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674
00674 152. 조약 =========================
“큭!”
“크흣!”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의 모습에 화들짝 몸을 일으키려던 신하들은 갑작스럽게 어깨를 짓누르는 듯한 압력이 가해지자 짤막한 신음 소리와 함께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강제적으로 꿇려 지는 상황에서도 라만은 별다른 문제 없이 그대로 선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역시 지켜보고 계셨군요.”
형진은 자신을 두려움 없이 바라보는 소년 황제를 향해 빙긋 웃었다.
“어떻게 알았지?”
“그냥… 그럴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냥이라고?”
“네. 어쩐지 이런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고나 할까요.”
“훗.”
물론 신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는 법이다. 엘리시온 밖에서는 신도 인과율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미리 필요한 조치를 취해 놓았다면 관심이 있는 사안을 살피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이를테면 인공위성이라든가, 추종자 같은 것이 바로 그러한 조치이다.
이전에 거짓된 천국으로 초대를 했을 때, 형진은 라만에게 임시로 추종자에 준하는 자격을 부여한 적이 있다. 당시 그를 포섭하려던 일이 취소되면서 아바타는 회수되었지만 자격까지 완전히 말소된 상태는 아니었고, 그러한 조치들을 통해 형진은 라만이 보고 듣는 것을 전부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똘똘한 녀석이군.”
형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의자를 꺼내어 앉자 라만이 물었다.
“신께서는 저희들에게 무엇을 원하시는 겁니까.”
그 말에 형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것이라면 이미 카트린이 설명했을 텐데.”
“그게… 전부란 말씀이십니까?”
“그래.”
어쩐지 별로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라만의 반응에 형진은 심드렁한 기색으로 덧붙였다.
“사실 나에게 있어 앙그릴이나 아운 제국의 가치는 별로 대단한 것이 아니야. 나는 이미 여러 세계를 휘하에 거느리고 있고, 그 중에는 이곳보다 훨씬 많은 인구와 뛰어난 기술을 가진 곳도 많거든. 티폰을 불러낸 자들의 문제가 좀 거슬리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해서 영향력을 행사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얘기다. 어차피 어느 정도 필요한 대책은 마련해 두었으니까.”
“대책이라면…”
“티폰과 같은 것이 다시 불려나오지 않게끔 하기 위한 대책. 설마 아무것도 안하고 두 손 놓고 있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
라만은 형진의 말에 얼굴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굳이 이렇게 사절을 보내서 평지풍파를 일으킬 필요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다.
“그럼… 어째서 사절을 보내신 겁니까.”
“글쎄. 왜일까.”
형진은 그렇게 반문하고는 어디 이번에도 맞춰보라는 듯 지그시 라만을 바라보았지만, 이 영민한 소년 황제도 그것까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세상은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넓다. 그리고 그곳에는 너희들의 상상을 벗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이 지금도 벌어지고 있지.”
그 말과 함께 형진은 처음 모습을 드러냈던 것처럼 아무런 기척도 없이 다시 자취를 감추었다.
“흐억…”
“헉… 바, 방금… 그건 대체…”
형진이 모습을 드러낸 동안 몸을 짓누르는 알 수 없는 압력에 꼼짝도 못하고 엎드려 있던 신하들은 그제서야 숨통이 트이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아. 하지만… 경들은 별로 좋지 않아 보이는군.”
일부러 신의 존재감을 유감없이 드러내 보였다. 추종자나 달리 심령을 보호할 수단을 가지고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도 않은 일반인들로서는 그것만으로도 하루 종일 격심한 노동에 시달린 것처럼 몸과 마음이 완전히 지쳐버린다.
“버티지 말고 이만 물러가 쉬도록. 이것은 명령이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신하들은 못 이긴 척 비틀거리며 방을 빠져 나갔고, 라만은 가만히 의자에 앉은 채 형진이 남긴 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하룻밤이 지나고 다시 새 날이 밝았다.
밤새도록 이런 저런 생각을 떠올리다가 잠을 설쳤음에도 불구하고 평소의 버릇대로 정해진 시간에 눈을 뜨고 말았다. 어쩐지 그대로 다시 잠을 청하고 싶지만, 간단하게 세면을 하고 있자니 시녀 하나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그에게 한 마디 말을 전한다.
“아침 식사? 카트린 황녀가?”
“네. 별다른 계획이 없으시다면, 함께 하시는 것이 어떠시냐고.”
라만은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침이 고이는 것을 느꼈다. 어제 카트린이 가져와서 먹었던 여러 가지 음식들의 맛이 떠오른 탓이다.
“알았다. 곧 가겠다고 전하도록.”
“명을 받들겠습니다.”
라만은 허둥지둥 다시 제대로 몸을 씻고 옷매무새를 살핀 다음 카트린이 머물고 있는 내전으로 향했다.
“어서 와. 마침 딱 맞춰서 왔네.”
“우, 우와…”
라만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 틈엔가 커다란 식탁에 하나 가득 음식이 차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엘 파르드는 아침을 이렇게 많이 먹어?”
조심스러운 라만의 질문에 카트린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설마. 좀 든든하게 먹는 편이긴 하지만 이걸 두 사람이 다 먹을 정도는 아니야.”
“그럼?”
“같이 온 분들도 있고, 네가 데리고 온 시종들도 있잖아. 모처럼인데 다 같이 식사를 하면 어떨까 해서.”
“…”
라만은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지만, 이내 문이 열리며 검은 두건을 뒤집어 쓴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온다.
“어서오세요. 주시자 여러분.”
“성대한 아침식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카트린 황녀님.”
“별로 대단치는 않아요. 게다가 제가 한 요리도 아니고.”
직접 한 요리는 아니더라도 황녀가 직접 식탁을 차리는 경우도 그리 흔한 건 아니다. 하지만 주시자들은 의외로 이런 자리가 그다지 생소하지 않은지, 각자 접시를 들고 식탁으로 다가왔다.
카트린은 어정쩡하게 물러서 있는 라만의 시종들에게도 권했다.
“여러분도 이리 오세요. 거기 접시에 먹을 만큼 덜어서 드시면 됩니다.”
“…”
시종과 시녀들은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은은하게 풍겨지는 여러 가지 음식 냄새에 침이 고이는 걸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 하지만 아무리 상대가 권했다 해도 감히 황제와 함께 식사를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먹고는 싶은데, 그럴 순 없다. 식사 한 번 하자고 목숨을 걸 수는 없는 일이니까.
“후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왕좌왕 갈팡질팡 한다는 건 그만큼 이 음식들의 유혹이 강하다는 의미일 터. 라만은 결국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허락할 테니, 그렇게 불쌍한 표정으로 힐끔거리는 건 좀 그만 둬라. 누가 보면 밥도 안 주고 부리는 줄 알겠다.”
시종과 시녀들은 그 말을 듣자 기겁하며 바닥에 엎드려 죄를 청했다.
“죄, 죄송합니다. 폐하. 신들이 어리석어…”
“알았으니, 와서 먹으라고!”
“네, 넷!”
라만이 소리를 버럭 지르고 나서야 시종과 시녀들은 주춤거리며 접시를 들고 식사 대열에 합류했다.
“윽…”
“읍…”
그리고 음식을 입에 넣는 순간 비명인지 신음인지 모를 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맛이 너무 좋아서 자신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올 지경인데, 의식적으로 그것을 억누르다 보니 이런 기이한 소리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그런 시종과 시녀들의 모습이 안 되어 보였는지 주시자들 가운데 몇몇이 다가가 그들에게 이것저것 챙겨주기 시작한다.
“전부터 느꼈던 건데, 엘 파르드에는 시종이나 시녀가 없는 거야?”
일전에 길드성에 갔을 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카트린이 직접 음식을 챙겨주는 걸 보니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응. 맞아.”
“정말?”
“응. 물론 자질구레한 일들을 도와주는 이들이 있긴 해. 보통 요정들이 그런 일들을 대신하는 편인데, 식사의 경우엔 이런 식으로 직접 차려 먹는 경우가 많아. 좀 특이하긴 하지만, 국왕이 요리를 하고 왕비가 재료 손질을 하는 식이다보니 그렇게 되어 버렸다고나 할까.”
“허어…”
왕이 요리를 하고 왕비가 재료 손질을 하다니. 라만으로서는 좀처럼 상상이 가지 않는 광경이다.
상상… 인가.
라만은 문득 자신이 요리를 하고 카트린이 재료를 손질하는 광경을 연상하고는 얼굴이 붉게 물들어 버리고 말았다.
얼굴에 피가 몰려 어쩔 줄 몰라하던 라만은, 문득 오늘따라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 있어야 할 것이 빠진 듯한 느낌. 그게 뭘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언제나 카트린의 곁에 배후령처럼 자리 잡고 있던 사람 하나가 오늘따라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저기… 오빠 분은? 어디 가셨어?”
“크루그 오빠? 응. 전에 왔었던 곳 기억하지? 처음 만났던 곳.”
“응.”
“그때 봤던 아이들이 타나토스의 왕족 자제들인데, 그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바로 크루그 오빠야. 지금 자리를 비운 건 바로 그 때문이고.”
“아하…”
그렇게 대화를 나누던 중에, 문득 카트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라만을 살피더니 묻는다.
“그런데 오늘도 별로 안색이 안좋아 보이네. 무슨 일이 있었어?”
일이야 많이 있었다. 당장 카트린이 찾아온 일부터 시작해서 지난 일 년간의 사건사고를 다 합쳐도 그 충격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일이 어제 하루 종일 몰아쳤다.
“그냥. 조금 잠을 설쳤어.”
“그래? 잠깐만.”
“…”
카트린이 문득 손을 뻗어 라만의 이마를 짚더니 무언가를 작게 읊조렸다. 그러자 은은한 온기 같은 것이 그녀의 손을 통해 전해지며 살짝 무겁게 느껴졌던 몸 상태가 순식간에 나아진다.
“이건…”
“보호와 균형이라는 여신님의 권능이야. 일부지만 나도 그 힘을 살짝 빌려 쓸 수 있거든.”
“권능을?”
“응. 그런 식으로 힘을 빌려 쓸 수 있도록 허락받은 이들을 추종자라고 해. 참고로 여기 있는 분들은 모두 진 오빠의 추종자들이지.”
신의 권능을 빌려 쓸 수 있도록 허락 받은 존재. 라만은 이들이 그토록 강한 이유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여러 신들이라고 어제 그랬잖아. 정확히 몇 분이나 계시는 거야?”
“글쎄. 그건 나도 잘 몰라. 아마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을 걸.”
“어째서?”
“너무 많아서. 하지만 그 중에서도 직접적으로 우리들과 협력 관계이거나 한 분들을 꼽으라면 한 스무 분 정도 될 것 같아.”
“스물…”
밤의 신 같은 인물이 하나도 아니고 스물이나 있다니. 라만은 스스로가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 여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한 가지 심각한 오류가 있었다. 신이라고 해도, 모두가 형진과 같은 강대한 힘을 가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다 보니 아침 식사가 금방 끝나 버렸다. 너무 맛있어서 홀려버릴 것 같은 음식을 마음 맞는 사람과 함께 즐긴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일이라는 사실은 라만은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깨달았다.
“훌륭한 식사, 고마웠어.”
“내가 만든 것도 아닌 걸 뭐. 맛있게 먹었으면 됐어.”
“그래서 말인데, 점심은 내가 초대를 하고 싶어. 와줄래?”
“그래? 하긴 이쪽의 음식도 한번쯤 먹어보고 싶긴 해. 기꺼이 응할게.”
“고마워.”
아침 식사가 끝나고 점심 식사를 함께 하기로 약속했지만, 라만은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래도 헤어지고 싶지 않은 탓이다.
우물쭈물 거리는 라만의 모습에 카트린은 빙긋 웃더니 다독이듯 말했다.
“자, 황제 폐하. 가서 일하셔야죠?”
“응…”
사실 라만은 아직 황제로서의 업무를 시작하지 않은 상태라 돌아간다고 해서 할 일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할 일이 없다고 말하는 건 어쩐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라,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답하고는 그대로 발걸음을 되돌릴 수밖에 없었다.
거처로 돌아가 보니, 밤새 얼굴 모습이 반쪽으로 변해버린 신하들이 일찍부터 입궁해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밤새 별 탈은 없었나?”
“네. 심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
눈자위가 푹 꺼져서 그대로 폭 고꾸라질 것 같은 몰골로 그리 말해봐야 설득력이 없다. 카트린에게 부탁해서 그 권능이란 것의 도움을 좀 받으면 괜찮지 않을까 싶긴 하지만, 뭔가 별로 내키지 않는다. 자신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그 작고 귀여운 손으로 이 시커먼 남정네들의 이마를 짚는 모습을 생각하니 절로 고개가 저어진다.
“그래. 생각들은 해보았고?”
“…”
그 말에 신하들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조심스러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
“폐하. 국혼을 추진함이 어떨까 싶습니다.”
신하들은 당연히 라만이 반색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그 얘기가 나왔을 때, 소년 황제의 표정에 드리운 것은 씁쓸함이었다.
“불가.”
표정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입밖으로 흘러나온 대답 역시 마찬가지였다.
============================ 작품 후기 ============================
일단 한편.
안녕히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