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658
00658 148. 유적 =========================
헌신적인 신들의 도움으로 인해 부족한 인력의 수급이 완료되자 유적에서 발견된 유물의 분석 작업은 한층 가속화되었다. 물론 개중에는 못해먹겠다며 도망치려는 신들도 있었지만, 그런 신들은 계약을 수호하는 정의로운 신뢰와 헌신에게 몇 대 쥐어박힌 채 다시 작업장으로 끌려 와야만 했다.
“고마워. 덕분에 일을 진행하기가 아주 수월해졌어.”
형진의 치하에 신뢰와 헌신은 별 것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그 정도쯤이야. 대신 앞서 말했던 것은 어떻게…”
“물론 당연히 지켜야지. 인력도 충분히 채워졌으니, 수호자들에게도 2세대 비행형 퍼스널 모빌리티가 지원될 거야. 필요한 수량대로 생산 지시를 내렸으니, 조금만 기다려줘.”
“고맙다.”
당연한 일이지만 세상에는 공짜가 없는 법이다. 말 안 듣는 잡신들의 규율을 잡기 위한 수단으로 신뢰와 헌신을 끌어들인 대신, 집행자나 주시자들처럼 그들에게도 최신형 장비들을 지급하게 된 것이다.
“이게 바로 그 물건인가.”
“마음대로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게 해준다는, 바로 그것?”
“이젠 그 얄미운 집행자 녀석들도 따라잡을 수 있는건가.”
“훌륭해. 대단해. 역시 신뢰와 헌신님이셔!”
물론 집행자들의 이동 스킬은 단순히 빠르게 이동하는 것만이 아니라 순간이동 상태에서 일시적으로 무적상태가 발동하는 등의 효과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호버 보드만으로 그들을 따라잡기는 힘들다. 무엇보다도 단거리 접전을 위주로 하는 수호자들에 비해, 집행자들은 유저들의 플레이 스타일이 변화한 것과 같은 추세에도 어렵지 않게 대응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스킬들이 전승되어 왔다는 점도 큰 차이다. 그래서 2세대 호버 보드가 지원되더라도 당분간은 얄미운 집행자들을 완전히 따라잡기는 힘들겠지만, 뚜벅이 신세를 벗어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수호자들은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움리드의 마지막 생존자인 릴에게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요정 형태의 아바타가 주어졌다. 다만 신격이 없는 그녀로서는 아바타를 사용할 때 본신을 휴면 상태에 둬야만 하는 문제가 있었다.
“당신은 스스로가 움리드라는 사실이 싫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당신의 몸은 생각보다 훨씬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거대한 문명의 유일한 생존자라는 것 외에도, 움리드라는 종족이 살아있었다는 증거이니까요. 움리드는 종족 우월 주의에 심취한 나머지 유전적 다양성을 잃는 바람에 멸망했지만, 그들의 육체는 다른 종족에게 새로운 유전적 다양성을 부여할 수 있는 중요한 샘플이 될 겁니다.”
형진의 말에 릴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것이라면 이전에도 해왔던 일이니 별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요. 이런 보잘 것 없는 몸이라도, 쓰실 곳이 있으시다면 마음껏 써주세요.”
말 해놓고도 뭔가 뉘앙스가 이상하다 싶었는지 릴은 잠시 허둥거렸다. 듣기에 따라서는 이상한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물론 당신의 몸은 소중하게 다뤄질 것이고, 샘플등을 채취할 경우에도 반드시 당신의 참관 하에 이루어질 것을 약속드립니다.”
“그렇게 해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죠.”
움리드의 마지막 생존자 릴의 육신은 그렇게 해서 엘리시온에 보관되는 것으로 결정이 되었다. 물론 거짓된 천국이 아닌, 신들의 요람인 바로 그 엘리시온이다.
접속기를 머리에 쓴 본신이 천천히 잠들자, 한쪽에 준비해 둔 귀여운 드레스 차림의 요정 아바타 하나가 조심스럽게 눈을 뜬다.
“이상한 점은 없으십니까.”
-그, 그게…
릴은 아까와는 달라진 시야에 한 번 더 허둥거려야만 했다. 커다란 형진의 모습이라든가, 커다란 그의 목소리라든가, 몸이 작아진다는 건 단순히 육체가 작아지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도 함께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롬, 룸.”
-네, 폐하.
형진의 부름에 릴의 수발을 들던 요정들이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린다.
“너희들은 앞으로 릴님이 새로운 몸과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도와드리도록. 대신 당분간 다른 일은 하지 않아도 좋다.”
-네. 그렇게 할게요. 폐하.
“맡기겠다.”
그렇게 요정들에게 지시를 내린 형진은 여전히 새로운 몸이 주는 감각에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릴을 향해 말했다.
“이 둘이 앞으로도 당신을 도와주게 될 겁니다. 다만 앞으로 생활할 곳은 이곳이 아닌 제가 살고 있는 집이 될 겁니다. 이곳보다 지내기도 편하고 아름다운 곳이니 마음에 드실 겁니다.”
-감사합니다.
릴은 곧바로 형진에게 이끌려 왕성 라이언하트로 향했다. 아름다운 산호초에 마련된 고풍스러운 성의 모습을 보는 순간, 릴은 자신도 모르게 작은 탄성을 터트리고 말았다.
-너무… 아름다워요!
“그렇습니까. 만드느라 고생 좀 했죠.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앞서 말한대로, 왕성 라이언하트는 길드성보다도 훨씬 크고 아름다운 장소였다. 더구나 그곳에는 길드성에서 창문 너머로 훔쳐봤던 이들보다도 더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를테면 하루 종일 정신없이 왕성의 하늘을 날아다니는 열두 공주가 대표적이다.
“빠하하하하하!”
-예린 공주님! 일화 공주님! 천천히 가세요! 그러다 다치면 어쩌시려고!
아직 한 살도 안 된 주제에 언니가 되었다고 기세등등해진 미엘의 칠 공주들은 갈수록 대담해지고 있었다. 새로운 거처로 자리를 옮기고 잠시 아름다운 왕성의 모습을 감상하던 릴은, 저러다 큰일 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맹렬하게 왕성의 하늘을 쏘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에 절로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저, 저 분들은?
-아… 폐하의 자제분들이세요. 보시다시피 평범한 인간과의 사이에서 낳으신 분들이 아니라, 흑요호라는 환수의 피를 잇고 계시죠. 저래 보여도 아직 한 살도 안 되신 분들이에요.
-한 살도 안 되었다고요?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공주들 가운데 한 명이 인형처럼 품에 안고 있는 어떤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혹시 남자 요정인걸까. 릴의 수발을 들고 있는 롬과 룸의 경우도 그렇고, 왕성이라고 불리는 이 장소에 와서 본 요정들도 모두 여성형이었기 때문에 요정들은 전부 그런가보다 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남자 요정도 있었던 모양이다.
물론 그건 착각이다. 요정은 그녀의 생각대로 전부 여성형들 뿐이고, 다희의 품에 인형처럼 안긴 채 세상 다 산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그 존재는 요정도 아니고 무려 신이니까.
곧바로 그녀의 거처에 여러 가지 물품들이 배달되어 왔다. 요정 크기에 맞춘 여러 가지 가구부터 시작해서, 작고 귀여운 드레스와 속옷 같은 것도 하나 가득이다. 움리드의 성녀로서 지낼 당시 옷 같은 걸 입어 본 적이 없던 터라, 릴은 은근히 옷이라는 것에 대해 작게나마 욕심을 지니고 있었다. 단순히 입는 것을 넘어서, 스스로 그런 옷가지들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마저 품고 있을 정도다.
-흠, 당신이 새로 온 손님이신가요.
-그렇습니다. 반가워요. 릴이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저는 전대 요정 여왕인 람이라고 합니다.
-아, 그러시군요.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장난기 가득한 다른 요정들과는 어쩐지 분위기가 다른, 입고 있는 메이드복부터도 어쩐지 치렁치렁한 느낌이 가득한 그런 요정이다. 그래서 뭔가 특별한 요정인가 싶었는데, 역시나 지체가 높은 요정이었던 모양이다. 비록 전대라는 수식어가 붙긴 했어도 아무나 요정이라고 불리는 것은 아닐 테니까.
릴이 공손하게 인사하자 람은 오랜만에 자만심이 충족되었는지 매우 기뻐하는 표정을 지었다. 지켜보고 있던 롬과 룸이 얼른 릴에게 한 마디 건네면서 초를 치지만 않았다면 그녀는 더더욱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신경 쓰지 마세요. 지금은 그냥 평범한 요정일 뿐이니까.
-사실 여왕이라고 해도 별 거 없어요. 지금은 이미 폐하께 밀려나 버리기도 했고.
-그, 그런가요.
-쓰, 쓸 데 없는 소리 말아. 언젠가는 폐하를 홀려서라도 다시 그 자리를 되찾고 말테니까!
-말이 되는 소릴 해. 애초에 너랑 폐하는 사이즈가 틀리다고!
-맞아. 너 그런 소리 자꾸 하면 왕비님들한테 이른다.
-그, 그건…
람이 꼼짝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보며 릴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곳에서라면 이전과는 다른 즐겁고 활기찬 새로운 삶이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고 말이다.
릴의 일이 간단하게나마 마무리되자, 형진은 새로운 원정 준비를 서둘렀다.
“당분간은 일단 사태를 관망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형진이 다시금 원정을 준비하자 희망과 생명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어째서?”
“귀속시킨 티폰으로는 가장 깊은 어둠이라는 곳을 찾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잖아. 게다가 포트니아 테론이 어떤 존재인지도 아직은 모르는 일이고.”
파괴와 재생은 분명 위협적인 존재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젠 별로 위협적인 존재도 아니라고 희망과 생명은 생각하고 있었다. 신격이 자연적으로 치유되는 데는 상상 이상으로 오랜 시간이 걸리는 데다, 그 시간 동안 형진이 엘리시온의 잡신들처럼 손 놓고 허송세월만 보내지도 않을 것이다. 신격을 하나 밖에 얻지 못한 상황에서도 형진은 파괴와 재생을 몇 번이나 격퇴한 전력이 있는 상태. 비록 파괴와 재생이 온전하지 못한 상황이었다고는 하지만, 형진 역시 그건 마찬가지가 아닌가. 만약 서로 완전한 신격을 갖춘 상태에서 맞붙게 되더라도 형진이 질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게다가 이쪽은 유사 신격이라는 대비까지 하고 있는 중이다. 만에 하나 일이 잘못 되어 형진이 일시적으로 패배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신격이 뜯겨 나가고 그것으로 인해 고통 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에 반해 파괴와 재생은 어떤가. 한 번이라도 패배하는 순간 신격이 뜯겨져 나갈 것이고 그것은 이전에 그가 겪었던 연쇄적인 패배의 수순을 다시 잇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이미 상황도 시간도 형진에게 기울어 있는 상황인 셈이다.
때문에 희망과 생명은 파괴와 재생보다도 미지의 존재인 포트니아 테론에게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제대로 된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아직 유사 신격도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공연히 이런 미지의 존재와 맞붙을 필요가 있느냐고 그녀는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걱정돼?”
“그야…”
원래는 이런 얘기를 할 생각이 아니었다. 기어코 보호와 균형까지 손을 댄 일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며 툴툴거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얼굴을 보고, 그가 또다시 어디론가 원정을 갈 준비를 하는 것을 보자 그런 태도를 취할 수가 없다. 질투보다도 그에 대한 걱정이 앞선 까닭이다. 이래서야 유아를 보고 뭐라고 할 계제가 아니다. 자신은… 역시 호구신인 모양이다.
형진은 그런 희망과 생명의 모습을 보며 씩 웃더니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그리고 살짝 놀란 표정의 그녀에게 입을 맞추고는 작게 속삭였다.
“그럼 이번에도 같이 갈까?”
“어딜? 원정을?”
“그래. 혼자서 가는 게 걱정되면 같이 가면 되잖아.”
“그거야…”
사실 어떻게 보면 이건 자신감의 표현이라 할 수 있었다. 혼자만이 아니라, 다른 여신들을 대동한 채 그녀들을 보호하면서도 충분히 어떤 상황이든 대처할 수 있다는 자신감. 물론 그녀들의 힘을 단순히 빌려 쓰는 것보다, 직접 여신 스스로 권능을 발휘하는 것이 더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게 마련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단순히 짐이라고만 보기는 어려운 일이다.
“저, 저도 같이 갈래요.”
바로 그 때, 형진의 옷깃 속에 숨어있던 꼬맹이 여신 하나가 얼른 고개를 내밀고 그렇게 끼어들었다. 다름아닌 보호와 균형이다.
“너…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거야?”
“그, 그게…”
아무래도 기가 약한 보호와 균형이다 보니 얼른 고개를 움츠리고 다시 옷깃 속으로 숨는다. 하지만 숨어 있었던 것은 그녀만이 아니다.
“나도 있어.”
“끙…”
다른 쪽 옷깃에서 쓱 고개를 내미는 공포와 죽음의 모습에 희망과 생명은 자신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래서, 대답은?”
희망과 생명은 얄밉게 웃으며 묻는 이 남자에게 주먹을 한 방 날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떠올렸지만, 이 상황에서 자신이 화를 내고 가버리면 다른 쟁쟁한 경쟁자들만 좋은 일이 되어 버린다. 결국 그녀는 결국 한숨을 푸욱 내쉬며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간다고. 가면 되잖아.”
============================ 작품 후기 ============================
오늘은 여기까지.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