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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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라야
“아, 식사가 나왔군요. 그럼 미엘님 잘 부탁드립니다. 다른 두 분도 힘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탁스 두겐은 그렇게 말하고는 별거 없어 보이는 식사를 허겁지겁 먹어치우기 시작한다. 이렇게만 보면 참 없어 보이는 아저씨에 불과한데, 역시 집행자들은 겉만 봐서는 알 수 없는 사람들이다.
“가죠. 얼른 해결해 버리고 가서 쉬고 싶어요. 두 분도 그렇겠죠?”
“물론입니다.”
의뢰 수락과 동시에 화살표로 찍혀진 장소는 가장 최근에 목표가 목격된 장소였다. 셋은 일단 최대한 빨리 해당 장소까지 이동한 뒤, 목표를 추적하기로 했다.
형진은 으슥한 골목길로 접어들자 코장식과 귀걸이, 그리고 눈가리개를 꺼내 착용한 다음, 집행자 세트를 꺼냈다. 크루그는 딱히 장비를 꺼내 착용하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미엘은 형진의 모습을 보더니 손가락을 딱 하고 튕기는 것으로 단숨에 페스타때 보았던 모습이 되었다.
“마법인가요?”
“이거요? 아쉽게도 아니에요. 일정 계급 이상의 성도는 공헌도를 써서 이런 저런 물품이나 능력을 구매할 수 있는데, 이것도 그것 중 하나에요.”
“그런 것도 있었군요.”
팩션 계급이 높아지면 여러 가지 이점이 생긴다고는 들었지만 그런 것도 있는줄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
“얼마나 하죠?”
“장비 토글 기능이요? 얼마 안 해요. 공헌도 천이었던가. 꽤 오래 전 일이라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네요.”
“…”
천이라는 공헌도를 그렇게 막 쓸 수 있는 것도 그렇고, 오래 전의 일이라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는 말도 그렇고. 다시 한 번 미엘이 보통 집행자는 아니구나 하는 얘기가 피부에 와닿는다.
장비를 착용한 셋은 곧바로 이동스킬을 펼쳐 시가지를 가로지른 다음 어전 토너먼트 때문인지 경비가 강화된 성벽을 넘어 성 밖으로 향했다. 보초를 서고 있던 병사들은 자신들의 근처를 세 명이나 되는 집행자가 통과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으리라.
“헉… 헉…”
역시 도핑을 할 걸 그랬나. 그동안의 수련 성과를 확인해 보겠다고 도핑도 없이 움직였건만 아무래도 무리였던 모양이다.
“이곳인 모양이네요.”
화살표가 가리킨 장소에는 불에 탄 것으로 보이는 물레방앗간의 흔적이 있었다. 미엘은 타고 남은 재에 다가가 가만히 만져 보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시간이 꽤 지난 것 같네요. 진님, 혹시 남은 흔적이 없나요?”
“그게…”
흔적이 있긴 하다. 하지만 이번엔 너무 많아서 문제다. 아마도 불이 나자 그것을 끄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모양인지, 이 부근은 온통 사람들의 발자국과 거기 남은 냄새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오고간 흔적이 너무 많습니다. 혹시, 그 미친놈들을 구분할 수 있는 특징이 없겠습니까?”
“음… 특징이라면 역시 불이겠죠. 미친놈들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힘이니까요.”
그러자 가만히 듣고 있던 크루그가 말했다.
“이미 능력을 잃었다면 그런 흔적이 남아있기는 어려울 텐데요.”
하지만 미엘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죠. 능력을 잃었기 때문에 놈은 더 불에 집착할 거에요. 게다가 본래 그 미친놈들이 쓰는 불은 권능이라 오히려 흔적이 잘 남지 않아요. 능력이 만약 온전했더라면, 이렇게 타다 남은 기둥 같은 건 남아 있지도 않았을 거에요.”
“과연.”
결국 이 미친놈은 방화범이란 얘기가 된다.
계절 자체가 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초겨울. 게다가 도시 안은 물론이고, 도시 밖까지 각 기사단의 숙영지들이 가득 들어차 있다. 만약 바람이 적당히 부는 밤에 의도적이고 대대적인 방화가 일어나게 되면 단순히 집 몇 채, 천막 몇 개 타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지부장이 급히 임무를 맡긴 이유가 있었군요.”
형진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다시 신중하게 남아 있는 냄새를 추적했다.
다른 사람들은 불을 끄기 위해 몰려들었겠지만, 하나쯤은 불을 지른 자의 흔적이 남아 있을 거란 생각에.
잠시 불탄 물레방앗간 주위를 세심하게 살피던 형진은 마침내, 불과 연기 냄새가 미묘하게 뒤섞인 발자국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찾았습니다.”
“와, 역시 진님이세요. 그럼 바로 추적하도록 하죠.”
호들갑스러운 미엘의 반응이 뭔가 좀 의심스럽다. 아마 형진이 따라오지 않았어도 추적할 기술 한두 개쯤은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느낌이 든다고 하면 너무 과한 생각일까.
“잠깐만요. 그 전에 도핑을 좀 하도록 하겠습니다.”
형진은 인벤토리에서 전투식량과는 다른 용기에 담긴 요리를 꺼냈다.
“그건…”
“제가 쓰려고 특별히 준비해둔 특제 요리입니다. 얼마 없으니까, 어디 가서 먹어봤다고 그러지 마세요. 특히 제랄딘 공녀님한테는 비밀입니다. 만들고 싶다고 해서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거든요.”
“와아.”
살짝 과장이 섞이긴 했지만 운이 뒷받침 되어야 만들 수 있다는 얘기는 거짓이 아니다. 이것 역시 장인 이상의 등급에서 발생하는 보너스인데, 낮은 확률로 본래 만들고자 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맛있고 효능이 뛰어난 작품이 나오는 경우가 있다. 이른바 마스터피스다.
마스터피스라고 해서 버프 종류가 더 늘어난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대신, 같은 버프라도 증폭되는 퍼센티지가 작게는 5퍼센트에서 크게는 20퍼센트까지 차이가 난다. 이쯤 되면 사실상 명장 등급에서 버프 중첩이 일어났을 때와 비슷할 정도의 효과다. 물론 명장이 되면 이런 특제 음식으로 인한 버프마저 중첩이 되니 훨씬 더 무시무시해진다. 잘만 활용하면 백퍼센트 이백퍼센트 증폭도 꿈이 아닌 것이다.
미엘과 크루그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냥 요리도 엄청난데 특제 요리라니, 특히 낙인 갱신 이전의 경험을 떠올린 미엘은 그 때의 기억이 다시 떠올린 탓인지 형진이 꺼내서 내민 요리의 냄새에 정신마저 혼미해지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시간 없습니다. 얼른 마치고 돌아가서 쉬어야죠.”
어서 안 먹고 뭐하느냐는 형진의 말을 듣고서야, 미엘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용기를 집어들었고, 크루그 역시 그 뒤를 따랐다.
닫힌 뚜껑 안쪽에서 은근하게 흘러나오는 냄새만으로도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뚜껑을 열자 미엘과 크루그는 눈앞에서 마치 맛 자체가 형상화되어 빛이 확 터져 나오는 듯한 착각을 느껴야만 했다.
방금 막 요리를 한 것처럼 지글거리는 소리마저 울려 퍼지고, 차가운 밤공기에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그 요리들의 모습을 미엘과 크루그는 넋 놓고 지켜봐야만 했다.
“식으면 맛없습니다. 맛이 없어지면 효과도 줄어들게 되지요. 어서 드십시오.”
언제 챙겨놨는지 포크를 하나씩 건네주자, 미엘은 고맙다는 말조차 하지 못한 채 요리를 조심스럽게 떠올려 입 안에 넣었다.
순간, 미엘은 보았다.
자신의 몸에서 알 수 없는 빛의 폭발이 터져 나와 창공을 가로지르며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듯한 환상을.
환상? 아니다. 이게 환상이 맞는 건지조차 미엘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빛의 폭발과 동시에 미엘은 몸 안에서 미친 듯이 끓어오르기 시작하는 전율스러운 힘을 깨달았다.
이게 요리라고?
이게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요리라고?
아니다. 이건 기적이다. 사람의 손으로 이런 것을 만들 수 있을 리가 없다. 신. 그래, 알지 못하는 어딘가의 신이 요리에 장난을 친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모든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용기 안에 담겨져 있던 접시는 순식간에 비워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음식을 다 먹고 나서야 미엘과 크루그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낙인의 문제는 해결된 것이 아니었나. 도대체 이건…
아니다. 그때처럼 완전히 감각이 다른 세계로 흘러가는 듯한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 하지만 손을 멈출 수가 없었다. 마치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지배하는 것처럼 뻔히 다 보고 느끼고 있는데도 손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건 요리가 아니다. 이걸 단순한 요리라고 하는 것 자체가 신에 대한 모욕이다. 그렇다. 이것은 신에게 바쳐지기 위해 만들어진, 그런 성찬이어야만 한다. 그 정도가 아니고서는 자신들이 느끼는 이 모든 감각은 정의될 수 없다.
“다, 당신은… 도대체…”
“뭐죠. 이 요리는 도대체…”
미엘은 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낙인의 갱신이 이루어지기 전에 이 음식을 맛보았다면, 그녀는 참지 못하고 본신을 드러낸 채 이성을 잃고 형진에게 달려들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건 정말 여러모로 난감한 일이다. 여러모로.
“후아… 역시 화끈하군요. 역시 추운 겨울엔 특제 요리가 제격이죠.”
뭐라는 거야, 이 남자는. 이런 요리를 단순히 난로 대용으로 쓴다는 얘긴가.
확실히 몸에서 불길이 후끈후끈 치솟아 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긴 하다. 쌀쌀한 날씨에 대비해 조금 두툼하게 입고 있는 복장들이 다소 덥게 느껴질 정도라고나 해야 하나.
“바로 추적하겠습니다.”
몸이 가볍다. 단순히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요리들로 구성된 접시 하나를 비웠을 뿐인데, 마치 이전의 무겁던 몸을 벗어버리고 다시 새로 태어난 몸을 받아 움직이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과도한 버프를 하면 몸의 성능을 정신이나 감각이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문제가 생기기도 하는데, 이 요리는 그런 부작용조차 없다. 그야말로 신을 위해 만들어진 성찬. 이 완벽함을 도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좋단 말인가.
미엘이 그렇게 다소 복잡한 기분으로 뒤를 따르는 도중에도 형진은 도핑으로 가벼워진 몸으로 이동스킬을 최대한 발휘해 남겨진 흔적을 추적했다. 다소 시간이 흘러서 흔적이 흐릿해져 있기는 했지만, 그렇게 얼마쯤 진행하자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또렷해지기 시작한다.
[찾았습니다.]마침내 대상을 인지한 형진이 그렇게 메시지를 보내며 멈춰 서자, 미엘과 크루그는 화들짝 정신을 차리면서 목표를 확인했다.
그 인물은 작은 골짜기 안에서 커다란 모닥불을 피워놓고 뭐라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누굴 향한 기도인지, 아니면 누굴 향한 저주인지 모를 말과 함께, 기이하고 알 수 없는 기운이 놈의 몸으로부터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부족해. 부족해. 부족해. 부족해. 부족해. 부족해. 부족해…”
그 중얼거림을 인지하는 순간 미엘과 크루그의 표정은 와락 일그러지고 말았다.
“저놈… 설마.”
“이런!”
형진은 뭘 하려는 건가 싶어 좀 더 지켜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상대의 모습을 보는 순간 크루그는 곧바로 그림자 속으로 꺼지는 듯한 모습으로 상대에게 달려들었고, 미엘은 곧바로 마법을 발현해 강렬한 전격으로 상대를 공격했다.
짜자작!
미엘의 손으로부터 뻗어 나온 강렬한 전격은 허공을 가로지르며 날아가 목표를 단숨에 지져버렸고, 그 잔광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놈의 등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크루그가 손에 들린 단검으로 뒷목과 뒤통수가 만나는 곳의 움푹 들어간 부분을 향해 단검을 찔렀다.
푸학!
하지만 크루그의 그 기습은 아슬아슬하게 빗나가며 살갗을 찢어놓는데 그치고 말았고, 목표는 그대로 몸을 던지듯 불길 속으로 뛰어들고 말았다.
“미친놈! 소신공양이라니!”
보통 사람의 몸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양 중에서도 최고로 치는 것은 바로 자신의 몸을 스스로 불에 태우는 소신공양이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소신공양은 파괴와 재생의 구현자들이 스스로의 몸을 불태워 신에게 바침으로서 자신의 몸 안에 신을 강림시키는 의식이라 할 수 있다. 다른 모든 신들의 경우 강림을 이루기 위해서는 여러모로 복잡한 과정이 필요한데 반해, 이 미친놈들은 스스로의 몸을 바칠 각오만 되어 있다면 언제든 신의 힘을 지상에 강림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물론 어디까지나 가능하다는 얘기다.
미친놈들이 신봉하는 자답게, 파괴와 재생은 부른다고 막 나오거나 하는 그런 신이 아니다. 절차와 형식은 다른 어떤 신들보다 간단하지만, 시도한다고 무조건 강림하지 않는다. 딱히 조건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자기 내키는 대로. 모습을 나타내고 싶으면 나타내고, 그렇지 않으면 설사 백만명이 소신공양을 해도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만에 하나, 진실로 그 존재를 강림시키는 것이 성공한다면 그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재앙이 된다. 그 신의 이름 가운데 하나처럼, 완전한 파괴만이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으하하하하! 소용없다! 누구도 날 막을 수 없다! 이런 빌어먹을 세상 따위 불타 없어지라지! 다 죽어버려!”
놈은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어 그렇게 외쳤다. 온몸에 불이 붙어 타들어 가면서도 그렇게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리며 자신에게 파괴의 힘이 강림할 거라 믿었다.
“미친. 시작부터 파괴신 강림이냐? 무슨 스토리가 이따위야!”
뒤늦게서야 상황을 깨달은 형진은 그렇게 외치며 온몸에 불이 붙은 채 미친 듯이 웃고 있는 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미엘이나 크루그도 마찬가지였지만, 다음 순간 알 수 없는 강렬한 힘이 놈의 몸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며 그들을 세차게 밀어낸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그 미친놈이 나의 부름에 응했다! 그래야지! 그래야 미친놈들의 신답지! 으하하하하하하하!”
“젠장!”
놈의 몸은 어느새 밝고 거대한 불꽃으로 변해 있었다. 미엘은 그것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지금은 부작용을 논할 때가 아니다. 어서 이 놈을 막지 못하면 한 나라의 수도가 전부 잿더미로 변해 버린다!
으득.
미엘은 변신을 준비하며 입고 있던 옷자락의 앞섶을 움켜 쥐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
그녀의 앞으로 누군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마치 이전에도 한 번 본 적이 있던 그런 뒷모습을 한 채, 그 사람은 뿜어져 나오는 거대한 힘을 뚫고 앞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진?”
그렇다. 지금 이순간 그녀의 앞으로 걸어 나온 것은 바로 진이라는 남자였다.
진은 손에 쥔 집행자의 단검을 앞으로 내민 채 그렇게 앞으로 나섰다. 그렇게 온 몸에서 백열하는 불꽃을 피워 올리고 있는 남자에게 다가가더니,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놈의 심장에 그대로 단검을 푹 하고 박아버렸다.
“너, 너… 어떻게… 어떻게 인간 따위가 신의 힘을…”
미친놈은 놀람에 떨며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마치 누군가의 숨결에 훅 하고 꺼지는 촛불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진은 그렇게 갑자기 불꽃과 힘이 전부 사라진 공간을 바라보며 코웃음을 쳤다.
“신은 얼어 죽을. 템도 못 떨구는 잡몹 주제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