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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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동행
유아는 입고 있는 머메이드 드레스가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그 악몽 같은 요리 지옥으로 인해 다시 살이 좀 빠지긴 했지만, 이미 한 번 드레스 실밥을 터뜨린 전례가 있는지라 아무래도 방심할 수가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모델처럼 워킹을 연습한 적도 당연히 없고, 이런 식으로 귀족 가문에 초대 받은 것 자체가 처음일 수밖에 없으니 영 자세가 나오지 않는다. 누가 보면 바닥이 온통 미끄러운 살얼음판이라도 되는 줄로만 알 것 같은, 문자 그대로 엉거주춤이 어떤 댄스인지 여실하게 보여주는 걸음걸이다.
“잡아.”
“…”
그대로 놔뒀다간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만도 한 세월일 것 같아서 보다 못한 형진이 팔을 내밀었다. 유아는 놀란 눈으로 그런 형진을 바라보다가 어서 잡으라는 듯이 팔을 한 번 더 흔들어 보이고 나서야 마지못한 듯 그의 팔에 살짝 손을 얹었다.
“그냥 꽉 잡으라고.”
하지만 형진은 그런 유아의 손을 잡고 강제로 팔짱을 끼도록 만들었다. 무슨 막 소개팅에서 만나 내외하는 사이도 아니고 이꼴 저꼴 볼꼴 못볼꼴 다 본 사이끼리 뭐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유아는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가만히 헛기침을 하더니 역시나 마지 못 한 척 은근히 형진의 팔에 몸을 기댔다.
그런 유아와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길게 늘어뜨린 드레스 안에서 도대체 발이 어떻게 움직이는 건지 한 번 보고 싶을 정도로 자연스럽고 우아한 걸음으로 앞서 가는 제랄딘을 따라 현관으로 들어서자, 남은 장식품이 별로 없어서 썰렁한 형진네 저택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화려한 홀이 모습을 드러낸다.
“와아아…”
이게 제대로 된 귀족 가문의 현관홀이구나 하는 느낌에 유아는 전혀 우아하지 못한 모습으로 입을 쩍 벌리고 감탄하느라 정신이 없다. 반짝거리는 샹들리에 조명 아래서 각양각색의 아름다운 회화와 초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방금 꺾어 장식한 것처럼 보이는 싱그럽고 아름다운 꽃내음이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과연.”
유아가 단순히 그 화려함에 도취되었다면, 형진은 좀 더 세세한 부분을 살펴보고 있었다. 회화의 기풍이나 집안을 장식한 조각품의 모습들 같은 것이 바로 그런 부분이다. 이 세계에 온지 꽤 시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곳에서 유행하는 예술 사조의 분위기를 경험한 적이 없는 탓에 형진으로서도 이러한 미술품 관람은 꽤 유익한 시간이라 할 수 있었다.
“이쪽입니다.”
제랄딘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곳은 일종의 살롱이었다. 살롱이라고 하면 응접실이나 객실을 뜻하는 말이긴 하지만, 이곳은 형진의 집에 있는 응접실처럼 몇 사람 정도 모여서 대화를 나누는 정도의 그런 공간이 아니라, 십여 명 이상이 편하게 여기저기에 자리를 잡은 채 삼삼오오 서로의 취미 같은 것에 대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그런 공간이다.
그들이 들어서자 악기를 든 네 명의 연주가가 조용한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유아는 살롱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들리기 시작하는 그 조용한 음악 소리에 다시금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다소 조촐하긴 합니다만, 오늘은 굳이 거창하고 화려한 그런 모임보다는 고생하신 두 분께서 편하고 안락하게 쉬다 가실 수 있는 그런 자리를 마련하고자 했습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화려하거든요. 이미 정신없을 정도로 화려하거든요. 눈이 뱅글뱅글 돌아갈 것만 같거든요!
“…”
형진이 옆을 슬쩍 보니 어쩐지 유아의 눈빛을 통해 그런 속마음이 텔레파시처럼 전해져 오는 듯한 느낌마저 들 정도다. 살찐다면서도 꾸역꾸역 먹어대는 그 모습만으로도 이미 범상치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눈빛으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능력까지 얻었을 줄이야.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만들었는지 살짝 궁금해질 정도로 푹신한 소파에 형진과 유아가 자리를 잡고 앉자, 제랄딘은 미엘을 향해 살짝 눈짓을 보냈고, 마치 릴레이 하듯이 미엘이 다른 시녀들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향긋하고 정갈한 냄새를 풍기는 음식들이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진님에 비하자면 보잘 것 없는 솜씨이긴 합니다만, 모쪼록 즐거운 시간이 되시길 빕니다.”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시녀가 다가와 잔을 채워주자, 그 향긋한 내음만으로도 이미 유아는 감동해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다.
술이라… 이것도 한번 만들어 보고 싶기는 한데 영 여건이 되질 않는다. 장류는 이번에 전투 식량 납품을 하는 와중에 겸사겸사 만들어 보긴 했지만, 술은 아직 시작해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 사실 술로 잡내를 없애고 향미를 돋우는 요리 방식은 어디서든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요리에 따라 쓰이는 술도 다양해서 제대로 갖추려면 이것도 꽤 힘든 일이다.
향긋한 식전주로 입술을 살짝 적시고 나니 애피타이저가 나온다. 메뉴는 얇게 썬 빵이나 부드러운 비스킷 위에 과일이나 샐러드를 얹은 카나페. 부담도 없고 간단하게 즐기기에 적합한 요리다.
“우음! 맛있어요.”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얘한테 과연 맛없는 요리가 있기는 할까. 형진의 요리로 입맛이 꽤 고급이 되었을텐데도 어김없이 꽃밭을 노니는 리액션이 나오는 걸 보면 좀 신기하긴 하다.
잠깐. 꽃밭 리액션이라고?
형진은 유아의 모습을 보고 살짝 놀라며 카나페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그리칸풍 카나페’를 섭취하여 일정시간 능력치가 상승합니다.]역시나 만든 이의 솜씨가 숙련 단계에 이르렀음을 증명하는 메시지가 눈앞에 나타난다. 하지만 간단하면서도 묘하게 입맛을 살리는 이 맛은 전에도 한번 느껴본 적이 있는 것 같다.
“아, 그때 먹은 부르케스타.”
유아와 처음 그리칸 시내의 유명 음식점을 돌며 요리 탐방을 하고 다녔을 때, 처음부터 숙련 단계의 요리사가 솜씨를 부린 애피타이저가 나와서 살짝 놀랐던 기억이 다시금 떠오른다.
“바로 알아보시는 군요. 맞아요. 진님이 드셨던 그 애피타이저를 만든 요리사의 솜씨랍니다. 힘들게 섭외를 했죠.”
“아하.”
본래 제랄딘이 그리칸을 찾은 이유 중에는 전투 식량의 제작에 대한 탐색도 있었다. 당연히 그 지역의 실력 있는 요리사의 영입도 그러한 일의 과정 중에 포함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부르케스타를 먹은 건 또 어떻게 아는 거지.
어쨌든 조금 아쉽다. 도핑과 중노동의 여파로 유아의 재료 다듬는 솜씨가 날로 일취월장하고 있기는 해도, 재료 준비 외의 요리 자체는 혼자서 다 해야만 하기 때문에 조금 힘에 부치는 것을 느끼고 있었고, 그래서 적당한 실력을 갖춘 요리 보조의 필요성을 조금씩 느끼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어찌 버틴다 해도, 병사용 전투식량의 납품이 결정되기라도 하면 상당히 곤란한 지경에 빠질 수도 있으니.
하지만, 생각해 보면 숙련 이상의 실력을 갖춘 요리사가 과연 요리 보조로 올까 싶기도 하다. 까놓고 말해서 그 정도의 실력이라면 어디 가든 대접 받으며 자신의 요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득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 하지만 형진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결코 좋은 형태로 헤어진 것도 아닌 마당에 자기가 필요하다고 그냥 막 불러올릴 수는 없는 일이다.
아무튼 그렇게 오랜 만에 다른 사람이 만든 요리와 오랜 만에 들어보는 잔잔한 음악 연주를 즐기고 있자니, 문득 제랄딘이 은근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진님.”
“네. 공녀님.”
“혹시 수도에 올라가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수도요?”
말을 건넨 대상은 진이었지만, 화들짝 놀라 대답을 한 건 유아였다.
이 버릇없는 메이드 같으니라고, 어디 주인님이 대화하는데 끼어들어. 한 번 단단히 벌을 주든지 해야지 원.
“네. 어전 토너먼트는 군사적 성격이 강하긴 하지만, 한 편으로는 왕국 최고의 축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각지에서 날고 기는 기사들이 모두 모여 기량을 뽐내고, 그들이 모시는 각 지역의 귀족들 역시 자신들이 후원하는 뛰어난 예술가들과 함께 수도로 올라오기 때문이죠. 물론 요리사들도 마찬가지고요.”
“와아…”
유아는 뭔가 터무니 없는 상상을 하는지 살짝 몽롱한 표정을 지은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식사에 곁들여 먹으라고 나온 술을 홀짝 홀짝 계속 마셔대더니 아무래도 좀 취한 모양이다.
하지만 사실 끌리는 얘기인 것만은 분명한 일이다. 더구나 그렇게 모든 이들이 모여드는 자리라면 명장이 되기 위한 조건을 만족할만한 이벤트가 일어날 수도 있다. 장인도 분명 대단한 경지지만, 명장은 달성하기가 어려운 만큼 효과도 급이 다르다.
명장 단계가 된다고 버프 효과가 하나 더 늘어나거나 하진 않는다. 대신, 장인까지는 같은 효과를 지닌 버프는 무조건 하나만 남고 나머지는 사라져 버리는데 반해, 명장이 되면 이렇게 본래는 겹치지 못하고 하나만 적용되어야 하는 버프들이 확률적으로 중첩되어 버리는 무시무시한 효과가 있다. 다시 말해, 유아가 만든 식재료로 만든 음식에 무조건 붙은 생명력 회복 증가나 최대 정신력 증가 효과가 운만 좋으면 먹은 만큼 계속 중첩되어 버릴 수도 있다는 얘기다.
예를 들자면, 여섯 개의 음식으로 구성되는 병사용 전투식량의 경우, 생명력 회복 증가와 최대 정신력 증가 효과가 최대 6번 중첩 될 수 있다는 얘기다. 6중첩의 생명력 회복 증가라니. 물론 어디까지나 확률이니까 반드시 그런 일이 일어나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그쯤 되면 플라나리아까지는 아니더라도 어지간한 생채기는 났다는 사실을 인지하기도 전에 아물어 버릴 정도는 충분히 된다.
“그리고, 의뢰 등을 이용하면 멀리서도 새로운 주문 등을 할 수 있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진님이 직접 토너먼트 등을 관람하신다면 무엇을 더하고 빼야할지 좀 더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다소 번거로우시겠지만, 혹시 생각이 있으시면…”
“가겠습니다. 언제 출발할 예정이십니까?”
“예?”
좀 더 여러 가지로 형진을 설득할 궁리를 해왔던 제랄딘은 몇 가지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덜커덕 승낙해버리는 형진의 모습에 조금 당황했다.
“정말요? 주인님. 정말로 우리 수도에 가는 거에요?”
“그래. 바보 메이드. 그나저나 어쩐 일이냐. 네가 스스로 주인님이라고 날 부르고.”
“아이, 제가 주인님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아시면서어.”
하지만 제랄딘이 다시 뭐라고 하기도 전에 술기운이 올라왔는지 살짝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유아가 형진에게 아양을 떨기 시작한다. 살짝 알딸딸한 정도로 술기운이 올라왔나 했었는데, 알고보니 이미 살짝 맛이 간 모양이다.
놀랍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술을 좀 먹여 보는 건데.
“정말로… 수도에 가주시겠습니까?”
“네. 뭔가 문제라도?”
“아, 아닙니다. 그냥 너무 수월하게 승낙을 하셔서 좀 얼떨떨했을 뿐입니다.”
“어전 토너먼트가 자주 있는 일도 아니고, 제가 만든 음식들이 어떤 성과를 거두는지도 궁금하고, 수도에 모여든다는 예술가들에 대해서도 궁금하고, 수도라면 유행이나 기술에 있어서 가장 앞서가는 자들이 모여드는 곳일테니 그런 것도 궁금하고, 게다가 공녀님께서 초청까지 해주신다는데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
설득을 위해 준비한 말이 오히려 형진의 입에서 줄줄 나와 버리자 제랄딘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때, 유아가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주인님, 그럼 저 새 옷 사주시는 거에요?”
“옷? 웬 옷? 너 옷 많잖아?”
“아이, 그건 여기서 입을 옷이구요.”
“이런 된장녀 메이드 같으니. 내가 널 그렇게 가르쳤더냐?”
“네. 주인님한테 배웠어요. 맨날 그렇게 부려먹으면서 월급도 안 주는 주제에.”
“얘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너 내가 신전에 매달 얼마나 내는지 뻔히 알면서.”
“그건 신전에 내는 거지, 저한테 주는 게 아니잖아요. 저도 사고 싶은 물건이 있단 말이에요.”
“그게 뭔데?”
“주인님 신발이요. 옷도 달랑 정장 두벌 밖에 없는 주제에 그나마도 모험가들이나 신을 신발을 대충 닦아서 신고 다니잖아요. 봐요. 지금도 옷은 멀쑥한 주제에 신발만 그 모양이고. 제가 그런 거 볼 때마다 얼마나 속상한 줄 알아요?”
“어? 그, 그게… 그러니까.”
분명히 처음에는 자기 옷 사달라는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대화가 진행되다 보니 엉뚱한 방향으로 얘기가 흘러가고 말았다.
“와아… 아가씨, 이게 말로만 듣던 부부싸움이라는 건가요?”
“아마도 그런 거 같네요. 저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에요.”
“…”
귓속말을 나누는 척 하면서 일부러 다 들으라는 듯이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미엘과 제랄딘의 모습에 형진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크흠. 죄송합니다. 이 녀석이 술에 취한 모양이라.”
“안 취했거든요오오…”
끝까지 안 취했다는 말을 입에 담고는 있었지만, 유아는 어느 틈엔가 음냐음냐 소리를 내며 눈을 감은 채 식탁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