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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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라야
형진은 물론이고 크루그마저도 놀란 표정이 되어 버렸다.
“어라, 몰랐어요? 진님은 그렇다쳐도, 크루그님은 알 줄 알았는데. 꽤 유명한 얘기거든요.”
“네, 뭐… 아무래도 이쪽 일은…”
“음,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러고 보니 벌써 꽤 오래 전 일이긴 하네요. 벌써 십년도 전의 일이니까요.”
“…”
확실히 백 몇 살이라던 얘기가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다. 십년도 전의 얘기를 대수롭지 않게 하는 걸 보면. 하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한 나라의 왕을 암살한 장본인이 저렇게 백주 대낮에 일 못한다고 야단맞는 모습이라니. 확실히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일임에는 틀림없다.
“미엘 누나.”
“네?”
“십년도 전의 얘기라면, 그 때 제 나이가 몇이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게 그렇게 되나요? 아하하하하…”
어쨌든 미엘의 얘기에 따르면, 그 왕이라는 작자도 이번에 형진에게 암살됐던 영애처럼 막장스러운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왕인데 반란이나 반정을 일으켜서 뒤집어엎기는 뭔가 난감하고, 그래서 대안으로 공포와 죽음에 의한 암살이라는 형태의 처형을 선택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렇게 사실상의 공개 처형이나 다름없는 상황에 처했더라도 왕은 왕이고, 왕궁은 그런 왕을 지키기 위해 철통같은 보안과 방어를 자랑하는 공간이다. 게다가 영애의 경우에서 보듯이 암살을 막아내면 그건 다시 말해 신에 의해 정당성을 인정받는다는 의미가 되는지라 죽을둥살둥 막아내려 했을 터. 그런 모든 상황을 뚫고 암살을 성공했다는 건 분명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그렇게 뻔히 전대 왕을 암살한 자들이 있음에도 가만히 놔두는 왕실도 뭔가 대단하고.
그런데 이 나라는 외왕내제라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황제라고 부르는 것이 맞을 텐데. 혹시 폭군이나 암군의 경우엔 황제라는 호칭대신 왕이라는 호칭을 쓰는 건가.
이상한 건 그것만이 아니다.
“하지만… 이상하군요.”
“뭐가요?”
“그 정도 실력을 지닌 성도라면 아무리 손재주가 없더라도 저런 잡일 정도에서 버벅 거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형진의 말에 미엘은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글쎄요. 저도 지부장이 왜 굳이 저런 일을 하는지, 그리고 왜 저렇게 버벅 거리는지에 대해 확실히 알고 있는 건 없어요. 다만…”
“다만?”
“저 와중에도 총괄 지부장으로서 해야 할 일은 분명히 다 하고 있다는 것 만큼은 분명해요. 아실는지 모르지만, 총괄 지부장쯤 되면 일반 성도와는 업무량 자체가 다르거든요. 예를 들어 해결 되지 않고 계속 미수락 상태로 남아 있는 의뢰의 해결이라든가, 정체를 들키는 바람에 신분 세탁을 원하는 성도를 빼돌리는 일이라든가, 손은 많이 가는데 딱히 티는 안 나는 그런 일들을 정리하고 살피는 그런 일들 말이에요. 이건 추측이긴 한데, 저렇게 일을 하는 와중에도 마치 메시지를 보내는 것처럼 생각만으로 그런 일들을 처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허…”
미엘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총괄 지부장인 탁스 두겐은 멀티태스킹의 달인인 셈이다. 어쩌면 저렇게 야단맞아 가면서 허드렛일을 하는 건 그 나름의 수련이었던 것은 아닐까. 솔직히 총괄 지부장쯤 되면 모아놓은 돈도 많을 테고, 그 정도 재력이라면 굳이 말단으로 들어가서 허드렛일을 배우기보다는 아예 대장간이든 뭐든 통째로 사서 가르침을 강요할 수도 있는 일일 테니까, 굳이 저런 굳은 일을 하는 이유가 따로 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셋은 다시 이동 스킬을 써서 저택으로 돌아왔다.
“데이트는 즐거우셨나요?”
돌아오자 유아와 카트린이 볼을 부풀린 채 화난 표정으로 바깥바람을 쐬고 온 두 남자를 기다리고 있다. 물론 짐은 다 풀어둔 상태.
“농담이야, 농담. 내가 둘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면서 그래.”
“정말요?”
“응, 농담이라니까.”
“…”
미엘과 데이트를 한 게 농담이라는 건지, 둘을 좋아한다고 말한 게 농담이라는 건지 영 애매한 대답이라, 유아와 카트린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틈을 타 형진은 얼른 주제를 다른 방향으로 돌려버렸다.
“아, 배고프다. 밥 먹자. 우리 뭐 해먹을까?”
형진의 너스레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던 두 크고 작은 여자들은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먹고 싶은 것을 떠들기 시작했고, 짐 푸는 일을 내팽개치고 도망친 죄가 있는 형진은 꼼짝없이 둘의 요구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오랜 만에 제대로 된 주방에서 제대로 솜씨를 부린 요리를 먹고 나자, 유아와 카트린은 졸리다며 곧바로 씻고 침대로 들어가 버렸다. 형진은 자러 들어가는 둘을 보면서 여행동안 다른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하지 못했던 매크로 수련이나 할까 하며 준비를 하다가, 문득 유아가 설거지 해놓은 그릇 옆에 놓여진 쪽지를 발견했다.
“아까, 식사 중에 지부장이 보냈다면서 사람이 왔었어요.”
“그래?”
크루그는 별 일 아니라는 듯이 그렇게 말했지만, 형진은 살짝 소름이 끼쳤다. 쪽지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누가 왔다 갔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루그를 자신의 집으로 끌어들이길 잘했다는 생각과, 요리 때문에 등한시 했던 수련에 다시 매진해야겠다는 생각이 동시에 떠오른다.
쪽지의 내용은 총괄 지부장인 탁스 두겐이 형진과 크루그 둘을 따로 만나보길 원한다는 내용과 함께 장소와 시간이 적혀 있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네. 여기 어딘지 알아?”
“약도 있잖아요. 찾아보면 되겠죠. 아니면 미엘 누나에게 다시 부탁하든가.”
“일일이 찾는 건 골치 아프니 미엘님에게 부탁하는 편이 낫겠군.”
본채에 있던 미엘에게 가서 말하자, 그녀는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시 사람을 보내겠다고 말하기는 했어도, 이렇게 급하게 불러들이다니 좀 의외네요.”
“의외라뇨?”
“일단 인사를 한 이상 굳이 더 만나볼 일은 없을 줄 알았거든요. 혹시 남는 의뢰를 맡기려고 그러나.”
“…”
“어쨌든 알았어요.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미엘의 안내를 받아서 쪽지에 적힌 장소로 가보았는데, 그곳은 공방 거리의 일꾼들이 많이 찾는 밥집이었다.
“아, 어서 오십시오. 식사 시간이 얼마 안 되는지라 간단하게 본론만 말하겠습니다.”
가보니 탁스 두겐은 주문한 요리를 나오길 기다리다가 그들을 발견하자 급히 자신의 탁자로 데리고 오더니 이렇게 급히 불러들인 이유를 설명했다.
“아시겠지만, 이 시기의 수도는 상당히 번잡합니다.”
그렇게 시작된 탁스 두겐의 얘기를 종합해 보면 이랬다.
어전 토너먼트가 치러지는 이 시기의 수도에는 여러 계층의 다양한 사람들로 바글거린다. 문제는 그렇게 바글거리는 사람들 중에 흉악한 수배범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물론 많은 사람이 모이는 만큼 집행자들도 많이 모여들긴 하지만, 그들이 상경하는 것은 대부분 목표로 하는 자들이 상경하는 것을 따라잡는 경우가 많다.
“죄송하지만, 세 분은 근래 따로 수행하시는 의뢰가 없으시죠?”
“네, 뭐…”
미엘이나 크루그는 그렇다 쳐도, 형진은 속으로 뜨끔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요 근래는 이것저것 다른 일에 신경 쓰느라 바빠서 의뢰 창을 열어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달리 바쁜 용무가 있으시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 일을 좀 도와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마땅히 저희 지부 내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긴 하지만, 당장 남는 손도 부족한데다 상대가 상대인지라 적합한 인물을 찾기도 힘들어서 말이죠.”
그러자 가만히 듣고 있던 미엘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단 어떤 인물인지 들어보고 싶네요. 이렇게까지 일부러 총괄께서 불러서 부탁하시는 상대라면 보통 인물은 아닐 것 같은데.”
“솔직히 말해서 좀 골치 아픕니다. 뭐라 해도, 상대가 파괴와 재생의 구현자거든요. 물론 전직이긴 합니다만.”
“네?”
“그런…”
파괴와 재생의 구현자.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타나토스라 불리는 이 세계에 존재하는 또 다른 신을 추종하는 세력이다. 희망과 생명이 호구신, 공포와 죽음이 암살신이라고 불리는 것처럼 파괴와 재생 역시 다른 별명이 존재하는데, 무려 미친놈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들의 사고방식은 일반인의 상식과 워낙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마차가 부서져서 난처해하던 가족들이 지나가던 파괴와 재생의 구현자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그 결과 마차는 박살나 땔감이 되고 가족들은 모두 불태워졌다는 식의 얘기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일화다. 그 정도로 이해불가능의 존재이고, 그 정도로 미친놈들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미친놈들이 은둔 속성을 지니고 있어서 어지간해서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만약 미친놈 중 하나가 문제를 일으키면 대부분의 경우 다른 미친놈들이 나타나 문제를 해결한다.
본래 다른 신의 추종자들끼리는 간섭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긴 해도, 형진이나 유아의 관계에서 보듯이 그냥저냥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섞여 살아가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이 파괴와 재생의 구현자들에게 만큼은 절대적으로 이 원칙이 지켜질 수밖에 없다. 얽혀 봐야 자기만 손해이기 때문이다.
아까 미엘이 그랬지. 해결되지 않고 미수락 상태로 남아 있는 의뢰를 해결하는 것도 총괄 지부장의 일 가운데 하나라고. 의뢰 대상이 파괴와 재생의 구현자라면 확실히 그러고도 남는다. 아무리 전직이라는 타이틀이 붙었어도, 괜히 얽혀 봐야 좋을 일이 없다는 생각에 모두 기피하는 것이리라.
“너무 하세요. 오랜 만에 이렇게 수도에 돌아온 사람한테, 이런 말도 안 되는 임무라니.”
그 말에 탁스 두겐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네? 미엘님이라면 상대가 온전한 상태라도 문제없을 텐데요. 본래 모습을 드러내면…”
“크흠! 그 얘기는 이쯤 해두죠.”
본래 모습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미엘은 얼른 헛기침을 하며 탁스의 말허리를 잘랐다.
“어쨌든 잘 알았습니다. 위치는 확인이 되었나요?”
“물론입니다. 어떻게… 이 의뢰를 수락하시겠습니까?”
미엘은 한숨을 푸욱 내쉬며 말했다.
“할 수 없죠. 페스타를 수행하긴 했어도 한동안 의뢰를 안 했으니. 거절할 명분도 없고.”
“감사합니다. 역시 미엘님 밖에 없군요.”
“쳇, 아부는 그쯤 해두세요.”
곧바로 형진의 시야에 의뢰를 수락하겠느냐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두 분도 받아두세요. 설마 이 연약하고 작은 소녀 보고 그 흉악한 미친놈을 혼자 상대하라고 하진 않으시겠죠?”
“…”
“농담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그런 눈으로 볼 것 까지는 없잖아요. 상처 받는다구요.”
“크흠, 죄송합니다.”
형진은 일단 의뢰를 수락했다. 상대가 미친놈이라는 것이 꺼림직하긴 해도, 현직도 아니고 전직이라면 딱히 문제될 것이 없다 싶었던 것이다. 신의 추종자들이 강한 힘을 지닐 수 있는 건 모시는 신의 강력한 권능이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적인 능력이 출중한 인물이 없지는 않겠지만, 완전한 상태에 비하면 결국 여러모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형진은 의뢰를 수락함과 동시에 슬쩍 크루그에게 물었다.
“미엘씨가 그렇게 강해?”
“몰랐어요? 누나는 라야바르트에서 가장 강한 네 명의 집행자 가운데 하나에요.”
“뭐?”
이건 또 무슨 소린가. 가장 강한 네 명의 집행자 가운데 하나라니.
“저도 잘은 몰라요. 실제로 만나본 자체가 눈앞의 두 명 뿐이니까요.”
“눈앞의 두 명이라면…”
미엘과 총괄 지부장 탁스 두겐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럼 남은 두 명은 누군데?”
“한 명은 어디 지부장이었다가 얼마 전에 은퇴해서 엘리시온으로 갔다고 들은 것 같고… 또 한 명은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네요. 이 나라 안에서 미엘 누나와 대등한 실력을 지닌 인물이 세 명이라고는 들었는데, 구체적으로 마지막 한 명에 대해 들어본 바가 없어서.”
순간 형진은 뒤통수를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얼마 전에 은퇴해서 엘리시온으로 간 인물이라면, 바로 형진에게 낙인을 넘기고 가버렸던 그란웰의 전대 지부장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헐.”
그 주정뱅이가 그렇게 강한 인물이었다고?
형진은 자신도 모르게 손에 새겨진 낙인을 바라보았다. 이 낙인의 주인이 그토록 강한 사람이었다니,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