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632
00632 144. 원정 =========================
알현을 지켜보고 있던 자들은 그와 같은 모습에 그런가보다 했지만, 오히려 놀란 것은 타스렐과 함께 왕성을 찾은 그의 동족들이었다.
타나토스에서 이렇게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는 풍습은 그리 흔하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또한 아니라고 할 수밖에 없다. 비록 굴욕적이라는 느낌이긴 해도 극상의 존경이나 복종을 뜻하는 의미로서 이런 행동을 취하는 경우가 간혹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저들은 은염랑이라는 이름의, 흑요호처럼 인간과는 다른 종족. 인간과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는 지 당장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흑요호와 마찬가지로 환수라 일컬어지는 종족이라면 어느 정도 비슷한 면이 있을 것이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종족이라면 일반적인 인간들과는 사고방식이나 풍습도 다를 테니 이런 식의 행동을 이상하게 볼 이유가 없는 것이다.
왕성 라이언하트에 사는 이들은 단순히 타나토스라는 하나의 세계를 넘어 지구를 비롯한 다른 세계의 문물마저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 보니, 그런 식으로 타스렐의 행동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막상 타스렐이 이끌고 온 이들은 자신들의 대표라 할 수 있는 그가 그토록 굴욕적인 행동을 취하는 것을 보고는 크게 놀라버렸다. 은염랑은 긍지가 높은 종족이고, 타나토스에 존재하는 다른 모든 종족보다 우월하다고 스스로를 평가하는 이들이다. 그런 종족의 수장인 타스렐이 처음 만난 이 앞에서 스스로 극상의 예를 취하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과한 예는 하지 않으니만 못하다고 했습니다. 그만 일어나시지요.”
형진은 좋은 말로 일어날 것을 권하면서도 그들의 태도를 보고 방금 전의 일이 일반적이지 않음을 바로 이해했다.
타스렐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지만, 여전히 고개를 조아린 채였다. 한번 굽히기로 한 이상 자존심 따위는 버리고 철저하게 굽히기로 한 모양이다.
생긴 건 늑대보다는 사자 같은 느낌인데, 그런 외모 만큼이나 꽤나 고집스러운 면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형진은 다시 질문했다.
“갑작스런 얘기라 조금 당황스럽군요. 좀 더 자세하게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러자 타스렐은 잠시 주위를 돌아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 일은 저희 종족에게 매우 중대한 비밀이라 함부로 발설할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자리를 조금 물려주셨으면 합니다.”
요컨대, 그는 지금 독대를 요청하고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지금 알현장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형진을 비롯해서 만남을 주선한 미엘과 하엘, 그리고 대외적으로 공작의 위치에 있는 오귀스트 정도가 전부다. 그 외에는 호위병인지 장식용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토끼들 뿐.
“여기 있는 이들은 모두 나에게 있어 중요한 이들입니다. 함께한 두 비는 말할 것도 없고, 오귀스트 공작 역시 마찬가지. 만약 독대를 한다 해도, 이후에 내가 말해버리면 그만인 것 아니겠습니까?”
“그건…”
타스렐은 낭패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형진은 그가 더 이상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고 다시 말했다.
“부탁을 하러 왔음에도 자존심이 먼저라면 아직은 스스로 해결할 방법이 있다는 뜻일터.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는 이만 물러가도록 하시오.”
지금까지 계속 존대를 하고 있던 형진의 말투가 하오체로 바뀌자, 타스렐은 화들짝 놀라 버렸다. 간접적으로나마 심기가 불편하다는 뜻을 내비친 것으로 보기에 충분한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드리겠으니, 제발 이대로 물러가라 명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간곡한 타스렐의 말에 형진은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것 같은 태도를 일단 누그러뜨렸다.
“그렇습니까. 그럼 어디 한 번 들어보도록 하죠. 구체적으로 나에게 어떤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까.”
군대일까. 아니면 자금일까. 하지만 단순히 그런 것을 원해서 찾아온 것이라면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 엘 파르드는 지금 한창 국력을 신장하고 있는 중이지만, 그 나라 자체는 아직 그럴 듯한 군대는커녕 제대로 세금을 걷지도 않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신의 입장에서 보면 돈보다 더 중요한 신앙과 공헌도를 모으고 있으니 굳이 세금을 걷을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인간의 시선으로 보기엔 참으로 기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형진은 이 타스렐이라는 인물이, 일반적으로 인간의 왕에게서 얻을 수 있는 무언가를 필요로 해서 자신을 찾은 것은 아닐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타스렐이 조심스럽게 밝힌 목적은 그의 예상과 그리 크게 어긋난 것이 아니었다.
“매우 죄송스럽고 황공한 일입니다만, 혹여 가능하시다면 여러 신께 저희 종족의 일을 알려 도움을 주십사 청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신… 입니까?”
“그렇습니다.”
“흠…”
확실히, 형진은 타나토스 안에 존재하는 그 어떤 국가들보다도 신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엘 파르드가 수복되고 난 뒤, 그곳의 통치를 사실상 신전 세력에 일임한 것 만으로도 그것은 명백하게 드러나 있는 사실이었다.
사실 방금 전부터 타스렐이 그토록 낮은 자세로 일관하기 시작한 것도, 직접적으로 그에게서 신의 자취가 강하게 느껴지고 있음을 확실하게 인지했기 때문이다. 늑대라는 종족명에서도 드러나듯이, 그들은 냄새가 기운의 종류를 파악하는데 있어 누구보다도 훌륭한 능력을 가진 존재들이었다.
“신이라 해도 한두 분이 아닙니다. 정확히 어떤 신께 연락을 취해야 하는 겁니까.”
형진의 말에 타스렐은 크게 반색했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반문으로도 볼 수 있는 말이지만, 또 한 편으로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간접적인 표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저희는 여러 신들 가운데 특히 허세와 망상님께 이 일이 알려지기를 원합니다.”
“네?”
이건 또 갑자기 엉뚱한 신의 이름이다.
“어렵겠습니까?”
예상치 못한 곳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온 이름에 형진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자, 타스렐은 불안한 표정으로 그렇게 되물었다.
물론 어려울 건 없다. 그는 지금 거짓된 천국에서 다른 신들을 갈구며 작업에 열중하는 중이고, 그가 부른다면 투덜거리면서도 달려올 수밖에 없는 입장이니까.
“어려울 것은 없습니다. 다만 예상치 못한 이름이라 조금 놀랐을 뿐. 뭐라 해도 타나토스에서 그분의 이름은 꽤 오래전에 잊혀졌기 때문에.”
그 말에 타스렐은 고개를 조아리며 답했다.
“아시다시피, 환수라 불리는 저희 같은 자들은 인간과는 다른 시간의 흐름을 살고 있는지라.”
“하긴. 그렇겠군요.”
멀리 볼 것도 없이 당장 그의 옆에 자리한 미엘이나 하엘만 봐도 그것은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이제는 형진이 그들보다 더 오랜 세월을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되어 버렸지만.
“그럼 허세와 망상님에게 어떤 부탁을 하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그건…”
이쯤 되면 알아서 신과의 만남을 주선해주지 않을까 싶었던 모양이지만, 형진은 할 말이 있으면 지금 다 하라는 식으로 그렇게 말을 건넸다. 타스렐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어쨌든 상황의 주도권은 이미 형진에게 넘어가 있는 터라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허세와 망상께서는 다른 세계를 능히 오가실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은염랑의 고향이란 곳은 타나토스가 아닌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겁니까?”
“그렇… 습니다.”
다른 이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던 비밀이 무엇인지 이제 형진은 대략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세계에 있는 은염랑의 고향에서 벌어진 일을, 당신들은 어떻게 알고 있는 겁니까.”
“그것은…”
그렇다. 다른 세계라는 표현은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인 관용어구로서의 표현이 아닌 이상, 적어도 타나토스나 지구처럼 완전히 서로 별개라고 할 수 있는 공간에 존재하는 그런 세계들 정도는 되어야 비로소 이런 표현을 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머나먼 세계의 일을 저들은 과연 어떻게 알고 이렇게 자신을 찾아와 도움을 청하고 있는 것일까. 스스로 오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정말로 은염랑의 고향이라는 곳에 갈 수 있을지 어떨지조차 확실치 않은 허세와 망상의 능력을 빌리고자 이런 식으로 어려운 걸음을 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은염랑은 어떤 식이 되었든 다른 세계에 있는 동족들과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된다. 아마도 저들이 다른 이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던 부분은 바로 이것일 것이다.
세계의 구분을 막론하고 정보를 주고 받을 수 있는 능력이란 것은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장 전략적인 식견이 조금이라도 있는 자들이라면 그들의 능력을 탐낼 것이 당연한 일. 게다가 이런 은염랑들이 모여사는 고향마저 존재한다면, 그것에 욕심을 내는 자도 없을 거라 말하기는 어렵다. 다 큰 은염랑이라면 몰라도, 어린 은염랑들을 납치해서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길들이려는 시도 정도는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일이니까.
형진이 지그시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자, 결국 타스렐은 별 수 없다 싶었는지 자신들의 능력을 털어 놓았다.
“사실… 저희들은 ‘소통’과 ‘교류’라고 불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운을 뗀 타스렐은 자신들이 지닌 것이 어떤 능력인지 대략적인 설명을 이어갔다.
앞서 형진이 추측한 대로 소통은 기본적으로 은염랑이 같은 종족들끼리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능력이다. 이것을 통해 은염랑들은 여러 세계에 흩어져 있는 종족들끼리 서로 정보를 주고받으며 하나의 종족으로서의 동질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은 희망과 생명 재단에서 사용하고 있는 회합장처럼 집단지성을 구가할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통신 수단은 아니다. 그저 간단하고 짧은 메시지 정도를 교환하여 안부를 묻는 정도가 고작이니까.
정말로 은염랑으로 하여금 하나의 종족으로서의 동질성을 지켜 나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은 이런 간단한 의사 소통이 아니라, 일정 주기마다 가능해지는 ‘교류’에 있었다.
“교류는 적정 연령대의 은염랑들이 자신의 반려를 찾기 위한 행위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은염랑들은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반려들을 자신의 세계로 불러들일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저희들이 계속 생존해 나가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적절하게 다른 혈연의 동족을 불러들이지 못하면, 수가 적은 저희들로서는 이내 피가 탁해져 멸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형진은 이들이 꽤 재미있는 종족이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매우 발전된 진화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각기 다른 환경에 적응하는 것으로 진화의 다양성을 획득하고, 이렇게 서로 다른 진화의 결과를 교류라는 방식을 통해 나눔으로서 종족 전체의 발전을 꾀하는 식이니 말이다. 당장 인간만 보더라도 서로 먼 혈통의 인간끼리 맺어지면 그만큼 우수한 형질의 자손이 태어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하지만 그런 생각들을 떠올리다보니, 문득 이들이 어떻게 그토록 다양한 세계에 흩어져 살 수 있게 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이것에 대해 질문하자 타스렐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저희도 정확히는 알지 못하는 일인지라…”
“그런가요.”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얘기는 대략 어느 정도 추측하는 내용은 있다는 뜻이겠지만, 형진은 그것까지 캐묻지는 않았다. 애초에 이 알현의 목적 자체도 은염랑이라는 종족에 대한 것을 심문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궁금증을 해결하는 것도 좋지만, 당장 이들에게 시급한 건 은염라의 고향이라 불리는 곳에 닥친 위기를 해결하는 일이니까.
“그럼 질문을 바꿔 보겠습니다. 그 고향이라는 곳에 어떤 위기가 닥쳐온 것입니까.”
“그건…”
“허세와 망상님께 전하기 위해서도 이건 알아야만 하는 부분입니다. 게다가 어떤 위기가 왔는지를 모른다면, 무작정 그곳으로 가는 통로를 열었다가 오히려 이 세계에 그 위기가 옮아오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
형진의 말에 타스렐은 입술을 깨물었다.
틀린 말이 아니다. 사실 은염랑의 고향에는 이곳보다 월등히 많은 동족들이 살고 있다. 사실 통로를 열어 달라고 부탁한 것은, 자신들이 그곳으로 가서 위기를 해소하겠다는 생각보다는 다만 몇이라도 살아남은 동족을 구출하고 싶다는 의도가 숨어있었다.
교류가 가능했다면 그냥 불러들이면 될 일이지만 그것은 적령기의 은염랑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고, 또한 모든 인원을 대상으로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신에게 도움을 청하고자 한 것인데, 예리한 안목을 지닌 이 젊은 왕은 그런 은염랑의 속내를 그대로 짚어내 버린 것이다.
결국 더 이상은 어쩔 수 없다 싶었는지, 타스렐은 은염랑의 고향에 닥쳐온 위기를 그에게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곳은 지금… 언데드의 힘에 잠식당하고 있습니다.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그곳에 있는 동족들을 구할 수 있도록 신께 말씀을 올려주십시오. 그들을 구하자면 한시라도 빨리 움직여야 합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부탁드립니다!”
============================ 작품 후기 ============================
일단 한편.
편안한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