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599
00599 136. 격돌 =========================
갑작스럽게 현기증이 밀려온다. 파편에 섞여 있던 기억과 감정이 본래 그가 가지고 있던 그것과 뒤섞이며 약한 어지러움을 유발한 것이다.
자잘한 기억이나 감정들은 이내 바람에 흩날리는 모래처럼 풍화되어 사라져 간다. 하지만 그렇게 풍화되어 사라지는 기억들 속에서도 유독 한 사람의 얼굴만은 지워지지가 않는다.
“이게… 어떻게…”
잠시 넋을 놓은 것처럼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보고 있던 형진은 문득 위성의 재배치가 끝났다는 메시지를 보고서야 정신이 화들짝 들었다.
그렇다. 이곳은 파괴와 재생의 아바타가 직접 관리하고 있던 거점. 물론 파괴와 재생은 그의 일격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고 잠시 동안은 운신조차 어려운 상황이 되겠지만, 그가 다른 어떤 수단으로 형진에게 반격을 가하려 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 때문에 먼저 이 거점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장악할 필요가 있다.
위성의 재배치는 그것을 위한 수단이다. 궤도상에 인공위성을 배치하고 황혼의 결계를 펼쳐 두게 되면 상대가 다른 어떤 방법으로든 이곳을 넘보려는 시도를 할 경우 바로 형진이 감지할 수 있다. 설령 그 시도의 강도가 엄청나서 결계가 감당할지 못할 정도의 경우가 생기더라도, 최소한 은밀하게 뒤통수를 얻어맞는 일은 피할 수 있는 것이다.
형진은 일단 재배치가 끝난 위성들로부터 결계를 발동시켜 이 거점이 속한 행성을 에워싸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지는 상황을 살피며, 자신이 도달한 곳의 정보를 수집했다.
앞서 밤의 종족이 살던 곳과는 다르게, 이 행성은 본래부터 언데드의 영역에 속한 행성이 아니었다. 밝게 빛나는 태양이 존재했고, 다른 살아 있는 생명체들이 번성했던 흔적도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다. 음습한 검은 안개가 뒤덮어 버린 이 행성은, 이미 존재하는 모든 권역이 죽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형진이 보았던 고성 역시 이 행성에 존재했던 문명의 흔적이었지만, 지금은 모조리 썩어버린 시체와 언데드의 기운만이 가득한 폐허로 변해 있었다.
“후…”
형진은 일단 행성 전체를 결계로 에워싸는 일이 끝나자, 자신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주시자들과 밤의 종족으로 하여금 이 행성에 남아 있는 언데드의 잔재들을 일소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이미 살아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죽어버린 행성이지만 본래 생명들이 번성하고 문명을 꽃피우던 곳이었으니 잘만 가꾸면 다른 생명들을 위한 터전으로 되살아날 수도 있을 것이다.
곧바로 권역을 할당하여 순차적인 정화 작업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형진은 주시자와 밤의 종족들에게 작업을 할당하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형진의 주된 의식은 곧바로 왕성 라이언하트에 자리 잡고 있는 본신으로 옮아갔다. 아틀리에에서, 아이들을 위한 장난감을 만들고 있던 형진의 본신은 도저히 작업에 집중할 수 없음을 깨닫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틀리에를 나서서 주위를 둘러보자, 그가 찾는 얼굴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아이들이 노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그 모습을 보고 나니 어쩐지 살짝 화가 치밀었다. 이유는 몰라도 지금까지 자신을 이렇게 감쪽같이 속여 왔다는 것에 대한 분노다.
아니다. 어쩌면 이것은 자신의 진짜 감정이 아니라, 파괴와 재생의 파편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전이된 감정이 그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잠시 현기증을 느끼던 형진은 고개를 저어 다시금 떠오르려고 발악하는 상념들을 뿌리치고는 문제의 인물에게 성큼 성큼 다가가 손목을 콱 움켜잡았다.
“폐하?”
정원 한켠에 마련된 텃밭에서 아이들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모종을 심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던 그녀는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손목을 잡아채는 형진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잠시 얘기 좀 합시다.”
“네?”
형진은 상대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채 그대로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고 어디론가 향했다. 아기들은 아빠가 나타나자 언제나 그랬듯이 빠아거리며 날아가 달라붙으려고 했지만,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린 하엘과 미엘이 그것을 말렸다.
“폐하? 갑자기… 무슨…”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억센 손길에 그녀는 당황했다. 형진은 앞서서 성큼 성큼 걸음을 옮기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의 눈에는 살짝 두려움마저 섞여 있었다. 연기? 아니다. 그는 본능적으로 이것이 연기가 아님을 알아챘다. 그녀는 정말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일까. 설마 파괴와 재생의 잔꾀에 놀아나기라도 한 것일까.
“무슨 일… 이죠?”
“그게…”
형진은 그제서야 그녀, 아란의 손목을 꽉 움켜 쥐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는 얼른 힘을 풀었다. 그러자 그 찰나의 순간 발갛게 부어올라 버린 손목의 모습이 드러난다.
“미안.”
“아뇨. 괜찮아요. 이 정도쯤은…”
“이리 줘봐.”
형진은 자신이 지닌 회복의 권능을 발현해 아란의 손목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희망과 생명이 지닌 회복 능력만큼 효과가 탁월하지는 않았지만, 잠시 시간이 지나가 부어올랐던 아란의 손목은 이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걸까. 여전히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목을 쓰다듬고 있는데, 그런 그에게 문득 아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미안.”
“…”
형진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그 즉시 아란의 모습이 뭔가 바뀌어 있음을 이해했다.
그녀는 씁쓸한 표정으로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역시 뭔가를 본 모양이구나.”
목소리는 같지만, 말투가 다르다. 푸근한 기색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말투에 서린 기운은 그가 이미 수없이 들어봤던 그 인물의 것이 틀림없었다.
무엇보다도 눈동자에 서린 빛이 달랐다. 그 눈에서는 지금까지는 볼 수 없었던 신의 힘이 은은하게 배어나오고 있었다.
형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공포와 죽음… 이십니까?”
“…”
아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잠시 입술을 깨물더니 어쩐지 기운이 없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늦어버렸다고 생각하지만, 지금이라도 내 말을 듣고 싶다면… 다 얘기할게. 들어주겠어?”
“…”
그 목소리는 너무나 처연해서, 듣는 것만으로도 지금 그녀가 얼마나 심각한 감정의 부침을 겪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번에는 형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그녀를 데리고 다른 사람의 이목이 닿지 않을 법한 별궁의 방 안으로 들어가 주위에 결계를 쳤다.
아란은 침대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형진은 의자를 가져다 그녀를 마주보는 자세로 자리를 잡았다.
“어디서부터 얘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네.”
쓴웃음을 지은 채, 차마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아란의 모습을 바라보던 형진은 잠시 눈을 감고 뭔가를 생각하더니 이렇게 물었다.
“스스로 죽였다던 남편… 그 자가 바로 파괴와 재생이었던 겁니까?”
따지고 보면 그것이야말로 이 모든 일들의 시작.
아란은 잠시 입술을 깨물고는 양손으로 하얀 앞치마 자락을 꽉 움켜쥐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형진은 다시 물었다.
“그럼… 힘이 부족해서 그를 유혹한 뒤 암살했다는 것도…”
아란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맞아.”
그렇다. 그녀는 처음부터 자신의 일에 대한 것을 모두 밝혔던 것이다. 단지, 신들 사이에서 있었던 일이 아니라, 인간 버전으로 약간의 각색이 가미되었을 뿐이다.
아마도 당시에는 지금처럼 공포와 죽음이 강대한 힘을 지니고 있지 않은 상태였는지도 모른다. 아니, 힘은 있더라도 파괴와 재생을 능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럼… 아이들은…”
하지만 이상한 점이 있다. 두 신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라면, 마땅히 그들 또한 신성을 지니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이야. 평범한.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평범한 아이들.”
“네? 하지만…”
“신의 아이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아주 오랜 시간의 노력이 필요해. 하지만 태어날 아이를 신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면, 다른 평범한 인간들과 똑같은 과정을 거치게 돼. 물론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은 그저 평범한 인간 아이일 뿐이고.”
“…”
그제서야 형진은 얼마 전에 희망과 생명으로부터 들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신의 아이가 탄생하기 위한 과정. 그 과정에서 신의 결합으로 낳은 아이라도 평범한 아이가 탄생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얘기가 바로 그것이다. 그때는 그냥 별 것 아닌 일종의 가능성에 해당하는 얘기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 명확한 예시가 바로 코앞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에 그 얘기를 꺼낼 때 아란은 자신의 그 행동을 호구신의 사제나 할 법한 행동이라고 말했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스스로를 비하하나 싶었는데,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인가.
“그럼… 어째서 지금까지 잠자코 있었던 겁니까.”
“가장 큰 이유는… 아이들 때문이야.”
“아이들이요?”
“나는 그 아이들이 신과는 관련이 없는, 그저 평범한 아이들이기를 바랬어. 사실 아이를 잉태하고서도 많은 고민을 했었지. 이대로 낳아도 좋은 것인지, 낳으면 어떻게 키워야 할지. 그냥 낳지 않고 태어나지 못하도록 지워버리는 것이 맞는 것 아닌지.”
“…”
“하지만 난 결국 낳는 쪽을 선택했어. 그리고 결정했지. 앞서도 말했듯이, 이 아이들이 신과는 관련이 없는 그저 평범한 인간으로 살다 가기를 원했어. 그러자면, 아이를 키우는 어미인 나부터 평범한 인간이 되어야만 했어. 그래서 나는 이 아바타로 하여금 스스로 공포와 죽음임을 인지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해야만 했지. 그것이 바로 이 아란이라는 인격이 탄생하게 된 계기야.”
해리성 정체감 장애, 흔히 다중 인격 장애라 불리는 증상을 가진 이들 중에는 자신의 인격 가운데 하나가 한 일을 다른 인격이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공포와 죽음은 아마도 그와 같은 현상을 임의로 끌어내어 아란이라는 인격을 만든 것이리라. 물론, 그녀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는 전제 하에서의 얘기겠지만.
“그런 일이… 임의로 가능한 겁니까?”
형진의 물음에 아란은 대답했다.
“아직 네가 아바타를 운용하지 못하던 시기에, 그것을 운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것이 누구였지?”
“공포와 죽음이셨죠.”
공포와 죽음은 형진에게 인형술의 기초를 비롯해 완전히 신격이 갖추어진 상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바타를 운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바로 그 기술의 모태가 바로 지금 아란이라는 인격을 만든 기반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감쪽 같았던 거군요.”
남을 속이려면 먼저 자신부터 속이라던가. 아란 스스로도 자신이 공포와 죽음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형진이 무슨 수로 그것을 알아챌 수 있었겠는가.
형진은 잠시 이마를 감싸 쥐고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아란의 얘기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사실… 너에게 숨기고 있는 일이 한 가지 더 있어.”
“네?”
어쨌든 자신이 보았던 그 기억들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점과 함께, 사실은 오래 전부터 공포와 죽음이 자신과 함께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형진은 그렇게 밝혀진 사실들을 통해, 과거 자신과 아란 사이에 있었던 일을 반추하려다가 숨기고 있는 일이 그것만이 아니라는 그녀의 말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미안해. 전부 내 욕심이었어. 널 그리칸으로 떠나보냈던 것부터 시작해서 전부…”
“그게 무슨…”
“이런 더럽혀진 몸이 아니라,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너와 함께 하고 싶었어. 그래서… 그래서… 널 속였어.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아란은 그렇게 말하며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기 시작했다. 형진은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며 혼란에 빠졌다.
“자, 잠깐…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아란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형진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하나가 아니야.”
“하나가… 아니라면?”
“또 하나의 내가 너와 함께 하고 있었어.”
그 말과 함께 공간이 열리며 또다른 사람 하나가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바로 제랄딘이었다.
============================ 작품 후기 ============================
일단 한편.
안녕히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