무런 생각조차 떠올리지 못한 채 그저 입만 쩍 벌리고 있었다.
제랄딘 역시 상태가 조금 이상하다. 마치 넋이 빠진 것처럼 멍한 표정으로 서 있을 뿐이다. 혼이 빠져 나간 인형과도 같은 상태라고 해야 하나. 아마도 공포와 죽음의 통제력이 발동해 일시적으로 움직임이 멈춘 것인지도 모른다.
한참이나 아무 말도 못한 채 그런 제랄딘의 모습을 바라보던 형진은, 마치 술을 진탕 마시고 다음날 아침 일어났을 때 같은 현기증마저 느끼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설마… 더 있거나… 그런 건… 아니겠죠?”
아란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제랄딘이 끝이야. 더 이상은 없어.”
“그건… 그나마… 다행이군요.”
만약 여기서 또 다른 반려가 사실은 나도 공포와 죽음이었어 하고 나선다면 형진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공포와 죽음도 신이니까, 자신과는 다른 완벽한 신이니까 아바타 한두 명 정도는 동시에 운용하는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다. 반쪽짜리인 자신조차도 열 명 이상을 동시에 운용할 수 있을 정도니까.
하지만 이성적으로는 납득을 했어도, 그것이 그냥 아 그런가보다 하고 받아들이고 넘어갈 수 있다는 뜻이냐면 그건 아니다. 배신감? 저항감? 아니다. 그런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뭐라 말로 표현하기조차 어려운 복잡한 여러 가지 감정이 뒤엉켜서 본인 스스로도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이 뭔지 이해하기 힘들다.
“제랄딘은… 가족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미엘이 어렸을 때부터 키웠다고도 했고.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간신히 그렇게 입을 열어 질문하자, 아란은 얼른 설명했다.
“그러니까… 처음 시작은 아이를 낳기로 결심했을 때였어. 하지만 당시의 난 아이를 낳는 일은커녕 어떻게 키워야 할지조차 감을 잡을 수가 없었지. 그렇다고 다른 이들에게 손을 뻗을 수도 없었어. 아이를 낳는 일이라면, 희망과 생명의 사제들이 전문이긴 하지만… 그렇게 되면 다른 신도 알게 될테고 그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면 그 순간 이미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성장은 물 건너가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공포와 죽음이 내린 결론은 스스로 아이가 되어 양육의 과정을 직접 체험하는 것이었다. 그 과정을 위해 지상의 일들을 살피던 공포와 죽음은 막 죽음에 이른 아이 하나를 발견했다. 그 아이가 바로 본래의 제랄딘이다.
“바꿔치기를 했단 말이군요.”
“병에 걸려 죽어버린 아이에게는 미안했지만 그것이 당시의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으니까.”
바꿔치기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고, 영락없이 죽었다고만 생각했던 아이가 기적적으로 되살아나자 공작은 금이야 옥이야 하며 소중하게 키웠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공포와 죽음은 그 즈음 공작이 큰돈을 들여 영입한 미엘로부터 흑요호의 힘과 집행자의 자격을 전해 받아 혹시라도 다른 신들이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리는 것을 방지했다.
그런 식으로 아이를 키우는 일에 대한 지식을 스스로 체득한 공포와 죽음은 마침내 아이를 낳고 그란웰에 정착했다. 그 시점에서 제랄딘의 효용은 이미 다한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다시 제랄딘의 존재를 죽여 버리는 것은 그녀를 소중하게 키웠던 가족에게 큰 상처를 남기는 일. 하지만 그렇다고 여느 귀족 아가씨처럼 정략에 의해 팔려가는 경험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제랄딘이 그토록 다른 귀족 남성과의 결혼에 부정적이었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던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그냥 저냥 평범한 귀족 여성으로서 생을 마감하는 수준의 인생을 보냈을 제랄딘의 운명에 전기가 찾아온 것은 바로 형진의 출현 때문이었다.
처음 아란으로 형진을 만났을 때, 공포와 죽음은 파괴와 재생의 파편을 지닌 풋내기 집행자의 모습을 스스로 관찰하는 정도의 목적 밖에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허세와 망상이 쓸데없는 짓을 벌이기 시작한 것도 신경이 쓰였고, 자신의 손으로 처치했던 파괴와 재생의 파편이 인간의 모습을 갖춘 채 돌아다니는 것도 신경이 쓰였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데려와서 부대끼는 와중에, 공포와 죽음은 이 미숙하면서도 혈기왕성한 다른 세계의 청년에게 차츰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하고 말았다.
파괴와 재생과의 사이에서 벌어졌던 일 이후, 다른 누군가 맺어지는 일 따위 없으리라 생각했던 공포와 죽음으로서는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고민하던 공포와 죽음이 떠올린 것이 바로 제랄딘이었다. 비록 자신의 아바타 가운데 하나이긴 해도, 금지옥엽으로 자라나 더할 나위 없이 순수하고 깨끗한 몸과 마음을 지닌 그녀라면 좀 더 떳떳하게 그와 맺어질 수 있을 거라는 그런 기대가 피어난 것이다.
갑작스런 그리칸으로의 전출은 그렇게 결정되었다. 하지만 형진은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일을 벌였다. 이별을 통보하려던 공포와 죽음을 덮쳐 버린 것이다.
-싫으면 거부하셔도 됩니다.
-전 약합니다. 아마 당신이 제대로 힘을 쓰면 단 일격도 견디지 못하고 죽어 넘어지겠죠. 그러니 싫으면 거부하십시오. 이런 제 행동이 혐오스럽다면 당신의 손으로 단번에 목을 부러뜨리면 됩니다. 계율에는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라면 형제를 해하지 말라 되어 있지만, 지금 같은 상황이면 공포와 죽음께서도 충분히 정상참작을 해 주실 겁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공포와 죽음은, 아란은 그런 일은 할 수가 없었다. 당장의 시간만 어떻게 넘기면 제랄딘으로서 그와 당당하게 맺어질 수 있다는 기대도 있었고, 이런 자신이라도 원하노라 말하는 그를 거부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결국 그를 받아들이고 만다.
하지만 여기서 또다시 예기치 못한 문제가 생겨버렸다. 그 날 밤의 일로 덜컥 아이가 들어서 버린 것이다.
“허…”
형진은 그제서야 그날 밤 자신이 목숨 걸고 저질렀던 도박이 성공했었음을 깨닫고 허탈한 기분이 되어 버렸다.
“그럼… 얼마 전에 아이가 생겼다고 말했던 것이…”
“바로 그 아이야.”
“허… 허허…”
공포와 죽음은 그 일을 숨겼다. 물론 지우는 일 따위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만약 그때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을 형진에게 말했다면, 그는 아마 전출이고 뭐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그란웰로 돌아왔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제랄딘과의 만남은 물론이고 이후의 다른 일들도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예상치 못한 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바로 유아의 존재가 그것이다. 그리칸에 도착한 시점에서 지부장에게 전출을 보고할 때 그의 곁에 자리 잡은 유아의 모습을 보고 공포와 죽음은 당황했다. 게다가 조금 시간이 지나자 유아는 아예 형진의 반려로 자리를 잡아 버리기까지 했다. 속으로는 화가 치밀었지만, 그렇다고 달리 형진이나 유아에게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당장 형진을 그리칸으로 보낸 것도 자신이고, 그를 속여 새로운 몸으로 그와 맺어지려고 하는 것도 자신이었으니까.
오히려 공포와 죽음이 걱정한 것은 유아와의 생활에 만족해 제랄딘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어쩌나 했던 점이었고, 그래서 일부러 미엘과 형진의 접촉을 유도하여 둘이 맺어지도록 만들었다. 일단 하나가 둘이 되고 나면 세 번째는 그만큼 저항감이 약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고, 미엘이라면 제랄딘과 형진을 잇는 교량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테니까.
다행히 그녀의 의도는 훌륭하게 먹혀들었고, 제랄딘은 형진의 세 번째 반려로서 완벽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특히 아란의 몸에 잉태된 형진의 아이가 가장 큰 문제였다.
쌍둥이들의 경우처럼, 아이를 낳는 일 자체는 얼마든지 유예가 가능했다. 하지만 이대로 아이의 존재를 계속 숨겨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공포와 죽음으로서도 결단을 내리기 어려웠다. 아이의 존재가 밝혀지게 되면, 형진은 당연히 아란 역시 자신의 품으로 끌어들이려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힘들게 제랄딘의 존재를 그의 곁에 안착시킨 상황에서 아란의 존재가 다시 부각되는 것은 여러모로 좋지 않은 문제를 야기할 공산이 컸다.
결국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시간을 끌다가 지부장 소집이라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시 한 번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아란이 임무 수행중에 부상을 입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은 공포와 죽음으로 하여금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다행히 아이는 무사했지만, 예기치 못한 사태로 인해 얼마든지 위기에 빠질 수 있음을 인지한 것이다.
결국 공포와 죽음은 아란 역시 형진의 곁에 머물게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다행히 다른 반려들 역시 아란의 존재를 용인해 주었고, 그 모든 과정이 끝나자 비로소 아란은 아이의 존재를 형진에게 알릴 수 있게 되었다.
“허…”
자신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이 어떤 내막을 가지고 있었는지 이제야 알게 된 형진은 길게 탄식하며 이마를 감싸 쥐었다.
다른 건 몰라도 미처 모르는 시간과 장소에서 공포와 죽음이 자신으로 인해 얼마나 고민했었는지는 절절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참… 바보 같은 분이군요. 당신께서는.”
“미안해…”
참 멀리도 돌아왔다.
모든 일을 알게 된 시점에서 형진이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바로 그 생각이었다. 어찌 보면, 좀 더 간단하게 해결될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멀리 돌아와 버렸다고 해야 하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공포와 죽음은 유독 형진에게 무른 면이 있었다.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 정도의 잘못을 저질러도 야단을 치거나 정 보다 못해서 천벌을 한두 번 때린 것이 전부일 정도다. 다른 집행자들에 비해 특혜를 많이 받았던 것도 따지고 보면 이런 일련의 과정들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입술을 깨문 채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하고 치마 자락만 움켜쥐고 있는 아란의 모습에 형진은 쓴웃음을 지어 버렸다.
공포와 죽음에게 있어 아란은 지우고 싶은 과거였는지도 모른다. 그에 반해 제랄딘은 이루고 싶은 미래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착해 빠진 여신은 과거의 흔적인 쌍둥이를 비롯해, 충분히 지울 수 있었던 자신의 과거를 모두 부둥켜안은 채 살아왔다. 책임감이 너무 강하다고 해야 하나. 만약 그녀가 희망과 생명이나 허세와 망상 같은 존재였다면, 이런 식으로 고민하고 번민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모른 척 과거의 일을 지우고 뻔뻔한 얼굴로 모르는 일이라 강변했으면 그만이었을 테니까.
그런 생각을 떠올리자, 형진은 혼란스러웠던 기분이 차츰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가만히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진다.
“…”
모든 것을 털어놓고, 이제 단두대 앞에 선 사형수의 마음으로 형진의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던 공포와 죽음은 자신의 머리 위에 손이 얹어지자 가늘게 몸을 떨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쩌면 이것 또한 영악한 그녀의 연기일지도 모른다.
형진의 뇌리에서는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이내 그는 고개를 저어 버렸다. 자신이 보아왔던, 느껴왔던, 경험했던 그녀들이 모두 거짓은 아닐 것이라고 자신을 설득했다.
공포와 죽음, 그리고 아란과 제랄딘이 사실상 모두 동일 인물이라는 것은 역시 충격적이지만, 따지고 보면 미엘이나 하엘과 그리 다를 것도 없는 경우다. 게다가 이 여자 저 여자 마구 품으로 끌어들이는 자신 역시 그리 떳떳하지는 않다. 아무리 일부다처가 용인되는 세상이라도, 자신은 좀 많이 헤픈 쪽 아닌가. 오히려 이런 자신을 용납하고 받아들여 이렇게 오랜 시간을 한결같이 사랑해준 것을 고마워해야 할지도 모른다.
“후…”
형진은 가볍게 한숨을 몰아쉬며 아란의 머리를 자신의 품에 안았다.
“진?”
떨리는 그녀의 음성이 가슴에 직접 닿는다. 형진은 그녀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화가 나네요.”
“…”
“왜 좀 더 일찍 당신을 만나지 못했을까. 그래서 화가 납니다. 만약 그랬더라면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칠 필요도 없었을 텐데.”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러자, 공포와 죽음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쉴 새 없이 미안하다는 말을 되뇌이며 그의 가슴에 기댄 채 펑펑 울음을 터트렸다.
============================ 작품 후기 ============================
두편째.
다리에 쥐가 났…
뜨허어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