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675
00675 152. 조약 =========================
신하들은 당황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카트린의 황녀가 언급되면 바로 꿈속을 거니는 듯한 멍한 표정을 짓던 그 황제라면 이런 식의 반응이 나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혹시 저희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입니까.”
신하 가운데 하나가 그렇게 조심스럽게 질문하자, 라만은 여전히 씁쓸한 표정을 지은 채 대답했다.
“다른 이유라… 정확히 말하자면 깨달았다고 하는 편이 맞겠지.”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그녀와 내가 바라보고 있는 것이 다르다는 사실을 말이야.”
“…”
사실 어제 형진이 세상이 넓다고 말했을 때만 해도 라만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 카트린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문득 자신도 모르게 그 의미를 깨달았다.
카트린이 범선을 타고 나타났을 때부터, 라만은 그녀에게 한 가지 궁금한 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직 어린 소녀에 불과한 카트린이 어째서 자청해서 아운 제국과의 교섭을 맡은 사절의 역할을 맡은 것인가 하는 점이다.
엘 파르드라는 나라가 어떤 곳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어제와 오늘 지켜본 결과, 그 나라의 누구도 카트린에게 무언가를 강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식사를 차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다른 이들을 불러들여 함께 음식을 즐기고, 그것을 치우는 일련의 모든 일들이 그녀의 의지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었다. 일부러 그런 장면을 연출한 것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자연스러움과 그 일들을 통해 즐거움과 보람을 느끼는 카트린의 감정이 그대로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이것을 바꿔 말하자면, 이번에 카트린이 아운 제국을 찾은 것 역시 다른 누구의 의지도 아닌 그녀 스스로의 의지였다는 얘기가 된다. 자신이 아운 제국에서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위치인 것처럼, 카트린 역시 엘 파르드에서 누구도 무언가를 강제할 수 없는 위치인 것이다.
처음 라만이 들뜬 모습을 보였던 것은,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카트린 역시 자신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단 한 번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사절의 역할을 자청해서 찾아올 정도로, 그렇게 마음 속에 깊이 자신을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그를 설레게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겪어보니 알 수 있었다. 카트린이 자신에게 이성으로서의 어떤 감정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물론 아직 어려서 그런 감정을 잘 모르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카트린이 자신에게 보여준 일련의 행동들은, 좀 적나라하게 말하면 자기 앞가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동생을 챙기는 누나 같은 모습에 불과했다. 카트린의 눈에 들어온 자신은 그 정도의 존재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국혼을 언급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녀는 아마도 협상 당사자로서가 아니라, 국가간 교섭의 조건으로밖에 자신을 취급하지 않은 것에 대해 크게 실망할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녀가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국혼 자체도 성사될 이유가 없다. 그것만으로 끝나면 다행이다. 자칫 그녀를 아끼는 신들의 분노와 직면하게 될지도 모른다.
세상은 넓다.
밤의 신은 스스로 여러 세계를 거느리고 있노라 말했다. 앙그릴이나 아운 제국은 자신에게 그리 큰 가치가 없다고도 말했다. 자신이나 지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신하들에게 있어 아운 제국이 전부나 다름없는 것과는 비교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의 스케일이다.
라만은 문득 생각했다.
세상이 그토록 크다면, 한번쯤 그 모든 것을 자신의 눈 안에 두고 싶다고. 황성 안에 웅크리고 앉아 정해진 운명대로 황제가 해야 할 일을 하면서 그렇게 세월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 거대한 세상 속을 자유롭게 오가며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 보고 싶다고.
마치, 카트린처럼.
물론 카트린과 자신은 입장이 다르다. 그녀는 신이 애지중지하는 고귀한 황녀. 아직 어리다고는 하지만 그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그런 신분이다. 그에 반해 자신은, 비록 한 나라의 황제 자리에 있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달리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다. 스스로 무언가를 해본 일이 없기에, 다른 이에게 자랑스럽게 내세울 만한 것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서, 나는 결정했다.”
“…”
긴장한 표정으로 이어질 자신의 말을 기다리는 신하들을 돌아보며 라만은 무거운 어조로 선언했다.
“나는, 저들이 섬기는 신의 추종자가 되고자 한다.”
“네?”
신하들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뭔가 폭탄 선언이 나올 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런 식의 말일 줄은 미처 몰랐다. 추종자라니. 신을 따르는 자가 되겠다는 말인가. 다른 누구도 아니고 제국의 황제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들의 종교에 귀의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아운 제국은 현재 국교가 없다. 과거 몇 차례의 내전을 통해 아운 제국은 여러 종교 세력들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고, 그때마다 심대한 폐해에 나라가 휘청거렸다. 고작 400년 짧다면 짧을 수도 있는 역사 속에서 아운 제국의 사람들은 종교가 정치와 결합했을 때 얼마나 위험해질 수 있는지를 여실히 깨달았고, 그래서 지금은 정치에서 종교를 엄격하게 배제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는 상태다.
그런데, 그런 나라의 황제에게서 신을 따르겠다는 말이 나왔다. 그것도 기존의 종교에서 섬기는 신이 아니라, 다른 세계에서 건너와 스스로 신이라 칭하는 존재다.
황제는 아운 제국의 심장이나 다름없는 존재. 그런 존재가 신을 섬긴다는 것은 다시 말해 그 신이 아운 제국이라는 나라보다 위에 선다는 뜻이다. 종교가 정치와 결합했을 때 위험해지는 이유가 바로 이래서다. 인간이 세운 나라나 그것이 추구하는 가치보다 종교의 가치가 더 위에 올라서게 되니 그 폐해가 오죽할까.
“절대로 안 될 말씀이십니다. 아운 제국은 엄격한 정교 분리의 원칙이 지켜지는 나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전하 한 사람만의 일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재고해 주십시오! 폐하!”
“재고해 주십시오! 폐하!”
곧바로 한 신하가 바닥에 엎드리며 그렇게 고하자, 다른 신하들이 그 뒤를 잇는다. 하지만 라만이 묵묵히 그 말을 듣고만 있자, 이내 다른 신하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만약 저들의 신이라는 존재가 무리한 요구를 해온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말에 라만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답했다.
“그렇다면, 그만 둬야지.”
“네?”
“추종자, 그만 둔다고.”
“그, 그게… 그렇게 간단하게 허락될 리가 없지 않습니까…”
당연한 얘기다. 들어갈 때는 마음대로라도, 나갈 때도 그렇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더구나 상대는 신이다. 그냥 허울 좋은 무언가를 신으로 내세운 그런 종교가 아니라, 실체를 지닌 채 모습을 드러내고 권능을 발휘할 수 있는 신이다.
라만은 어이없어 하는 신하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답했다.
“경들은 한 가지 사실을 착각하는 듯 하군.”
“무슨…”
“나는 국가가 아니다.”
“…”
“나는 황제이지만, 그것은 아운 제국을 이루는 한 가지 요소에 불과할 뿐이다. 말해 보라. 내가 죽는다고 아운 제국이 사라지는 것인가.”
“폐, 폐하.”
당황한 신하들이 얼른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린다. 그렇다고도, 그렇지 않다고도 말할 수 없는 상황에 당황해 버린 것이다. 단순히 아부를 할 생각이라면 그렇다고 대답해 버리면 그 뿐일 수도 있다. 하지만 라만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조숙하고 영민한 소년이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 그런 말을 입에 담는 신하를 결코 좌시하지 않을 정도로.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놀란 표정을 짓기는.”
“폐하. 그렇지 않습니다.”
“됐다. 경들은 지금까지 하던 것처럼, 나를 대신해 국정을 운영하면 되는 것이다.”
“…”
“이미 잘 알고 있겠지만, 앞으로 시대는 크게 격변할 것이다. 그렇게 급격하게 변화하는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국가가 나아갈 길을 그대들이 잘 조율해야만 한다. 이것이 얼마나 중대한 책임인지, 그대들은 알고 있겠지?”
“폐하…”
“믿겠다. 그대들이 있으니 내가 이렇게 나설 수 있는 것이다. 무슨 뜻인지 알겠는가.”
“…”
신하들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몸을 떨고만 있었다. 이런 황제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권력욕에만 찌들어 있었던 자신들의 모습이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다.
라만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어제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한 번 형진을 불렀다.
“일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아직 무엇 하나 이룬 것이 없는 몸입니다만, 받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그들이 있던 방 한 켠에 다시 누군가의 모습이 나타났다. 바로 형진이다.
“맹랑한 놈.”
형진은 나타나기가 무섭게 라만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국혼 얘기가 나왔을 때는 그 말을 꺼낸 놈들에게 모조리 천벌을 내릴 생각을 했다. 하지만, 뒤이어 라만이 불가라는 말을 꺼냈을 때는 그 역시 지금 엎드려 있는 신하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로서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뒤이어 들려온 말에 형진은 이 소년 황제가 스스로를 인질로 내세워 이 나라의 번영을 약속받으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단순히 인질이라고만 하기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카트린을 불러들여 자신의 곁에 두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 나라를 떠나 그녀의 곁에 서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쪽이 되었든 아직 어린 소년이 떠올리기에는 쉽지 않은 일이다. 당장 이 나라의 누구보다도 풍요롭고 안락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입장이라면 더욱 더.
“내 추종자는 되고 싶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형진이 툴툴거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라만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부탁드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흥.”
가볍게 콧방귀를 뀌면서도 형진의 눈은 라만처럼 빙긋 웃고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한 마디는 마음에 들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국가가 아니라고 했던 그 말.”
“아…”
생각해 보면 군주들이 가장 흔히 범하는 오류가 이것이다. 보통의 정치가가 권력을 잡은 시점에서 스스로를 국가와 동일시하면 그는 독재자가 되어 버린다. 자신의 존재를 국가가 수호해야 할 가장 큰 가치로 설정하면서 그때까지 쌓아올린 다른 모든 업적들이 모순에 빠져 붕괴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 말, 앞으로도 잊지 말아라.”
“명심하겠습니다.”
“좋아. 머리를 숙여라.”
“…”
라만이 가만히 머리를 숙이자, 형진은 그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닿은 손으로부터 웅혼한 힘이 소년의 몸 안으로 밀려들어가기 시작한다.
“읏…”
하지만 미처 뭐라 반응할 틈도 없이 의식은 간단하게 끝을 맺었다.
“지금부터 널 앙그릴의 총괄 지부장으로 임명한다. 물론 이것은 임시직일 뿐이며, 네가 기대에 못 미친다면 그 역할은 다른 이에게 넘어가게 될 것이다. 알겠는가.”
“알겠습니다.”
비록 임시라고는 하지만 라만이 앙그릴의 총괄 지부장으로 임명되자 그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우, 이게 뭐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전부 일을 끝내 버리다니. 너무 하다고 생각 안 해요?”
“크흠. 미안.”
“칫.”
하지만 사실 라만의 마음을 움직인 건 처음부터 끝까지 카트린의 공이었다. 그 내막을 일일이 그녀에게 설명해 줄 수 없다는 것이 좀 아쉽기는 해도,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카트린은 진이 자신의 공을 가로챘다며 투덜거리면서도 미리 준비한대로 엘 파르드와 아운 제국 사이의 통상 조약의 체결을 차근차근 준비했고, 절차에 따라 비준을 마침으로서 그 효력이 발효됨을 선언했다. 하기야 실제로 엘 파르드를 대표하는 사절로서 임무를 맡은 것 자체가 이번이 처음이니 겉으로 드러난 것만으로도 충분히 공을 세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그녀는 아직 작은 소녀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럼… 이제 조약이 체결되었으니 본격적으로 움직여야겠군.”
“사교 토벌 말씀이시군요.”
카트린과 라만이 조약을 체결하는 동안 형진이나 다른 여신들이 그저 아침드라마 지켜보는 느낌으로 놀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앞서 티폰을 불러들이는 의식을 준비했던 자들을 면밀하게 추적하여 그들의 위치를 파악하는데 주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준비가 끝나자, 형진은 대기 중이던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집행을 시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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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편째.
자, 이제 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