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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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동행
크루그는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오랜만에 듣는 자신의 풀네임이 너무 낯설게 느껴진 탓이다.
과거에 왕자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의 그는 왕자와는 너무도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고, 다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그야말로 이름뿐인 왕자인 셈이다.
사실 제랄딘과 크루그 사이에는 암묵적인 룰이 있다. 그것은 제랄딘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서로의 관계가 설정된다는 것이다. 제랄딘이 집행자의 모습이라면 그들은 그저 같은 일을 하는 동료이며 형제일 뿐이지만, 만약 그녀가 공녀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 마주하게 된다면 더 이상 형제가 아니라 엘 파르드 왕가의 잊혀진 왕자 크룩스크루드가 되어야만 한다.
이 암묵적인 룰이 실제로 적용된 것은 몇 번 되지 않는다. 크루그 스스로도 자신의 옛 신분을 떠올리게 만드는 공녀 모습의 제랄딘과 마주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제랄딘 역시 지금인 비록 잊혀진 왕자 신세라고는 하나 한때 정혼자로 물망에 오른 대상과 대놓고 마주하는 것은 껄끄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두 사람은 한때 가장 유력한 정혼 대상으로 서로가 지목되기도 했다.
제랄딘 쪽의 나이가 크루그보다 조금 많긴 하지만 신부 쪽의 나이가 조금 많은 정도는 가급적 자손을 빨리 보길 원하는 왕실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권장되는 일이다. 여자 쪽이 너무 어리면 아이를 낳는 일이 위험할 수도 있으나, 그 반대라면 남자 쪽이 성숙해진 시점에서 바로 합궁을 하여 자손을 잉태하더라도 출산에 아무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가문 자체로 놓고 봐도 라야바르트 왕국의 최고 가문이라는 지위는 다른 나라 왕실은 물론이고, 외왕내제 같은 구차한 체제가 아닌 진짜 제국 황실의 황비로 가도 부족함이 없다.
물론 정혼자 같은 이야기는 크루그가 잊혀진 왕자 신세가 된 시점에서 이미 흐지부지되어 버린지 오래다. 하지만 그런 과거 때문에 제랄딘과 크루그는 다른 집행자들에 비해 조금 더 친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더 어색한, 그런 기이한 관계가 될 수밖에 없었다.
“말씀하신대로 용무가 있어서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게 되었습니다.”
잠시 옛 기억을 떠올리던 크루그는 낮고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했다.
물론 크루그의 존재를 인지한 시점에서, 마차 안에는 밖으로 소리가 흘러나가지 않도록 도와주는 결계가 미엘의 손에 의해 펼쳐져 있었다.
“어떤 용무인지 듣고 싶군요.”
공녀 모습의 자신을 마주하는 것조차 껄끄러워 하던 크루그가 아니었던가. 제랄딘은 흥미로운 시선을 던지며 상대의 말을 기다렸다.
“수도로 가신다 들었습니다.”
하지만 크루그의 대답에 제랄딘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엿듣는 건 그리 좋은 매너가 아닌 것 같은데요.”
“사정이 급한지라 실례를 무릅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사과를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런데 그 얘기는 왜?”
“저희도 동행할 수 없겠습니까?”
“…”
문득 제랄딘의 표정이 심각해진다.
“뭔가 징후가 있는 겁니까?”
크루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저의 직감이 일단 이곳을 벗어나라 말하고 있어서.”
“흠…”
남자의 직감 따위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긴 하다. 하지만 눈앞의 이 소년은 오직 자신의 직감 하나로 무자비한 추격자의 손에서 도망쳐 나온 인물이다. 그것도 몸이 불편한 자신의 여동생까지 데리고.
처음 제랄딘이 자신의 나라에서 도망쳐 나온 오누이를 만났을 때만 해도 카트린의 상태는 굉장히 심각했다. 오빠를 제외한 다른 누구와도 눈을 마주칠 엄두를 내지 못했으며, 그 오빠에게도 말조차 제대로 못했을 정도였다.
그나마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지만, 딱히 외상을 입은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카트린은 스스로 걸음을 옮기는 것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여동생을 데리고, 이 소년은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때 추적자들의 눈을 피해 다른 나라로 도망친 것이다.
하다못해, 그때는 집행자조차 아니었다.
이쯤 되면 그까짓 직감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갈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차라리 예지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제랄딘은 떠올리고 있었다.
제랄딘은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까지 잠시 동행하는 정도라면 문제는 없습니다. 하지만 저와 함께 움직이는 것보다는 단둘이 움직이는 편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아직 소년인 것은 마찬가지지만 지금의 크루그는 이미 숙련된 집행자이다.
카트린을 돌봐야 하기 때문에 임무를 많이 수행할 수는 없지만, 실력만큼은 어디 내놔도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그런 그의 실력이라면 구차하게 이렇게 제랄딘에게 부탁을 하기 보다는 조용히 움직이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같이 동행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입니다.”
“…”
제랄딘도 미엘도 그 말을 듣는 순간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방금 전까지 대화를 나누었던 대상인 형진이다.
“어째서입니까.”
“여동생이 그분들을 좋아합니다. 그렇게 다른 사람에게 정을 붙인 것 자체가 오랜만의 일이고, 또 같이 있으면 여러 가지로 즐거워하니 이제 와서 떼어 놓기가 곤란하더군요.”
크루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이렇게 덧붙였다.
“게다가… 아직 형은 약합니다. 수련을 하고 있으니 조만간 집행자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실력이 되겠지만, 현재 상황에서 자칫 저의 흔적을 추격해 온 자들의 손에 걸리기라도 한다면…”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크루그의 말을 듣고 있던 제랄딘은 그제서야 잔잔한 미소를 짓는다.
“흥미롭군요.”
“무슨…”
“처음 만났을 때 왕자님께서는 저나 제 가문의 도움을 거절하셨습니다.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다고, 갚을 수도 없는 빚을 더 이상 지고 싶지 않다고 말씀하셨지요.”
“…”
크루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소년은 자신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지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한때는 그 사람들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갚을 수도 없는 빚을 떠안기고 죽어버리면 남겨진 사람은 어쩌란 말인가 하면서.
크루그가 빚을 지는 일을 싫어하는 건 그래서다. 혹시라도 자신이 미처 그러한 빚을 갚지 못할까봐 두려워서, 불운을 타고난 자신에게 빚을 지운 것 때문에 혹시라도 그들에게 불운이 옮아가지나 않을까 두려워서.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제가 형에게 좀 큰 빚을 지워둔 상태거든요.”
“…”
제랄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선선히 그의 요청을 수락했다.
“알겠습니다. 원래는 저 혼자 후딱 다녀올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덕분에 지루하고 따분한 여행이 좀 즐거워지겠네요.”
“허락해 주시는 겁니까.”
“네. 일단 조만간 진님을 초대할 생각이었으니 그때 의사를 물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토너먼트라든가 전투식량 같은 것을 핑계로 대면되겠지요.”
“무례한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대화가 끝나자 크루그는 인사를 하고 마차를 빠져나가려다가 잠시 멈칫하더니 이렇게 한 마디를 더 건네고 나서야 모습을 감춘다.
“제가 그 분을 형이라고 불렀던 건 비밀로 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제랄딘은 그러마고 대답을 했지만, 크루그가 모습을 감추자 조금 즐거워진 표정으로 옆 자리에 앉은 미엘에게 말했다.
“난 남자를 그리 좋아하진 않지만, 저렇게 쑥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면 좀 귀엽다는 생각이 들곤 해. 내가 이상한 걸까?”
그 말에 미엘은 살짝 웃으며 답했다.
“이상하긴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걸요. 그러고 보면 좀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해요. 어디로 튈지도 모르고 까면 깔수록 새로운 것이 튀어나오는 양파 같은 느낌의 형과, 살짝 무심한 듯 하면서도 은근히 수줍음 많은 동생이라… 꺄아! 어쩌면 좋아. 망측한 상상을 해버렸어요.”
“…”
제랄딘은 붉어진 뺨을 손바닥으로 감싼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미엘의 모습에 조금 당황했다. 가끔 미엘은 이런 식으로 제랄딘이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하곤 한다.
어쨌거나 그렇게 다시 며칠이 지난 뒤 제랄딘은 약속대로 형진과 유아를 자신의 저택으로 초대했다.
“어때요. 어울려요?”
“그럭저럭.”
성의 없음이 여실히 느껴지는 형진의 대답에 유아는 입이 삐죽 튀어 나왔다.
“뭐에요. 그 성의 없는 대답은.”
그러자 형진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너 꼭두새벽부터 나 불러다 놓고 그 질문을 한 게 몇 번째인 줄 알아?”
“그야…”
사실 본인도 잘 기억이 안 난다. 제법 많은 것 같기는 하다 싶은 정도.
“누가 보면 무슨 왕실 무도회라도 가는 줄 알겠다. 어차피 조촐하게 가서 식사나 좀 하다 올 건데 뭘 그리 호들갑인지.”
그때 아침 식사후 소화도 시킬 겸 잠시 정원으로 오빠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 온 카트린이 예쁘게 차려입은 유아의 모습을 보고 감탄을 터뜨린다.
“와! 언니, 너무 예뻐요!”
“정말?”
“네! 마치 공주님 같아요.”
“아하하하. 아이,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면서 입이 헤벌죽 벌어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라 형진은 속으로 한숨을 푸욱 내쉴 수밖에 없었다.
“잘 됐네. 그냥 그걸로 입고 가면 되겠네.”
“네? 하지만…”
“정 안되면 그냥 확 벗겨 버리고 메이드복 입혀서 데리고 간다.”
잠시 아쉬운 표정을 짓던 유아는 형진이 그렇게 으름장을 놓자 화들짝 놀라며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 알았어요. 그럼 이걸로 할게요.”
유아를 당황하게 만든 것이 옷을 벗겨버린다는 말인지, 아니면 메이드복 입혀서 데리고 간다는 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잠깐의 소동이 끝나자 때맞춰 제랄딘이 보낸 기사와 마차가 도착했다.
“같이 갔으면 좋았을텐데.”
집에 남기로 한 크루그와 카트린을 보며 유아가 그렇게 아쉬운 기색을 보였지만,
“괜찮습니다. 두 분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시는데 방해할 수야 있나요.”
크루그가 그렇게 대답하자, 유아는 달아오른 얼굴을 양손으로 감싼 채 어쩜 좋아를 연발하기 시작한다.
“바보 메이드, 언능 안 탈거야?”
“타요. 탈거에요.”
마차 문을 열던 형진이 그렇게 외치자 유아는 화들짝 놀라며 얼른 달려가 그의 도움을 받으며 마차에 오른다.
“와… 우리 집 침대보다도 쿠션이 더 좋은 것 같아요.”
“그러네.”
유아는 이것저것 다 신기한 모양이었지만, 형진은 그런 외적인 부분보다 마차의 안정성 같은 부분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확실히 좋은 물건이긴 하네.”
이번에 직접 타면서 살펴보니 놀랍게도 이 마차는 서스펜션을 갖추고 있었다. 스프링을 달아 충격을 흡수하는 바로 그 장치 말이다.
물론 지구에서처럼 돌돌 말리는 코일 스프링을 사용한 방식은 아니다. 다소 투박한 형태의, 그것도 금속조차 아닌 나무 재질의 판스프링을 단 정도에 불과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 세계에 서스펜션 같은 것을 구현할 기술이 있다는 것 자체에 형진은 더 크게 놀라고 있었다.
“의외로 만만치 않을 것 같아.”
“뭐가요?”
“그런 게 있어.”
“…”
어쨌거나 그렇게 마차를 타고 달리다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제랄딘의 저택에 도착했다. 마치 놀이기구에서 내리기 싫어하는 아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유아를 억지로 잡아끌고 내리자, 제랄딘과 미엘이 시녀들과 이끌고 현관으로 나와 그들을 맞이한다.
“초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야 말로 초청에 응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자, 안으로 들어가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