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665
00665 150. 대면 =========================
거짓된 천국이라니. 천국이면 천국이고, 지옥이면 지옥이지 거짓된 천국은 또 뭐란 말인가. 하지만 역시 천국이나 지옥 같은 말을 들으면 바로 연상되는 것은 있다.
그것은 바로 죽음. 어느 쪽이든 간에, 살아서는 갈 수 없는 곳이니까.
“전… 죽은 겁니까?”
그래서 그렇게 물었지만, 형진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저어 보인다.
“설마.”
일단 그렇게 라만의 질문을 부정한 형진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몇 마디 말을 덧붙인다.
“원래 거짓된 천국이라는 별칭이 붙은 것에는 다른 이유가 있지만, 따지고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인생의 마지막에 안식을 위해 가는 곳이 아니라, 현세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기 위해 잠시 들르는 곳이라고나 할까. 좀 거창한 말이 될지도 모르겠다만.”
“…”
어쨌든 죽은 건 아니라는 얘긴가.
그러고 보면 앙그릴에도 꿈속에서 인간의 정기를 취한다든가 하는 식의 전승이 존재한다. 라만은 그런 생각을 떠올렸지만, 만약 형진이 그 생각을 전해 들었다면 세상은 달라도 지성체들의 관념은 다 비슷한 모양이라며 웃어버렸을 것이다.
“일전에 너에게 어른의 몸을 주겠다고 했었지. 너는 거부했었고.”
“그렇습니다.”
“그 때는 그런가보다 했는데, 지나고 보니 내가 설명을 제대로 못 한 것 같더군. 그래서 대화를 나누는 김에 너의 오해를 좀 바로 잡아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네가 지금 여기에 있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지.”
형진은 라만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겨 보였다. 그러자 마치 거울에 비친 것처럼 또 다른 라만의 모습이 등장했다.
라만은 그 모습을 보고는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당연한 얘기지만, 너 같은 꼬맹이 녀석이 갑자기 어른이 된다거나 하면 누구라도 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일이겠지. 하지만 이런 식이라면 어떨까.”
다시 형진이 손가락을 튕기자, 소년은 천천히 나이를 먹어 가더니 이내 훤칠한 청년의 모습이 되었다. 적도 근처에 자리 잡은 나라의 왕족답게, 살짝 짙은 빛의 피부색을 가진 모습이 어쩐지 지구로 치면 중동의 어느 나라 왕자님 같은 느낌이다.
“요컨대, 이런 식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시키는 것도 가능하다는 얘기다. 시간은 대략 한 일이년 정도로 잡으면 되겠군.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의 폭풍 성장이겠지만, 그렇다고 위화감을 느낄 정도는 아니라고나 할까. 그나저나 너 꽤 미남이구나. 마음에 안 드는데 좀 못생긴 모습으로 바꿔버릴까.”
“…”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하며 자신의 성장한 모습을 바라보는 상대의 태도야 그렇다 쳐도, 라만도 이쯤 되면 이것이 일반적인 환상과는 다른 체험이라는 것을 조금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형진은 다시 라만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태어난 곳에는 이런 말이 있지. 백문이 불여일견. 뜻은 백 번 전해 듣는 것이 직접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몸이 어떤 느낌인지 한 번 체험해 보도록.”
“네? 그게 무…”
화들짝 놀란 라만이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들이 존재하던 공간의 빛이 모조리 폭발해서 하얗게 시야가 번져가는 듯한 느낌과 함께 뭔가 어질한 느낌이 전해졌다.
갑작스런 빛의 폭발에 놀라 반사적으로 눈을 감는다. 하지만 이내 라만은 자신이 방금 전과는 다른 공간에 있음을 깨달았다. 앞서는 들리지 않았던 이런 저런 소음들이 전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바람이 불어와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 뒤이어 아이들이 즐겁게 떠드는 듯한 소리가 누군가 수련 중에 내지르는 기합과 섞여서 들려온다.
“…”
슬그머니 눈을 뜬다. 그러자 자신이 지금까지 봤던 그 어떤 문화와도 다른 양식으로 꾸며진 아늑한 실내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자신의 눈앞에서 뒷짐을 진 채 서 있는, 스스로를 신이라 칭하는 남자의 모습도.
“이곳이야 말로 진정한 거짓된 천국. 음, 말이 뭔가 이상하군. 아무튼 그런 곳이다. 어떤가, 아바타는. 달리 위화감 같은 건 느껴지지 않나?”
“아바타?”
“네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그 몸을 말하는 것이다.”
“…”
스스로의 몸을 아바타로 인식한 순간, 시야 한켠에 다양한 정보가 스르르 모습을 나타낸다. 체력이나 마력 같은 수치로부터, 즉시 불러와 사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명령어에 이르기까지. 평소에는 자동으로 감추어져 있다가 그것을 떠올리는 순간 지금처럼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별 문제는 없나보군. 다른 세계의 종족이라 혹시 문제가 생기면 어쩌나 싶었거든. 하지만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미 몇 억이나 되는 인간과 서로 다른 세계의 종족들이 사용하면서 문제가 없는지 면밀하게 시험한 것이니까.”
뭔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괜찮다는 말인 것 같다. 하지만 지금 라만은 그런 걸 의식할 겨를조차 없었다. 조숙하니 뭐니 해봐야, 결국은 아직 어린애일 뿐이다. 허용 한계를 넘어선 정보가 밀려들면 공황 상태까지는 아니더라도 머릿속이 뒤엉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제 나가서 너에게 주어진 몸이 어떤지 확인해 보도록. 밖에 있는 녀석들과 친해져 보는 것도 좋겠지.”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튕기자 문이 천천히 열린다. 이만 나가란 의미겠지만, 라만은 떨리는 목소리로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 머릿속에서도 가장 중요하다고 인식한 것을 꺼내들었다.
“지금 제 몸이 아바타라 불리는 그것이라면, 원래의 몸은 어떻게 된 겁니까.”
“당연히 앙그릴에 그대로 있지. 그거 생각보다 비싼 거야. 제대로 거래도 하지 않았는데 막 주고 그럴 만한 것이 아니라고. 계약 전에 제대로 체험해 보라는 신의 배려라고나 할까. 그렇게 이해해 주면 좋겠어.”
그렇게 대답한 형진은 어느 틈엔가 천천히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이대로 그가 계속 이 자리에 있으면 체험이고 뭐고 계속 말을 걸어올 것 같은 태세였기 때문이다.
“자, 잠깐!”
라만은 급히 사라져 가는 형진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그가 움직였을 때는 이미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난 뒤의 일이었다.
“허…”
악마에 홀려도 이것보다 황망하진 않을 것 같다. 잠시 그렇게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라만은 바깥에서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려오자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창가로 다가가 바깥을 살폈다. 그러자 여러 연령대의 소년 소녀들이 모여 앉아서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생각해 보면 라만은 저런 식으로 또래의 소년 소녀들이 허물없이 지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의 주위에 있는 이들은 대부분 어른들이었고, 이따금 접근해 오는 소녀들은 속이 뻔히 보일 정도로 노골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창문 아래로 보이는 이들에게선 그런 부자연스러운 모습이 전혀 없다. 자연스럽게, 또래끼리 모여 나름대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혼란스러움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라만은 창밖에서 웃고 떠드는 아이들의 겉모습이 저마다 꽤나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신처럼 조금 어두운 살빛의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티끌 하나 없이 하얗고 뽀얀 피부를 가진 이들도 있었다. 뿐인가. 재를 잔뜩 칠해 놓은 것처럼 검은 살빛의 아이들마저도 위화감 없이 그들 속에 섞여 있었다.
어디서부터 믿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몇 억이나 되는 인간과 서로 다른 세계의 종족들을 통해 시험했다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였던 모양이다.
잠시 주저하던 라만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방을 빠져 나갔다. 얘기가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곳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도 아이들과 대화를 나눠보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길드성에서 라만이 걸어 나오자, 얘기를 나누고 있던 아이들이 일시에 그의 기척을 알아차리고 시선을 던진다. 모습은 아직 어린 아이라도 이미 몇 달이나 크루그에게 스킬 수련을 받은 아이들이다. 반쯤은 놀이 삼아 하는 짓이라 그다지 성장이 빠르진 않은 편이지만, 지금 상태로도 일반적인 장정 몇 명 정도는 가볍게 때려눕힐 수 있는 수준. 숙련된 집행자 수준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의 기척 정도는 느끼고도 남는다.
“누구십니까.”
교관 역할을 맡고 있던 크루그가 일단 정중한 말투로 묻는다. 어차피 이곳 길드성은 형진이 허락하지 않은 존재는 마음대로 출입하지 못한다. 설령 그것이 신이라 할지라도. 그래서 호위병 하나 없는 상태에서도 이렇게 왕족 나부랭이들이 자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이다.
“라만… 아운 아우스 라만 3세… 입니다.”
형진에게는 얼결에 해버리고 말았지만, 태어나면서부터 황족이었던 라만으로서는 다른 누군가에게 의식적으로 존대를 하는 일조차 그리 자연스럽지 못하다. 크루그는 대번에 그런 기색을 알아차렸다.
“그렇습니까. 그런데, 이곳은 어쩐 일로?”
“그게… 여러분과 친해져 보라고 하셔서…”
“그렇군요.”
크루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간단한 몇 마디 대화만으로도 이 라만이라는 소년이 형진의 낚시 바늘에 걸려든 가련한 물고기 신세라는 것을 바로 이해해 버린 것이다. 하기야, 지낸 세월이 얼마인데 그 정도도 알아차리지 못할까.
“지켈.”
“네, 크루그님.”
“형이 보낸 사람 같아. 너희 조에서 맡아서 얘기를 나눠보도록.”
“알겠습니다.”
곧바로 피부색이 비슷한 지켈이라는 소년이 다가와 다짜고짜 라만의 손을 잡더니 자신의 조가 모여 앉아 있는 곳으로 이끌었다. 크루그는 얼떨결에 끌려가는 라만의 모습을 흘깃 보더니, 손뼉을 치며 외쳤다.
“휴식 시간이 끝난 조는 다시 수련을 시작한다!”
“에엣! 벌써요? 아직 간식도 다 못 먹었는데…”
“휴식 시간에 간식 먹으라고 허락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아하하… 일어날게요. 일어나야죠. 자, 얼른 정리하고 시작하자.”
괜히 신경을 거슬리게 해봐야 수련 강도만 세질 뿐이란 걸 아는 아이들은 후다닥 자신들이 있던 자리를 치우기 시작했다.
라만은 다시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수련이라길래 뭘 하는 건가 싶어서 시선을 주는 순간 그들의 움직임에 넋이 나가 버린 것이다.
마치 순간 이동이라도 펼치는 것처럼 훅훅 사라졌다 나타난다. 주먹을 휘두르니 회오리 바람이 일어난다. 무기를 휘두르자 커다란 통나무가 단숨에 박살나 버린다.
잘 나가는 제국의 황제이다 보니 라만의 주위에는 항상 훌륭한 호위병들이 즐비했다. 하지만 그들은 저렇게 눈에 확 들어날 정도의 기술을 함부로 쓰지 않는다. 힘을 모으는데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실전에서 마구 남발할 정도로 완전히 숙련된 상태 역시 아니기 때문이다. 제국에서 모으고 모은 인재들조차도 오랜 시간 수련해서 자신의 기술을 갈고 닦아야 비로소 주위 환경에 변화를 일으킬 정도의 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저 아이들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아무리 봐도 자신과 그다지 나이 차이도 나지 않는 아이들 같은데.
“반가워. 난 지켈이라고 해. 라만이라고 했지? 여기 앉아.”
“으, 응.”
서슴없이 자신을 향해 말을 놓는 상대를 만나는 경험 또한 라만은 그리 많이 겪어보지 못했다. 그래서 조금 당황한 기색으로 그렇게 대답을 해야만 했다.
“라만은 어디서 왔어?”
맞은편에 앉아 있던 빨간 머리카락의 소녀가 대뜸 질문을 던진다.
“아운 제국.”
“아운 제국? 거기가 어디지?”
“처음 듣는 이름 같은데.”
앙그릴 출신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건만, 이곳에서는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혹시나 자신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면 어쩌나 싶어 뭔가 증명할 방법이 없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 아이들은 일반적인 다른 아이들과는 반응부터가 달랐다. 자신들이 그런 나라를 모른다는 사실을 가지고 라만을 거짓말쟁이로 몰아가거나 하는 식의 발상 자체를 떠올리지 않고 있는 것 역시 그런 차이점 가운데 하나다.
“타나토스 출신이 아닌건가?”
“그런가 본데.”
“그런데 별로 외모에 차이가 없는 것 같아.”
“정말. 지켈이랑 같이 세워두면 형제인줄 알겠어.”
참고로 지켈이라는 소년은 피부색이 비슷한 걸 빼면 라만과는 그리 닮지 않은 외모다. 라만이 다소 서구적인 느낌이라면, 지켈은 동양적인 느낌이 강하다고 해야 하나. 물론 아이들이 그런 차이를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안목이 없는 건 아니다. 그냥 웃자고 하는 말이랄까.
아니나 다를까. 지켈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잘난 척을 했다.
“크흠. 내가 좀 잘 생기긴 했지.”
“으엑.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야.”
“참아. 오랜만에 칭찬을 들어서 기세가 살아난 것 뿐이니까.”
“뭐라고? 형제 같다고 말할 때는 언제고?”
“형제 같다고는 했지만, 닮았다고는 안했는걸.”
“맞아. 닮지 않은 형제, 의외로 많잖아. 더구나 우리들 같은 경우엔 더더욱 그렇지.”
“크윽.”
지켈은 투덜거리더니 어떻게 대화에 끼어들어야 할지 몰라 하고 있는 라만을 향해 말을 걸었다.
“제국이면, 라만은 황족인건가?”
뭔가 자연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위화감이 느껴지는 논리의 비약이다. 아운 제국에서 왔다고만 했는데, 어째서 황족이냐는 질문이 바로 나오는 걸까.
“일단은.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
입고 있는 옷이라든가, 분위가 같은 걸로 알아챘다는 식의 대답이 나올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지켈이 웃으며 한 대답은 라만이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달랐다.
“그야,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전부 왕족이거나 황족이거나 그 외 비슷한 녀석들 뿐이니까. 진님은 우릴 가리켜 이렇게 부른다던데. 왕족 나부랭이라던가. 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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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한편.
안녕히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