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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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동행
자기 할 말만 다 해버리고 사람 당황스럽게 만든 다음 그냥 잠들어 버리는 거냐!
형진은 예상치 못한 일격에 잠시 황망한 기분을 느끼다가, 살짝 웃음기 서린 제랄딘과 미엘의 모습을 보고는 다시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크흠. 어쨌든… 일단 언제쯤 출발하는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저희도 준비를 해야 할 테니.”
그러자 곧바로 미엘이 묻는다.
“옷도 사주고, 신발도 사고 그러시게요?”
“…”
꼬맹이 마법사 주제에 눈을 반달로 뜨고 웃는 모습이 마치 좋은 얘깃거리를 건진 동네 아줌마 같은 느낌이다. 혹시 겉모습만 어린애고 속은 완전 아줌마라든가 그런 건 아닐까. 그러고 보니 전에 자기 무게가 천이라고 그랬던 기억이 불현 듯 떠오른다.
“피곤하시다면 방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
입은 전혀 웃고 있지 않은데, 눈만 살짝 웃으며 그렇게 진지하게 말하는 제랄딘의 모습도 만만치 않다. 여기서 정말로 방을 빌려달라고 했다가는 제랄딘까지 미엘처럼 눈이 반달 모양으로 변해버릴 것만 같다.
“크흠. 아닙니다. 그렇게까지 폐를 끼칠 수야 없지요.”
결국 그날의 만남은 거기서 끝을 맺고 말았다. 어차피 중요한 얘기는 다 했고, 유아를 식탁에 머리 처박은 채로 놔둘 수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손님이라도 있었다면 형진이 유아를 데려다 눕히든 뭘 하든 하는 식으로 잠시 자리를 비울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지도 않은 마당에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덕분에 저희들도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걸요.”
여러모로.
이래서 여자들 모인 곳에 남자 하나 덜렁 있으면 바보 되기 딱 좋다는 얘기가 나오는 건가.
무표정한 것 같은데 눈만 웃고 있는 듯한 제랄딘의 모습에 형진은 다시 속으로 끙 하는 소리를 내고는 유아를 부착한 채 마차에 올랐다.
두 사람을 태운 마차가 저택을 빠져 나가자, 미엘은 문득 제랄딘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가씨.”
“응?”
“저런 모습 보면, 한번쯤 연애라는 거 해 보고 싶다는 생각 안 드세요?”
“글쎄.”
한번쯤이라면 생각이 없진 않다. 하지만 그 한번쯤이 생각처럼 그렇게 간단하게 매듭지어질 것 같지 않으니 문제다. 상대가 누구이건 간에, 신분이 높으면 높다고 낮으면 낮다고 다른 이들로부터 주목을 받게 될 터. 과연 그 만남이 그냥 한번쯤 사로 기분 좋게 만나는 정도로 끝날 수 있을까. 어림도 없는 얘기다.
“들어가자.”
“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날씨는 추운건지 모르겠다.
제랄딘이 미엘과 함께 다시 안으로 들어갈 즈음, 형진은 자신의 무릎에 얼굴을 기댄 채 잠들어 있는 유아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인님 다리 저리다. 그만 일어나라, 바보 메이드.”
“…”
아침에 잠 깨울 때처럼 호통을 치면 몰라도 그렇게 속삭이듯 말해서야 이 잠꾸러기 메이드가 깨어날 리가 없지 않은가.
형진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흐트러진 유아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넘겨 가지런하게 정돈했다. 그러다가 살짝 장난기가 돌아 깻잎머리도 만들어보고 이리저리 우스꽝스러운 머리 모양을 만들어 봐도 유아는 간지럽다는 듯이 음냐거릴 뿐 깨어날 생각을 않는다.
“너 나 없을 때 술 먹지 마라.”
이번엔 조금 큰 소리로 말했다.
“네…”
그러자, 유아는 마치 잠꼬대를 하듯 형진의 말에 답했다.
혹시 잠에서 깬 거 아닌가 싶은 생각에 다시 기척을 살펴봤지만, 역시 잠들어 있는 것 맞다. 순간 가슴이 덜컥 했던 형진은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애초에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마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집에 도착했다. 공주님 안기로 유아를 안아든 채 형진이 마차에서 내리자, 마중을 나온 카트린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언니, 어디 아파요?”
“아닙니다. 그냥, 좀 술에 취해 자고 있는 것 뿐입니다.”
“아하.”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픈 게 아니라니 다행이다 생각하며 카트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형진은 마부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건네고 돌려보낸 뒤, 유아를 이층의 그녀 침실에 데려다 눕혔다.
그냥 침대에 눕혀 놓고 나가려다가, 지금 그녀가 입고 있는 것이 아끼는 옷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어째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가죽 갑옷보다는 좀 벗기기 편하려나.
어째 역할이 반대가 된 것 같다는 소리를 꿍얼거리며 악전고투 끝에 드레스를 벗기고 잠옷으로 갈아입힌 다음 침대에 눕혔다. 이 곰탱이 메이드. 그 정도면 일어날 법도 한데, 완전히 마음을 푹 놔버린 건지 코까지 골며 자고 있다. 못 말려.
문득 잠든 유아의 입술이 어쩐지 탐스러워 보인다. 형진은 잠시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고개를 숙이는 순간 입술이 닿기도 전에 유아가 속이 답답한지 큰 숨을 내쉬었다.
“후우우우우…”
순간 술냄새가 확 하고 형진의 얼굴로 끼얹어진다.
“…”
잠시 눈을 감은 채 자신의 후각을 괴롭히는 그 미묘하고 아스트랄한 향기를 견뎌내던 형진은 결국 한숨을 푸욱 내쉬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잘 자라.”
화풀이로 유아의 머리에 꿀밤을 살짝 먹인 형진은 그 말 한 마디를 남기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촛불을 끄고 방을 나갔다.
그리고 다음날.
“언능 못 일어나!”
“꺅!”
어제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둘의 아침은 여전히 마찬가지다. 아니, 조금 다른 점이 있긴 하다. 그거 얼마나 마셨다고 생전 처음 겪어 보는 숙취에 골골거리며 아래층으로 내려온 유아의 모습 정도가 고작이긴 하지만.
“마셔.”
“네.”
얼굴은 부스스하고 머리는 푸석푸석하고. 누가 보면 한 4차까지 풀로 뛰고 아침에 막 출근한 샐러리맨쯤 되는 줄 알겠다.
“크으.”
“…”
자신이 건네준 꿀물을 마시며 그렇게 탄성을 지르는 그 모습이라니. 형진은 속으로 혀를 차며 다시 말했다.
“오늘은 신전에 다녀 올 거야. 그렇게 알고 준비해.”
“신전이요?”
“맡길 일도 있고. 이달 치 입금도 하고 겸사겸사.”
“아하.”
그런가 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꿀물에 입을 가져가려는 유아 앞에 작은 동전 주머니 하나가 툭 하고 떨어진다.
“?”
꿀물 그릇을 입에 문 채 이게 뭔가요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형진은 카트린을 위한 요리를 만들면서 모르는 척 말을 건넸다.
“월급까지는 아니고. 그냥 용돈이다 생각하고 받아.”
“월급이요?”
이게 웬 뜬금없는 일인가 싶은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형진은 눈을 맞추지 않은 채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말을 이었다.
“개인적으로 꼭 필요한 거라든가, 사고 싶은 거라든가. 그런 거 있을 거 아니야. 그런 데다 쓰라는 거야. 괜히 돈 생겼다고 신전에 홀라당 기부하고 그러면 혼날 줄 알아.”
“아, 알았어요.”
찔끔하는 모습을 보니 정말 그런 생각을 떠올린 모양이다. 누가 호구신의 사제 아니랄까봐.
유아는 눈앞에 놓인 돈주머니와 형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갑자기 이게 웬 돈인가 싶기도 하고, 혹시 어제 초대 받아 간 공녀의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싶기도 하고. 뭔가 기억이 날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영 아리송하다.
자신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힐끔거리는 유아의 시선을 무시한 채 형진은 크루그와 카트린에게 요리를 덜어주며 말했다.
“제랄딘 공녀의 초대로 수도에 갈 일이 생겼는데, 같이 가지 않을래?”
그 말을 들은 카트린은 곧바로 오빠에게로 시선을 돌렸고, 그 시선을 받은 크루그는 작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형진에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도록 하죠.”
의외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선선히 대답하는 크루그의 모습에 형진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딱히 일의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하는 그로서는 거기서 더 이상 사고를 진전시키지 못했다.
식사가 끝나자, 형진은 유아를 데리고 오랜만에 신전을 방문했다.
“어서 오십시오.”
인사를 하던 사제의 눈이 푸석푸석한 얼굴의 유아에게로 향하더니 형진을 향해 의외란 시선을 던진다. 정확히 의미는 모르겠지만, 호구신의 사제에게 이런 시선을 받으니 어쩐지 기분이 나쁘다.
“뭔가 묻었나요?”
“아닙니다. 그냥 의외로 생각보다 힘이… 크흠, 아무튼 들어가시죠. 날씨도 쌀쌀한데.”
“…”
최소한 덩치값 내지는 허우대 같은 얘기가 나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인가. 어쩐지 신전을 중심으로 엉뚱한 소문이 막 퍼져 나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오랜 만이군요.”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고사제와 간단히 수인사를 나눈 형진은 우선 이전에 약속했던 금액을 전달했다.
“이건… 아직 날짜가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그렇지 않아도 슬슬 운영 자금이 부족해지는 시점이라 반색하면서도 고사제는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그렇게 물었다.
“실은, 저희가 잠시 수도로 가게 되었습니다.”
“아, 그래서군요.”
“네. 혹시 어떻게 될지 몰라 일단 다음 달 것까지 같이 담았습니다.”
“어머나.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고사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얼른 돈주머니를 품 안에 챙겨 넣었다. 역시 궁하긴 궁했던 모양이다.
일단 이것으로 가장 중요한 용무는 끝이 났지만, 형진에겐 아직 용무 하나가 더 남아 있었다.
“감사합니다. 희망과 생명의 축복이 두 분께 계속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렇게 둘에게 축복을 내려주는 고사제를 향해 형진은 입을 열었다.
“혹시 괜찮은 아르바이트, 아니 괜찮은 일을 해보실 생각 없으십니까?”
“일이요? 무슨…”
형진은 품 안에서 병사용 전투식량의 용기인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상자를 꺼냈다.
“이걸 만드는 겁니다. 보시다시피 자작나무 껍질로 만들어진 물건입니다. 재료는 공급을 해드릴 테니, 그냥 시간 날 때 아이들이랑 함께 쉬엄쉬엄 만들어서 납품해주시면 제가 모두 사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얼마나 만들면 되는 건지요.”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렇다고 아이들을 다그치라는 말씀은 아니지만요.”
살펴보니 만드는 것 자체는 아이들이라도 그리 어렵지 않을 듯 하다.
고사제는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이렇게 물었다.
“그럼 신전의 아이들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 일을 좀 맡겨도 되겠습니까?”
“규격대로만 만들어서 납품해주신다면 그런 부분은 상관없습니다만, 다른 사람이라면 누굴 말씀하시는 건지.”
형진의 질문에 고사제는 자애롭게 웃으며 대답했다.
“겨울철에는 일거리가 부족하기 마련입니다. 농사는 당연히 쉬고, 눈이라도 많이 내리거나 하면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요. 그런 사람들에게 일거리를 나누어 주면 어떨까 싶었을 뿐입니다.”
“아…”
그렇다. 굳이 농한기라는 말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겨울은 여러모로 사람이 움직이기에 좋지 못하다. 모험가들로 유명하다고는 하지만, 그리칸의 전체 인구 가운데 대다수가 그저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들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차피 많이 만들어 놓았다 한들 인벤토리에 쌓아놓으면 썩거나 할 리도 없으니 문제는 아니다. 무게가 문제긴 하지만, 미엘에게 부탁해 약식의 룬을 새기면 딱히 인벤토리가 아닌 창고에 쌓아놓더라도 얼마 동안은 문제가 없을 테고.
“알겠습니다. 그 문제는 고사제님께서 알아서 하십시오.”
형진이 흔쾌히 허락하자 고사제는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고 기뻐하며 웃음을 지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형진은 알지 못했다. 희망과 생명이라 불리는 호구신의 파급력이 얼마나 막강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