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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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살려줘!
몇 시간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그 몇 시간조차 생전 처음 겪어보는 기이한 체험으로 인해 영 기분이 찜찜하기 이를 데 없다. 물론 언젠가는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여지껏 제대로 감정의 교류조차 없던 상대를 강제로 덮치는 꿈을 꿔버렸으니 기분이 개운할 리가 없는 일이다.
세수를 하고,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찜찜한 기분은 지워지질 않는다. 머리카락은 물론이고 피부 역시 부석거리는 것이 자꾸만 신경 쓰인다.
“알림 봤어. 느닷없이 미친놈이라니.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죄송해요. 아가씨.”
제랄딘에게 있어 미엘은 단순한 시녀가 아니다. 친구이며, 언니이며, 동생이기도 하고, 또한 어머니나 마찬가지다. 어떻게 보면 현재의 제랄딘 공녀라는 인간을 완성하는데 있어 친 가족보다도 더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고, 실제로 제랄딘이 집행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미엘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괜히 오귀스트가 둘을 세트라고 표현한 것이 아니다.
미엘은 살짝 화가 난 듯한 표정의 제랄딘을 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외롭다고 혼자 훌쩍거리던 그 여린 소녀가 이렇게 강인하고 아름다운 처녀가 되었다는 사실이 어쩐지 뿌듯하게 느껴져서다.
“웃지 마. 정들어.”
그렇게 말하고는 투덜거리며 식사로 시선을 옮기는 제랄딘의 모습에 미엘은 이렇게 말했다.
“어제 파티가 그렇게 끔찍했어요?”
제랄딘이 집행자들의 일에 끼지 못한 건 도착하기가 무섭게 열린 파티 때문이다. 파티의 목적 자체가 그녀의 수도 귀환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니 빠질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말도 마. 일부러 몸매가 드러나지 않는 드레스로 입고 갔는데도, 무슨 투시 능력이라도 있는지 음흉한 시선으로 위아래를 훑어보며 입맛을 다시는 노친네들 때문에 폭발 직전이었다고.”
“저런.”
이런 식으로 투정을 부릴 수 있는 것도 미엘 앞에서 뿐이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라도 털어놓고 풀지 않았다면 이 나라 수도의 남자 귀족들 대부분이 그녀의 손에 암살당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미엘은 그 모든 남자 귀족들의 수호신 같은 역할을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수행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후… 오늘은 살롱 파티에 가야 해. 어제는 배 나온 아저씨들, 오늘은 퍼진 아줌마들. 무슨 사람 불러놓고 품평회하는 것도 아니고 짜증나 죽겠어.”
미엘은 쓴웃음을 짓더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고개를 떨구고 있는 제랄딘의 뒤로 다가간 다음, 뒤에서 그녀를 가만히 안아주며 속삭였다.
“힘내세요.”
그러자 제랄딘은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미엘에게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오늘은 나랑 같이 가지 않을래?”
세상에 누가 있어 제랄딘의 이런 허물없는 표정을 볼 수 있을까. 미엘은 가만히 제랄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저 파티 같은 거 싫어하는 거 아시면서.”
“오늘은 거의 여자들만 모일 테니까 좀 나을 거야. 응? 같이 가자. 미엘 언니.”
“…”
제랄딘이 미엘을 언니라고 부를 때는 정말 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다. 보통 이런 상황까지 오면 미엘도 못 이긴 척 들어주는 편이지만, 아쉽게도 오늘은 선약이 있다.
“그게… 당분간 진님의 의뢰를 도와주기로 했거든요.”
“진님?”
미엘의 말에 제랄딘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진님이 왜?”
미엘은 괜히 주위를 둘러보는 척 하고는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사실, 어제 미친놈의 강림을 막은 건 제가 아니라 진님이거든요.”
“뭐?”
무슨 대단한 비밀이길래 이렇게 목소리를 낮추는 시늉까지 하나 싶었던 제랄딘은 눈이 동그래졌다.
“정말이야?”
“그럼요.”
“그게 말이 돼?”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사실이에요.”
“와…”
제랄딘은 작은 소리로 그렇게 탄성을 터뜨리다가 이내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실은 걱정했어.”
“왜요?”
“혹시 본신을 드러내면서 뭔가 일이 생긴 거 아닌가 싶었거든. 오늘 아침 모습도 좀 이상하고 그래서.”
“…”
하기야 함께 지낸 세월이 얼만데 미엘의 상태가 이상한 걸 제랄딘이 알아보지 못하겠는가. 하지만 미엘은 그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만약 자신이 남자 때문에 밤잠을 설치고 몽정까지 했다는 걸 알면 이 아가씨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생각하면서.
“그런데 왜 의뢰를 도와주려는 거야?”
“공짜로 업적이랑 칭호를 얻었으니 답례는 해야죠.”
“하긴.”
둘 만의 식사가 끝나자 시녀들이 들이닥쳐 파티에 참가하기 위한 제랄딘의 단장을 돕기 시작했다.
제랄딘의 몸단장은 비밀스럽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랄딘이 몸단장 과정을 공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의 몸단장 과정은 그 자체로도 은밀한 상상을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는 일이고, 이 과정을 공개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 대상과 친밀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때문에 수도 라야의 사교계에서는 과연 누가 제랄딘의 몸단장을 처음으로 지켜볼 수 있는 사내가 될 수 있을지를 놓고 미혼의 청년 귀족들 사이에서 내기마저 이루어지고 있을 정도다. 물론, 그런 식으로 당사자의 의향과는 전혀 상관없이 벌어지는 내기 따위, 제랄딘에게는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오늘은 어떤 드레스를?”
“음… 그냥 저걸로.”
오늘 제랄딘이 고른 드레스는 엠파이어 드레스다. 가슴 바로 아래에서 허리선이 시작되는 이 드레스는 몸매가 부각되지 않고 조금 수수한 느낌을 준다. 물론 그 수수한 느낌이란 것은 어디까지나 보편적인 얘기고, 제랄딘이 입게 되면 그야말로 여신 같은 위엄을 뿜어낸다. 제랄딘은 누군가를 위압할 필요가 있을 경우, 이 드레스를 입는다. 아무래도 오늘 살롱 파티에 참석하는 귀부인들은 좀 주눅이 들지도 모르겠다.
제랄딘이 몸단장을 마치고 나서야 미엘은 저택을 벗어나 형진이 머물고 있는 별채로 향할 수 있었다.
“아, 어서 오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슬슬 시작해 볼까 하고 준비하던 참이었습니다.”
별채 주위를 둘러싼 울타리 문을 열고 들어서는 미엘의 모습을 발견한 형진이 반갑게 그녀를 맞이한다.
“미엘님! 어서 오세요. 식사는 하셨어요?”
지금 시간이 얼만데 아직 밥도 안 먹었을까. 하지만 미엘은 자신을 반갑게 맞이하는 귀여운 아가씨의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미안한 감정이 느꼈다.
“네, 간단하게 먹고 오는 중이에요.”
“그래요? 아쉽네요. 오늘 아침 요리가 끝내주게 맛있거든요.”
“…”
요리라는 말에 미엘은 흠칫 놀라고 말았다. 어젯밤 그 난리를 친 원인이 무엇이던가. 바로 진이 도핑하라고 주었던 특제 요리가 아니었던가.
아닌게 아니라 향긋하고 맛깔스러운 냄새가 민감한 그녀의 후각을 자극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일단 코끝에 향기가 걸리자 마치 조건 반사처럼 입 안에 침이 고이기 시작한다.
윽.
안 돼. 어제 그 난리를 쳤던 걸 벌써 잊었나. 만약 여기서 저 향기에 굴복하고 만다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미엘은 손으로 치마 자락을 꾹 움켜쥐고는 필사적으로 기절할 것 같은 느낌의 유혹적인 향기의 손짓을 필사적으로 견뎌내야만 했다.
“그러지 말고 한 입 들어 보시죠. 오늘은 운이 좋으려고 그러는지 아침부터 특제 요리가 터져 나왔지 뭡니까. 흔치 않은 기회이니 들어보시죠.”
여, 역시. 역시 그랬던 거다. 어쩐지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미칠 것 같더라니. 이 향기는 그 망할 특제 요리의 그것이었다!
“괘, 괜찮아요. 이미 많이 먹고 와서.”
어떻게 특제 요리를 다시 섭취하는 것을 견뎌내긴 했지만, 별채 식구들이 맛있게 아침 식사 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완전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꼴딱 꼴딱 넘어가는 침을 억지로 삼키며 버티고 있는데, 문득 유아가 아무래도 안 되겠던지 잔 하나를 그녀에게 내민다.
“그럼 이거라도 드세요.”
“이건?”
“차는 제가 끓일 줄 모르잖아요. 그래서 음료로 과일즙을 좀 내봤어요.”
“아, 감사합니다.”
이거라도 마시면서 버텨야지. 그래도 최소한 아무것도 안 먹고 이 고문 같은 상황을 견디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과일즙이라더니 꽤 향기롭다. 하나의 과일만 가지고 만든 것도 아닌 모양이고, 여러 가지를 섞은 모양인데 그 풍미가 범상치 않다. 게다가 은은하게 전해져 오는 생명의 기운이 담긴 신성력은 그 자체만으로도 그녀의 들끓는 식욕을 잠재우는 효과가 있었다.
과연 호구신, 아니 희망과 생명의 사제. 평범한 과일즙에도 이처럼 풍부한 생명력을 담을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한 실력이 아닐 수 없다.
“!”
그렇게 생각하며 과일즙을 입에 머금던 미엘은 갑자기 어젯밤처럼 자신의 몸 안에서 빛이 폭발해 터져 나와 하늘로 솟아 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고는 크게 놀랐다.
“이, 이거… 누가… 만들…”
몸 안에서 들끓기 시작한 힘에 놀라 그렇게 묻자, 유아는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이 만든 아침 식사를 즐기고 있는 형진을 가리켰다.
“그야 당연히…”
“…”
아뿔싸. 이런 함정에 빠지다니. 이곳이 그 망할 특제 요리의 복마전임을 어찌 잠시라도 잊고 있었단 말인가.
어제 분명히 그렇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특제 요리는 만들고 싶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그런데 고작해야 과일즙 따위가 특제 요리인 건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가.
큰일이다. 다시 지난 밤 겨우 견뎌냈던 몸 안의 열기가 다시 스멀스멀 치솟기 시작한다. 마치 어제 제대로 풀어내지 못한 것에 대한 한을 풀기라도 하려는 듯이 가슴 안 깊은 곳을 간질이며 열기가 치솟기 시작한 것이다.
“…”
미엘은 눈을 감은 채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그런 식으로라도 감각을 다른 곳으로 돌려 몸 안에서 끓어오르기 시작한 열기를 잊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눈을 감기가 무섭게 점차로 기억 속에서 지워져 가던 지난 밤 꿈속의 기억들이 마치 환영처럼 스멀스멀 떠오르기 시작한다.
기겁해서 얼른 눈을 떴다. 그러자 순간 식사중인 형진의 상체가 꿈속에서처럼 벗고 있는 모습이 되었다가 다시 본래대로 돌아온다.
위험하다. 이건 정말 위험하다.
“자, 잠깐… 산책 좀 하고 올게요.”
“그러시겠어요? 죄송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자기들끼리만 식사하고 있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던 형진은 선선히 그녀의 말을 받아들였다.
일단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별채 뒤쪽의 작은 연못가로 간 미엘은 다짜고짜 차가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아직 초겨울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새벽에는 살얼음이나 서릿발이 낄 정도로 추운 날씨다. 해가 뜨긴 했어도 쌀쌀한 건 마찬가지이고, 그것은 밤동안 차가운 공기에 노출되었던 연못물 역시 마찬가지다.
“후아아…”
곧바로 미엘의 주위에 마치 온천에 들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뿌연 수증기가 피어오른다. 어느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뻗어 나오던 열기가 그런 식으로 식혀지기 시작한 것이다.
“살았다.”
위험했다. 잠깐의 판단 실수로 그 저주스런 특제 요리를 또다시 입에 넣고 말다니. 자칫하면 유아의 눈앞에서 본신을 드러내고 형진을 덮쳐버리는 참극이 일어날 뻔했다.
그래선 안 되지. 안 되고 말고.
한참이나 그렇게 연못 물 속에서 열기를 식히던 미엘은 어느 정도 수습이 되었다 싶은 생각이 들 즈음이 되어서야 밖으로 나와 마법으로 옷과 몸의 물기를 날려 버렸다.
하지만 그건 고작 시작에 불과했다.
미엘은 이미 백 년이 넘은 시간 동안 살아왔다. 하지만 고작 한 달, 아니 하루가 이토록 길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그날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