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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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납품계약
하지만 놀람과 두려움도 잠시, 두 오누이는 이내 경악하고 말았다.
이미 몇 번이나 형진이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봤지만, 이건 그야말로 격이 달랐다.
오로지 요리의, 요리에 의한, 요리만을 위한 풀 도핑을 해버린 상태의 형진은 문자 그대로 완전히 딴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뿐인가. 유아 역시 자신들이 알고 있던 다소 맹한 메이드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눈에 불을 켜고 재료들을 손질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야채들이 물에 씻겨지고, 깨끗하게 닦여진다. 그렇게 목욕재계를 한 재료들의 껍질이 순식간에 벗겨지고, 다시 용도에 따라 조각이 나거나 채를 썰거나 소금에 절여지는 과정이 물흐르듯 이어진다.
“와아…”
좀 과장되게 말하자면, 재료들이 스스로 옷을 벗는 듯한 느낌이랄까. 어쩐지 그렇게 드러난 재료들의 속살이 야릇하게 느껴질 정도다.
처음에는 이게 뭔짓인가 싶었던 두 오누이는 그저 멍한 표정으로 두 사람이 요리를 만들어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요리를 만드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빠르게 시간이 지나가는 느낌이다.
“저… 도와드려도 되나요?”
멍하니 그렇게 지켜보기만 하는 것이 미안했는지, 문득 카트린이 손을 번쩍 들고는 그렇게 묻는다.
형진은 정신없이 손을 움직이는 와중에도 마치 조건 반사처럼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여기 만들어진 요리의 간을 좀 봐주시겠습니까?”
“그래도 되나요?”
“물론이죠.”
그렇지 않아도 침이 꼴딱 꼴딱 넘어가던 중이다. 차마 미친 듯이 일하는 형진과 유아의 모습에 대고 먹고 싶다는 말을 꺼내지 못하던 카트린은 형진의 허락을 받자 조심스럽게 음식의 맛을 보았다.
“으으으으음!”
두 손을 꼭 움켜지고 몸을 바르르 떠는 그녀의 모습에 형진은 씩 웃음을 지었다. 이렇게만 보면 참 보기 좋은 광경인데, 옆에서 지켜보는 크루그의 입장에서는 무서운 속도로 칼을 휘둘러 실처럼 가늘게 채를 썰면서 씩 웃는 형진의 모습이 조금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다.
다른 건 몰라도, 재료를 채 써는 저 칼 솜씨 만큼은 어디 잘 나가는 검성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한 나절이라는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저녁 무렵이 되고 해가 지고 나서야 비로소 그 광란의 시간은 끝을 맺었다.
“커헉…”
미친 듯이 재료를 손질하던 유아는 어느 시점이 되자 그렇게 피를 토하는 듯한 신음 소리와 함께 그대로 넉다운이 되어 버렸다. 어느새 볼이 쑥 들어가고 눈가가 거무스름한 것이 저러다 큰일 나는 거 아닌가 싶은 모습이다.
“녀석. 그래도 제법 실력이 늘었는 걸.”
하지만 똑같은 도핑을 했음에도 형진의 모습은 요리를 막 시작할 때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이 차이는 도대체 어디서 나는 걸까. 문득 크루그와 카트린은 자신도 모르게 형진의 모습에서 옛 동화 속에 등장하는 아이들을 데려다 살찌워서 잡아 먹는 아저씨의 얘기를 떠올리고 말았다.
그렇게 하루하루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계약이 맺어진지 삼일 후.
제랄딘 공녀는 형진과의 거래를 마무리 짓기 위해 다시금 외출을 준비했다.
“오늘은 어떤 드레스를 입으시겠습니까.”
시녀의 말에 버릇처럼 머메이드 드레스를 고르려던 제랄딘은 이내 한숨을 푸욱 내쉬며 그냥 평범한 에이라인 드레스를 선택했다. 모처럼의 승부복이지만, 두 번이나 입었는데도 아무 소용이 없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마차를 타고 형진의 저택으로 향하는 중에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제랄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번에 전투식량을 건네받으면 그것을 건네주기 위해 수도로 올라가야 한다. 잘은 모르지만 일단 올라가게 되면 아마 여러 가지 복잡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녀는 왕국에서 왕가 다음으로 영향력 있는 가문의 무남독녀 외동딸이니 그에 걸맞은 행보를 보일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녀를 짜증스럽게 하는 건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는 황자다.
왕국인데 황자라는 호칭을 쓰는 건 그녀가 속한 라야바르트 왕국이 외적으로는 왕을 칭하고 내적으로는 황제라 칭하는 외왕내제의 체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기사 왕국이라 불릴 정도로 강한 국력을 가지고 있으니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문제는 황족이랍시고 거들먹거리는 놈팽이들이다.
솔직히 이번에 집행자에게 처형당한 귀족 영애나 그 배우자가 되기로 정해져 있던 황자나 제랄딘이 보기엔 거기서 거기다. 귀족 영애는 직접 백성을 데려다 피를 뽑았고, 빌어먹을 황자놈은 은근슬쩍 고혈을 빨아먹는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니까.
사실 따지고 보면 고위귀족인 자신도 다를 바 없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유야 어찌 되었든 제랄딘은 그 멍청한 황자놈이 감히 자신을 넘본다는 사실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몸매를 위 아래로 훑어보며 군침을 흘리는 그 저열한 눈빛이라니. 생각만 해도 눈알을 뽑아버리고 싶을 정도다.
그래서 문제다. 이번에 올라가서 자칫 성질이 확 올라오면 정말로 일국의 황자를 암살해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공포와 죽음께서는 심심하다고 아무나 막 죽이고 다니지 말라 말씀하셨지만, 솔직히 이번에 수도에 올라가면 어떻게 될지 스스로도 예상하기 힘들다.
어쨌거나 그런 저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자니, 마침내 저택에 도착했다. 선두의 기수가 그녀의 도착을 알리자 문이 열리고 마차가 천천히 저택 안으로 움직인다. 여기까지는 이전과 다름이 없었으나, 문을 열어준 사람의 모습을 확인한 제랄딘은 순간 눈을 살짝 크게 뜨고 말았다.
“저 사람은…”
“조용.”
마찬가지로 크루그의 모습을 알아본 미엘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제랄딘은 그녀를 함구시켰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가만히 앉아 있다가 마차에서 내렸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역시나 오늘도 문득 얼굴에서 빛이 나는 듯한 느낌이 잠시 났다가 사라진다. 기이한 일이다. 도대체 어떤 이유에서 이런 느낌이 드는 걸까. 설마 낙인에 또다른 오류가 있는 건 아닐까.
어쨌든 응접실로 안내된 제랄딘과 미엘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오귀스트를 만날 수 있었다.
“반갑습니다. 자주 뵙게 되는군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하.”
살짝 힐난하는 어투로 말을 건넸지만 사람 좋은 오귀스트는 허허 거리며 그녀의 말을 받는다. 그런 식으로 수인사가 끝나고 자리를 나누어 앉자, 눈가가 시커멓게 죽은 유아가 비틀거리며 다가와 찻잔을 내려놓는다.
“제가 할게요.”
“죄,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가만 놔뒀다가는 비틀거리다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라 보다 못한 미엘이 일어나 유아 대신 차를 끓이기 시작한다. 형진 역시 안 되겠다 싶었는지, 유아에게 일찍 올라가 쉬라는 말을 건넨다.
“그럼, 우선 계약을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돈은 준비되셨습니까?”
“물론이지요. 전투식량은 어떻습니까.”
“당연히 모두 완성했습니다. 그나저나 무게는 괜찮으십니까?”
제랄딘에게 물었지만 대답한 건 미엘이었다.
“충분할 거에요. 저 무게 천 넘거든요.”
허걱. 천이라니. 도대체 뭘 해야 무게가 그렇게 늘어나는 거지.
잠시 놀라서 버벅거리던 형진은 나중에 비법을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말을 받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의뢰를 넣어 주십시오.”
“바로 넣도록 할게요.”
돈이야 얼마가 되었든 인벤토리에 넣으면 바로 개수가 확인이 되니 따로 세어볼 필요가 없지만, 전투식량은 꺼내고 다시 넣고 하는 식으로 건네받는 것 자체가 고역이다. 한두 개면 그런가 보다 하겠지만, 전부 다 해서 이천이백 개나 되는 분량이니 세는 것도 한세월인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잔머리를 굴리면 이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바로 집행자들의 의뢰 시스템을 활용하는 방법이 그것이다. 기사단의 전투식량을 몇 개 구한다는 의뢰를 넣고, 그것을 달성할 경우 보상으로 결제 대금을 넣으면 되는 일이니 아주 간단하게 거래를 끝마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차후 제랄딘이 다른 곳으로 가있는 상황에서도 활용이 가능하다. 따로 미엘이나 측근의 다른 사람을 보내지 않더라도 의뢰를 통해 얼마든지 주문을 넣을 수 있는 것이다. 편법이긴 하지만, 공포와 죽음께서 마련해 주신 이 훌륭한 권능을 쓰지 않고 버려서야 쓰겠는가.
사기 당할 위험도 없고, 신께서 직접 거래의 공증을 서는 것이나 다름 없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넣었어요.”
의뢰 목록을 뒤져서 미엘이 올린 의뢰를 수락하자, 인벤토리 안에 담겨져 있던 전투식량이 단숨에 사라지며 의뢰가 달성되었다는 메시지와 함께 투슨 은화 4400개가 인벤토리로 들어온다.
돈 벌기 너무 쉬운 거 아닌가 모르겠다. 물론 이런 말 하면 지금 자기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을 유아가 호구신의 사제 답지 않게 상소리를 내뱉으며 욕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좋은 거래였습니다.”
“저야 말로 좋은 거래를 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우선 첫 번째 일은 끝났다. 하지만 굳이 제랄딘이 이곳을 찾은 데에는 또 한가지 이유가 있었다.
“이것이 병사용 전투식량의 샘플입니다.”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용기에 담긴, 기사들의 전투 식량에 비해 훨씬 단출한 느낌의 요리가 테이블 위에 놓여진다. 메뉴는 모두 여섯 가지. 기사단의 전투식량에 비해 구성된 요리의 수도 적용 가능한 버프의 숫자도 반 정도밖에 안 되고, 가격은 십분의 일 수준으로 낮춘 염가판인 셈이다.
“이것은 요리 목록과 효과 일람입니다.”
제랄딘과 오귀스트는 서류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시험을 해봐야겠지만, 이 정도면 가성비는 확실히 월등하다고 볼 수 있다.
“시식해 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요리는 속이 든 빵과 튀김, 절임 같은 흔히 볼 수 있는 것들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역시나 장인급의 실력이 어디가지는 않는지 상당한 풍미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보들보들하게 익힌 찐만두를 먹었을 때 오귀스트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거… 술 한 잔이 생각나는 맛이군요.”
오물거리며 음식을 씹어 삼킨 제랄딘이 그 말을 받았다.
“곤란해요. 전투 직전에 병사들이 술을 떠올리거나 하면.”
“추운 곳에선 간혹 지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가요?”
“네. 물론 어지간히 추운 곳이 아니고서야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요.”
그렇게 제법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다시 백 개씩의 샘플이 제랄딘과 오귀스트에게 넘어갔다. 시험하기엔 다소 적은 양이지만, 일단 그 정도면 뭐가 더 필요하고 뭐가 그렇지 않은지 정도는 확인이 가능할 것이다.
“조만간 수도로 가게 될 것 같아요. 가기 전에 한번쯤 제가 머무는 곳에 초대하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어요?”
“저야 상관없습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요?”
“아무런 작위도 없는 제가 괜히 거처에 드나들었다가 구설수에라도 오르실까 두려워서 말입니다.”
물론 밀회를 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함께 자리할 것이니 일반적으로는 문제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사람 일이란 것은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일이고, 험담하기 즐겨하는 자들이 되도 않는 말을 지어낼 수도 있으니 괜히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러나 제랄딘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괜찮아요. 잊으셨어요? 제가 왜 그분의 성도가 되었는지.”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정략결혼이니 뭐니 해서 엮으려 드는 놈의 목을 따버리기 위해 성도가 되었다는 그 말, 여전히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나중에 초청장을 보낼게요. 괜히 시간 없다고 빼고 그러기 없기에요.”
“알겠습니다. 꼭 참석하도록 하지요.”
제랄딘과 미엘은 마차에 올라 형진의 저택을 떠났다. 그러나 마차가 정문을 지나고 큰 길로 들어서자, 제랄딘은 맞은편의 빈자리를 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만 나오시죠.”
그러자 비어있던 앞 자리에 신기루처럼 한 사람의 모습이 드러난다.
바로 크루그였다.
미엘은 조금 긴장한 표정이 되었지만, 제랄딘은 담담한 표정으로 자신의 앞자리에 앉은 소년을 향해 말을 건넸다.
“이 모습의 저에게 다가오셨다는 것은, 그럴 만한 용무가 있어서겠지요?”
제랄딘은 그렇게 말하고는, 크루그의 완전한 이름을 또박또박 입에 담았다.
“크룩스크루드 엘 파르드 왕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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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편과 58편에 국왕, 왕족이라고 언급된 부분은 황제, 황족으로 고칩니다. 자진납세 하는 셈치고 있다 한 편 더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