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70
70====================
15. 라야
이름도 모르는 미친놈으로서는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의 몸을 불태워 신을 강림시키다가 영문도 모를 일격을 맞고 허무하게 사라져 버린 마당에, 템도 못 떨구는 잡몹 취급까지 당했으니 말이다.
사실 템이 나오지 않은 건 이 미친놈의 탓도 아니고 강림 중이던 신의 탓도 아니다. 어디까지나 인스턴트 킬의 대상이 이런 개체가 아닌, ‘파괴와 재생의 불’이었기 때문이다.
인스턴트 킬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템 드랍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는 결국 단 하나, 그 대상이 현상이나 스킬처럼 생명 없는 존재일 때이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형진의 단검은 완전한 강림이 이루어지기 위한 준비 단계의 불 그 자체를 찔렀고, 이 때문에 인스턴트 킬 판정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룻이 나타나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소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쨌든 대상이 제거되었으니 의뢰는 성공한 것으로 인정된 것이다.
[축하합니다!] -‘수배자 처형’ 퀘스트를 무사히 완수하였습니다.-퀘스트 보상으로 ‘에데루스 은화’ 20개가 분배되었습니다.
-퀘스트 보상으로 ‘팩션 공헌도’가 30이 분배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미친놈의 강림을 막은 것에 대한 포상으로 팩션 공헌도 500이 추가됩니다!
-축하합니다! 공포와 죽음께서 당신의 업적을 인정하였습니다.
-축하합니다! 업적 보너스로 한 달간 의뢰 달성시 팩션 공헌도를 두 배로 습득 가능합니다.
-축하합니다! ‘미친놈의 강림을 막은’ 칭호가 부여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한방에 미친놈의 불을 꺼버린’ 칭호가 부여되었습니다.
-‘미친놈의 강림을 막은’ 칭호 효과: 화염저항 +20퍼센트.
-‘한방에 미친놈의 불을 꺼버린’ 칭호 효과: 화염저항 +50퍼센트.
퀘스트 자체도 일반적인 수배자 처형보다 보상이 몇 배는 많았는데, 파괴신의 강림을 막은 것이 인정받아 추가 보상이 이루어졌다. 게다가 그 보상 중에는 난생처음 보는 칭호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어, 업적?”
“칭호라고?”
함께 임무 보상을 확인하던 크루크와 미엘마저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럴 수밖에 없다. 크루그는 물론이고, 꽤 오랫동안 집행자의 역할을 수행해 왔던 미엘조차 업적 달성이나 칭호 획득을 본 것은 손에 꼽을 정도다.
하지만 크루그와 미엘은 형진과는 달리 칭호를 하나 밖에 획득하지 못했다. 두 사람에게는 ‘미친놈의 강림을 막은’ 칭호 밖에 나오지 않은데 반해, 형진은 ‘한방에 미친놈의 불을 꺼버린’ 칭호가 추가된 것이다. 아쉽게도 칭호 효과는 중첩이 되지 않지만, 그래도 다른 두 사람보다 훨씬 우월한 칭호를 얻게 된 것은 분명 이득이다.
게다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업적알림] 그리칸 지부의 진, 미엘, 크루그 성도가 라야에서 파괴와 재생의 강림을 막았습니다! 공포와 죽음께서 이들의 업적에 매우 기뻐하십니다!딸랑 한 줄짜리 공지가 의뢰창 상단에 스쳐 지나간 것뿐이지만, 이것은 모든 집행자들에게 진의 이름이 알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허… 저 업적알림 뜨는 거 처음 봐요.”
“나도 몇 번 못 봤어. 가장 최근의 일이 총괄 지부장의 국왕 암살이었을 정도니까.”
“우와.”
아마도 사람들은 공지에 나타난 미엘의 이름을 보고 이번 업적을 달성한 것이 그녀이고, 다른 둘은 운 좋게 옆에 있다가 얻어 걸린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상은 정반대. 물론 강림을 막기 위해 본신을 드러내는 것을 각오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미처 변신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진의 일격에 의해 강림을 진행 중이던 미친놈이 단숨에 소멸되어 버렸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과연 다른 집행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업적 보너스… 두 분도 이거 떴나요?”
하지만 막상 그런 놀라운 일을 해낸 형진은 룻이 생성되지 않은 것이 아쉬운지 툴툴거리는 목소리로 미엘과 크루그에게 말을 걸었다.
“네. 일단은…”
“저도요.”
둘이 순순히 긍정의 뜻을 비치자, 형진은 다시 물었다.
“어떻게 하실래요? 팩션 공헌도 두 배라는데, 이거 그냥 버리긴 아쉽지 않아요?”
그건 그렇다. 업적이라는 것이 달성하고 싶다고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만큼, 활용하지 않으면 그만큼 손해다.
“전 상관없어요. 형이 의뢰를 수행하고 싶다면 도와줄게요. 빚은 바로바로 갚는 게 신조라.”
크루그는 선선히 그렇게 대답했다. 솔직히 자신의 이름이 공지로 나가는 것을 보고 뜨끔했지만 어쨌든 업적에 무임승차한 건 분명한 사실이니까. 그나마 본명이 나가지 않은 것은 아마도 공포와 죽음의 배려가 아닐까.
“저도 도와드릴게요. 솔직히 진님께 제가 도움이 될까 두렵긴 하지만요.”
미엘도 그렇게 선선히 대답했다. 사실 제랄딘의 일 때문에 수도에 오긴 했어도, 그녀는 딱히 귀족 사회에서의 일을 즐기지 않는다. 특히나 본신을 드러내지 않은 그녀의 모습은 특수한 취향의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다 보니, 종종 노예 같은 것으로 인식하고 자신에게 팔아달라는 식의 부탁을 해오는 경우마저 있어서, 가급적이면 귀족들의 회합에는 제랄딘과 함께 동석하는 일을 자제하는 편이다.
참고로 가장 최근에 그녀를 팔아달라는 식의 말을 전해 왔던 인물은 바로 그 망할 황자다. 잘하면 배우자가 될지도 모르는 여인에게 그런 말을 전하다니, 그것만 봐도 이 황자가 얼마나 정신 나간 인물인지 알 수 있는 일이다.
“하하, 그냥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대단하긴요.”
“…”
형진은 그렇게 웃으며 얼버무리려고 했지만, 미엘의 눈에 담긴 의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전에 밴시를 한 방에 처리했을 때만 해도 단순히 운이 좋았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조금은 있었다. 누가 봐도 형진은 추적 이외에는 전투 자체에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이동기조차 없어서 기젤이나 오귀스테에게 데롱데롱 매달려 가던 모습은 차치하고서라도, 전투 상황에서의 움직임이나 반응 같은 것만 봐도 초보티가 물씬 풍길 정도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도 않은 시점에 무려 파괴신의 강림을 같은 방식으로 저지했다. 자신조차도 본신을 드러내지 않은 상태에서는 감히 접근할 수 있을까 싶은 힘의 폭풍을 유유히 뚫고 나가서 이미 변신이 시작된 상대를 일격에 처치해 버린 것이다.
이게 과연 우연일까? 아마 직접 보지 않은 사람은 믿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두 번이나 그 생생한 현장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미엘은 분명히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도대체 뭐지, 이 남자.
처음에는 궁금증이, 두 번째는 호기심이, 그리고 마지막에는 알 수 없는 흥분이 미엘의 몸을 달구기 시작한다.
“그럼 일단 오늘은 이만 돌아갈까요.”
“그러죠.”
그렇지 않아도 늦은 시간에 임무를 시작한 데다 추적이니 뭐니 해서 시간을 많이 소요한 탓에 이미 꽤 밤이 깊어 있었다. 때문에 세 사람은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이기로 하고, 일단 제랄딘의 저택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아, 전 잠시 뭣 좀 살 게 있어서 시장에 들렸다 가겠습니다. 두 분 먼저 들어가세요.”
“길은 아시죠?”
“네, 대충.”
일단 미엘과 크루그를 먼저 돌려보낸 형진은 수도답게 깊은 밤에도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시장으로 들어섰다.
“후후후후, 기껏 두 배 보너스가 터졌는데 그냥 들어가서 잘 수는 없는 일이지.”
형진이 느닷없이 시장을 찾은 이유는 바로 의뢰 때문이다.
미엘이나 크루그 같은 사람들은 의뢰라고 하면 이번에 수행한 수배자 처형 같은 것을 먼저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형진이 지금까지 수행한 대부분의 의뢰는 물품 조달 같은 보조적인 임무이다. 그리고 이런 보조적인 임무들은 해당 물품을 구하는 수단에 제한이 없다.
즉, 필요하다면 굳이 해당 물품들을 채집 등의 방법으로 직접 구하는 대신 사서 해결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물론 이건 수도처럼 방대한 규모와 종류의 물품을 취급하는 대규모 시장이 있는 곳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집행자들은 그나마도 하지 않는다. 시장을 돌아다니며 일일이 물품을 구매해서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인벤토리에 넣는 것도 꽤 귀찮은 일이기 때문이다.
원래는 이런 식으로 물품들을 사서 의뢰를 달성하는 것은 별로 이득이 남지 않는 짓이다. 특히나 물품 조달 의뢰 같은 것은 보상이 박한 편이라 규모가 좀 있는 의뢰가 아니고서는 동화 한 개만큼의 이득을 남기기도 쉽지 않다. 그나마도 수고로움에 비하면 거의 보상이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
간단하게 보상을 획득할 수 있음에도 집행자들이 마다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셈이다.
하지만 형진은 예외다.
“이 양가죽 열 장만 주세요.”
“통나무 스무 개 얼마죠?”
“아교 두 통 부탁합니다.”
“이거 수선화 뿌리인가요? 스무 개만 주실래요?”
그리칸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형진의 쇼핑이 이곳에서도 이루어졌다. 간간히 좋은 식재료가 있으면 그것도 사는 것은 덤.
돈이야 전투식량 납품으로 썩어나는 상황. 그렇다고 돈이 축나는 것도 아니다. 최소한 본전 이상은 보상으로 돌아오니 공헌도 두 배 보너스를 생각하면 확실히 남는 장사다. 나중에 계급이 오르면 공헌도를 돈처럼 쓸 수 있다는 것도 알았으니, 이럴 때는 팍팍 벌어둬야 한다.
[축하합니다!] -‘물품 조달’ 퀘스트를 무사히 완수하였습니다.-퀘스트 보상으로 ‘반트 동화’ 2개를 획득했습니다.
-퀘스트 보상으로 ‘팩션 공헌도’가 4를 획득했습니다.
-축하합니다! 업적 보상으로 공헌도 4를 추가로 획득합니다!
의뢰창에 쌓여있던 물품 조달 의뢰가 순식간에 사라져 간다. 물론 사라지면 사라지는 만큼 새로운 의뢰가 채워지고 있었지만, 그보다 형진이 의뢰를 해결하는 속도가 더 빠를 정도다.
순식간에 공헌도를 이백 가까이 벌었다. 쌓여가는 공헌도를 보며 뿌듯해 하던 형진은 어느새 시간이 너무 많이 늦었음을 깨닫고 나서야 아쉬움을 삼키며 저택으로 돌아 갔다.
한편, 크루그와 헤어져 제랄딘의 거처에 마련된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미엘은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었다.
“으으응…”
아까만 해도 괜찮은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몸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단순히 열이 난다기 보다, 몸 안에서 불덩이 같은 것이 치솟는 느낌이랄까.
“왜 이러지. 본신으로 돌아가지도 않았는데.”
미엘이 본신을 숨기고 굳이 지금의 모습으로 지내는 것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그녀의 종족은 수가 적다. 워낙에 수가 적어서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와중에도 동족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보통 이 정도로 수가 적으면 종족 유지 자체가 힘든 법. 그래서 그녀의 종족은 일정한 나이가 되면 강렬한 발정기가 찾아온다. 종족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수단인 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붙잡고 후손을 만들 수는 없는 일. 때문에 그것을 원치 않는다면 지금의 미엘처럼 본신을 숨기고 다른 모습으로 지내게 된다. 본래의 힘을 온전히 사용하지 못하는 패널티를 얻는 대신, 원하는 배우자가 나타날 때까지 그런 식으로 발정기를 억누르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본신으로 돌아간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몸 속에서 끓어오르는 열기 때문에 잠을 설치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문제는 바로 형진이 임무 수행 중에 도핑하라고 주었던 요리 때문이었다.
그 요리를 먹는 순간 몸 안에서 힘이 끓어 넘치자, 모처럼 변신을 통해 억누르고 있던 몸 안의 열기가 함께 끓어 넘치기 시작한 것이다.
“아… 미치겠네.”
침대 위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미엘의 감은 눈 속에 한 남자의 등이 자꾸만 비춰진다. 자신의 앞을 가로 막고 있는 어떤 사람의 넓은 등이.
본능은 자꾸만 그 남자에게 가라고 외치고 있다. 가서 이 끓어오르는 열기를 식히라고 외치고 있다. 그의 정을 받아들여, 종족 유지의 의무를 수행하고 자유로워지라고 말하고 있다.
그럴까. 그냥 저질러 버리고 이 지긋지긋한 발정기로부터 벗어나 버릴까.
어차피 이런 몸으로 태어난 이상, 한번은 겪어야 할 일이니 그냥 지금 저질러 버릴까.
자꾸만 그런 생각을 떠올리게 만들면서 미엘을 괴롭히던 열기는 요리의 버프 시간이 끝나고서도 두 시간이 넘어서야 비로소 가라앉기 시작했다.
“후우…”
정신적으로 완전히 지쳐버린 미엘은 그제서야 비로소 잠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겨우 잠드는 순간 꿈속에서 다시 한 남자를 만나고 말았다. 밤새 뒤척이며 한 남자를 계속 떠올리다 보니, 그 생각이 지나쳐 꿈으로 나타나 버리고 만 것이다.
그냥 만나기만 했으면 상관 없다. 하지만 풀지 못한 욕구는 꿈이라는 방식을 통해 그것을 해결하고자 했다.
“…”
잠에서 깨어났을 때, 미엘은 자신이 이른바 몽정이라는 것을 경험했음을 깨달았다. 남자도 아닌 자신이, 게다가 본신도 아닌 이런 미성숙한 몸으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쳤어.”
미엘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지난 밤에 형진에게 했던 약속을 그제서야 다시 떠올렸다.
난감하다. 다시 형진의 얼굴을 마주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얼굴이 화끈거린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를 정도로, 미엘은 당황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