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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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납품계약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크루그였다.
크루그는 잠시 주위를 살피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진 남자들을 저택 뒤의 사용인 숙소로 옮겼다. 일정 권역 안의 경비를 도와주는 센티넬 스킬이 있긴 하지만 양동일 가능성 또한 염두에 둬야 하기에 저택 안의 건물로 데리고 들어온 것이다.
간단하게 심문을 해보았다. 하지만 예상대로 형진의 돈 냄새를 맡고 담을 넘은 얼치기 들이다. 물론 얼치기라는 건 어디까지나 크루그 같은 존재에게나 해당 되는 얘기. 만약 이 저택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저 평범한 인물들이었다면, 이들은 흉악한 강도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상해.”
하지만 심문을 마치고 강도들을 처리하고 난 뒤에 크루그는 어떤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냥 돈이 떨어진 뜨내기 모험가들이 우발적으로 저지른 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강도라는 건 생각처럼 그렇게 흔히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더구나 형진처럼 어느 정도 드러나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더더욱. 결국 누군가 의도적으로 정보를 흘려 뜨내기 모험가들을 움직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크루그의 직감이 틀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만에 하나를 생각하면 조심할 필요가 있다. 자신이나 카트린을 위해서라면 더더욱.
다시 날이 밝았다.
지난 밤에 저택 안에서 벌어진 일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형진은 어김없이 아침 수련을 마치자 유아를 깨우러 그녀의 방문을 열었다.
“…”
“…”
순간 형진의 눈에 들어온 것은 달덩이처럼 뽀얀 엉덩이였다. 모처럼 형진이 깨우러 오기 전에 일어나 속옷을 갈아입고 있던 유아는 노크조차 없이 문이 덜컥 열리고 형진이 모습을 드러내자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놀란 것은 형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잠시 멀뚱히 서서 눈앞에 드러난 달덩이 같은 엉덩이를 바라보던 형진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크흠. 미안. 생각보다 엉덩이가 예쁘네.”
“…”
“얼른 내려와. 할 일이 많으니까.”
그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문을 닫는다.
유아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놀라서, 다음에는 당황해서, 마지막엔 어이가 없어서.
생각보다 엉덩이가 예쁘다니. 이걸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유아를 그렇게 패닉 상태에 빠뜨려 버린 형진은 아침부터 좋은 구경을 했다는 생각과 다음에도 노크는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동시에 떠올리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어라. 오늘 무슨 날인가? 전부 일찍 일어났네.”
자신이 앉은 휠체어에 앉아 오빠와 함께 아침 햇살을 받으며 정원을 산책하고 있던 카트린이 형진을 알아보고 얼른 인사를 건넨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물론이죠. 안녕히 주무셨어요? 공주님.”
“네. 잘 잤어요.”
카트린과 인사를 나눈 형진은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주방으로 들어갔다.
“저, 어제 그거 또 해주세요.”
“어제 그거요?”
“빵에다 스프 담은 거요.”
“아하, 스프볼 말씀이시군요.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도록 하죠.”
오늘의 아침 메뉴는 스프볼과 팬케이크, 스크램블 에그, 베이컨으로 조합된 전통적인 브런치 메뉴다. 물론 이 전통적이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지구 어딘가의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 업체에 해당되는 얘기지만, 뭐 어떤가. 여기까지 와서 메뉴 도용했다고 따질 리도 없는데.
메이플 시럽 대신 꿀을 듬뿍 바른 팬케이크의 맛에 카트린은 몸을 바르르 떨며 대번에 감탄을 터뜨린다.
“우으으으읏! 달아요!”
아쉽다. 팬케이크라면 모름지기 단풍나무 수액을 졸여 만든 메이플 시럽이 제격인데. 근처에 설탕단풍나무가 있는지 미리 찾아봐야겠다. 미리 찾아놓을 수 있으면 봄에 수액을 채취해서 정제하고 졸이기만 하면 된다. 보관이 까다로운 편이긴 하지만 인벤토리가 있으니 그것도 큰 문제는 아니다.
모처럼 생각 난 김에 이런 저런 소스류도 미리 준비해 둘까. 장인의 스킬로 맛을 비슷하게 만들 수는 있지만 역시 전통적인 소스가 없으면 다소 부족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이번 기회에 발효가 필요한 소스나 장 같은 것도 미리 만들어서 묵혀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문득 팬케이크를 입에 물고 꿈나라를 헤매다가 간신히 빠져 나오던 유아와 눈이 마주친다. 잠시 몽롱한 표정을 짓고 있던 유아는 형진과 눈이 마주친 순간 화들짝 제 정신으로 돌아오는가 싶더니, 마치 삐쳤다는 것을 시위하듯 홱 하고 고개를 돌린다.
“앗!”
하지만 다음 순간, 입에 물고 있던 팬케이크가 고개를 돌리는 힘을 견디지 못하고 휙 허공으로 떠오른다. 자칫하면 장인의 손길로 빚어낸 명품 팬케이크가 바닥에 추락하는 참사가 발생하려는 바로 그 순간!
팍!
어디선가 뻗어 나온 포크를 든 손 하나가 허공에 떠오른 팬케이크를 단숨에 꿰어 버린다.
“오! 멋진데.”
“…”
자신의 방향으로 날아드는 미확인 비행물체를 단숨에 격추시켜 버린 그 손의 주인공은 바로 크루그. 어제의 일로 조금 신경이 곤두서 있던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본 실력을 드러내 보이고 만 것이다.
“여기요.”
쓸데없는 것을 꿰뚫고 말았다는 생각에 혀를 차고 있는 소년의 모습에 피식 웃던 형진은 바보 메이드를 향해 말했다.
“아무래도 모레까지는 요리에 전념해야 할 것 같아. 만들어야 할 것이 많아졌거든.”
“…”
농담이 아니다. 어제 말한 모레와 오늘 말한 모레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그 악몽 같은 짓이 하루 더 늘어나다니. 유아는 갑자기 땅이 푹 꺼지는 듯한 절망감을 느꼈다.
물론 포악한 주인인 형진은 그러거나 말거나 아침 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장 보러 나갈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
“오전 중에는 시장을 왔다 갔다 해야 하니까 둘이서 집 좀 보고 있어. 괜찮지?”
“네.”
크루그가 짧게 대답하자, 휠체어에 앉은 카트린이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건넨다.
“다녀오세요!”
“네, 다녀올게요.”
유아가 만사 포기한 표정으로 노새 녀석을 끌고 오는 모습을 본 형진은 쓸데없이 위엄 넘치는 표정을 하고 있는 노새 녀석에게 인사를 건넸다.
“잘 있었나. 벤틀리 노란투리스모군.”
“…”
물론 노새가 대답할 리 없다. 오히려 치켜든 손에서 풍겨지는 꺼림직한 기운에 인상을 쓰며 슬쩍 할 걸음 물러날 뿐.
이전처럼 비명 같은 울음소리를 터뜨리지는 않았지만 감히 주인을 몰라보고 인상을 쓰는 노새 녀석의 모습에 형진은 혀를 차고 말았다. 가는 얼굴이 고왔는데, 오는 얼굴이 똥 씹은 얼굴이라면 기분이 좋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네 주제에 노란투리스모는 무슨. 주인도 몰라보는 똥차 같은 놈.”
푸르르르.
노새는 억울하다는 듯이 그렇게 투레질을 했지만, 형진은 그러거나 말거나 앞서서 집을 나섰다.
크루그는 어깨가 축 처진 채 노새를 끌고 가는 메이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연신 손을 흔들고 있는 여동생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카트린.”
“응?”
“저 사람들 좋으니?”
카트린은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바로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아저씨 요리는 너무 맛있구, 언니는 너무 예쁘고 친절해.”
“그렇구나.”
형진이 들으면 난 또 아저씨냐 하면서 절망에 빠졌을 거라 생각하면서 크루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원래대로라면 다시 이곳을 떠야겠지만, 카트린에게 기껏 힘들게 정을 붙인 사람들과 헤어지라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어찌 보면 그까짓 정,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카트린에게 있어 이 두 사람은 그 날 이후 오빠인 자신 이외에 유일하게 정을 붙인 사람이다.
사실 조금 의심스러운 정황이 있다 뿐이지, 아직 확정적으로 뭔가 위험이 닥칠 거라 정해진 것은 아니다. 크루그는 그냥 자신의 직감이 조금 지나쳤을 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조만간 제랄딘을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한편, 시장에 나온 형진은 물 만난 고기처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다시 미친 듯이 식재료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유아는 이미 만사 포기한 듯한 표정이다. 말린다고 들을 사람도 아니고, 말릴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얼마 전 시장을 휩쓸다시피 했던 큰 손이 다시 출현하자 상인들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전에 사들인 물량도 만만치 않은데, 또다시 그런 식의 쇼핑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자 형진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손임을 알아챈 것이다.
이런 손님은 무조건 잡고 봐야한다.
“총각. 이게 말이지, 올해 막 거둬들인 콩이야. 어때. 참 씨알이 굵지 않아?”
“오. 좋군요. 말리기도 잘 말렸고. 훌륭합니다. 전부 얼마죠?”
“저, 전부?”
“네. 전부.”
텃밭에서 기른 것으로 보이는 콩 한 자루를 지고 나왔던 아줌마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혹시나 해서 말을 걸어 봤는데 단번에 장사가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돌풍처럼 시장을 휩쓸기 시작하자, 죽어나는 건 유아와 노새뿐이다.
“노란투리스모야. 힘들지?”
그새 또 형진이 부른 이름을 외웠나보다. 노새는 주제도 모르고 그 이름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푸르릉거렸지만, 유아는 한숨을 푸욱 내쉬며 푸념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넌 오전에만 좀 힘들면 그뿐이지. 난 이제부터 시작이야.”
결국 오전 중에 장보기가 끝나자, 집으로 돌아온 형진은 곧바로 점심 식사를 겸한 도핑을 시작했다. 이른바 요리사를 위한 무한의 리타이어 불가능 풀 도핑 세트다.
“윽…”
유아는 형진이 내놓은 요리를 보는 순간 눈앞이 아찔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장인급의 요리사가 만든 음식이니 당연히 맛은 있다. 하지만 일단 먹게 되면 어떤 꼴이 되는지 잘 알고 있으니 어서 먹으라고 향긋한 냄새가 손을 뻗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차마 손을 뻗지 못하는 것이다.
“뭐해? 할 일이 많아. 얼른 먹어.”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던 카트린이 묻는다.
“저도 먹어봐도 되요?”
“음… 공주님은 이걸 드리죠.”
형진은 요리사용 풀 도핑 세트의 음식 대신 다른 음식을 꺼내 주었다. 내막을 모르는 카트린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착한 아이 답게 투정 부리지 않고 형진이 꺼내준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시간 없다. 유아. 내가 먹여주리?”
“…”
유아는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음식을 입에 넣었다. 형진은 한다면 하는 사람인 걸 알기 때문이다. 실제로 장인에 도달한 바로 그 날, 형진은 살려달라며 울부짖는 유아를 강제로 도핑시키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제랄딘이 두 번째 이 저택을 방문했을 때 유아가 눈이 시커멓게 죽은 채로 맞이했던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천천히 음식을 씹는다. 하지만 미처 그 맛을 인지하기도 전에 유아는 자신의 몸이 거대한 화산으로 변해 대폭발을 일으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음식 안에 내재된 힘이 단숨에 폭발해 그녀의 감각과 정신과 신체를 요리에 최적화된 신체로 변모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 나도 시작해 볼까.”
유아가 음식을 입에 넣고 풀 도핑 상태로 접어들자, 형진 역시 음식을 입에 넣었다.
어찌나 강력한 힘이 솟아나는지 머리털이 올올이 곤두선다. 아쉽게도 황금색 痂은 뿜어져 나오지 않는다. 그랬으면 딱 초파리어인이었을 텐데.
“우오오오오오! 나의 이 손이 요리를 하라고 외치고 있다!”
“우아아아아아! 나의 이 손이 식재료를 손질하라고 외치고 있어!”
곧바로 형진과 유아는 넘쳐흐르는 힘을 감당하지 못한 채, 어쩐지 번쩍이 손꾸락이라고 후렴구를 넣어줘야 할 것 같은 고함을 광분해서 터뜨리며 요리를 시작했다. 맛있게 먹으며 감탄하고 있던 카트린과 크루그는 갑자기 변모한 두 사람의 모습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뭐야, 오빠. 이 분들 무서워.”
“…”
크루그는 문득 생각했다.
혹시 자신이 느낀 불길한 직감이 이 사람들이 지금 보여주고 있는 모습 때문은 아닐까, 그냥 카트린이 뭐라고 하든 간에 직감이 시키는 대로 조용히 이곳을 뜨는 편이 옳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생각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