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690
00690 156. 파란 =========================
모처럼의 요리 대회는 완전히 엉망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한 나라의 왕이 죽었다. 한가롭게 요리 대회의 승자를 결정할 때가 아닌 것이다.
공작의 명에 따라 저택의 출입은 완전히 통제되었고, 곧바로 왕궁에서 나온 사람들이 왕의 시신을 일단 손님용 침실 가운데 한곳으로 옮겼으며, 공작 가문의 기사들과 왕실의 호위 기사들이 그곳을 철통같이 지키기 시작했다.
“이상하군. 왕이 이곳에 와서 마신 것이라고는 이 물 한 잔 뿐이야. 하지만 이 물 안에는 아무런 독도 존재하지 않아.”
독을 마신 것이 아니라면 다른 증거라도 남아야 한다. 하지만 왕은 도착한 뒤로 줄곧 형진의 옆 자리에 앉아 있었고, 아무리 메시지로 제랄딘과 노닥거리고 있었다 한들 뭔가 이상한 기척이 있었다면 느끼지 못할 이유가 없다. 신은 동시에 몇 개의 아바타를 움직이는 것이 가능한 존재. 설사 형진이 느끼지 못했다 할지라도 이곳에는 또다른 여신마저 자리하고 있다. 무려 공포와 죽음이라는 이름의 여신이.
“뭔가 느껴지는 것 없어?”
“없어요.”
“그것 참 이상하군.”
공포와 죽음은 죄에 대한 공포를 느낄 수 있다. 사이코패스니 뭐니 하는 식으로 왜곡된 감정을 지닌 자라 해도 공포와 죽음의 이런 감각은 벗어나지 못한다. 그녀가 주관하는 공포는 일반적으로 일컬어지는 감각과는 다른, 좀 더 원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건 다시 말해… 이곳에 오기 전에 이미 중독되어 있었다는 뜻인가.”
“글쎄요. 그런 거라면 레나리스 왕녀가 느끼지 않았겠어요? 게다가 당신도 있었고.”
“하긴.”
안색이 좋지 않은 건 사실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갑자기 죽어버릴 정도는 아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일까.
곧바로 황실에 속한 마법사와 어의들이 기별을 받고 달려와 왕의 시체를 살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부패가 시작되어 버린 왕의 시체를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도무지 알 수가 없군요. 이런 독은 본 적조차 없습니다.”
“마법이나 저주의 흔적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지금까지는 본 적이 없는 새롭고 치명적인 독. 게다가 마법과 저주의 흔적 또한 없다. 이래서는 아무리 철통같은 보안이라도 당할 수밖에 없다. 덕분에 공작 가문의 책임은 조금 가벼워졌지만, 연회에 참가한 사람들의 안색은 도리어 어두워졌다. 이런 치명적인 독이 세상에 나왔다는 것은, 그것으로 인한 희생자가 더 늘어날 수도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첫째 왕자가 태자의 자리에서 밀려나고, 셋째 왕자가 그 자리에 앉게 되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정일 뿐 공식적으로 확정된 사항이 아니다. 즉, 다시 말해서 아직 라야바르트의 다음대 왕은 정해지지 않은 상황인 것이다.
“일이 공교롭게 되었군.”
상황이 이렇게 되면 가장 먼저 의심을 받게 되는 쪽은 당연히 첫째 왕자가 된다. 출생의 비밀이 발각되면서 유폐를 가장한 요양을 떠나는 것이 결정된 시점임을 고려하면, 이번에 왕이 죽으면서 가장 큰 이득을 보게 될 대상은 역시 첫째 왕자가 된다. 그가 직접 일을 모의하지는 않았더라도, 그와 관련된 세력 가운데 누군가가 저질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급한 상황이었어도, 설마 이런 식으로 뻔히 보이는 짓을 저질렀을까.
실제로도 연회장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입에서는 벌써부터 첫째 왕자의 이름이 조심스럽게 언급되고 있었다.
잠시 지나자 이번에는 왕실에서 가져온 석관 하나가 왕의 시체가 놓여진 침실로 들어갔다.
“보존 마법이 걸려 있는 석관입니다. 이미 늦어버린 것 같습니다만.”
“그렇군요.”
“괜찮으십니까. 그런 지독한 독이라면 옆에 있었던 사람에게도 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그 점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러모로 여신으로부터 은총을 입은 몸이라.”
“그렇군요.”
여신의 은총은 그렇다 쳐도 현재 이 자리에 있는 그의 몸은 무려 아바타이다. 어지간한 독은 통하지도 않고, 설령 통하더라도 아바타의 사용을 멈추고 폐기하면 그뿐이다. 그 점에 있어서만큼은 이 자리의 누구보다도 안전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사정을 모르는 공작은 정말로 크게 안도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 형진이 왕과 같은 꼴이 되어 버렸다면, 이것은 더 이상 라야바르트만의 문제가 아니게 된다. 자칫하면, 신들의 분노가 직접적으로 쏟아져 내릴 수도 있는 일이니까. 왕의 죽음은 분명 큰일이지만, 그것만은 어쨌든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물론 그런 국제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다행으로 생각하는 중이다. 자신의 하나 뿐인 딸이 친정에 왔다가 느닷없이 과부가 되는 일 같은 건 절대로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니까. 자칫하면 딸까지도 위험할 뻔했다고 생각하니, 속에서 분노마저 치밀 정도다.
“이번 일은… 저희 가문에 대한 도전입니다. 반드시 원흉을 찾아 벌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첫째 왕자가 지목되고 있는 상황임을 감안하면, 이것은 대담한 발언이 아닐 수 없었다. 필요하다면 첫째 왕자를 벌하겠다는 의미마저 담겨 있으니까. 하기야, 왕이 살아있었던 시점이라면 몰라도, 그렇지도 않은 상황이라면 왕가와 핏줄조차 이어지지 않은 거짓 왕자는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그러자면 첫째 왕자의 외가나 처가 역시 넘어서야겠지만.
형진은 슬쩍 제랄딘을 바라보았고,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돕겠습니다.”
“네? 하지만…”
“저 역시 사건이 벌어진 현장에 함께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 사건은 저를 노린 일이었는지도 모르지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음…”
어찌 보면 조금 억지랄 수도 있지만, 절대 아니라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적어도 범인이 잡히고 범행 이유를 확인해 보기 전에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것은 라야바르트에 대한 엘 파르드의 내정 간섭으로 비칠 소지도 있었다. 공작이 우려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문제다.
하지만 이것은 형진으로서도 물러날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은 그렇다 쳐도, 자신의 아이들이 방금 전과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그때 가서 왜 진작 미리 그 일에 대비하지 못했는가 하는 식의 후회를 해봐야 아무 의미 없는 일이다.
공작은 형진의 표정을 보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만류한다고 해서 물러서지 않으리란 것을 알아본 탓이다.
“알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감사합니다.”
왕의 시신은 곧바로 궁으로 옮겨졌지만, 연회장 안의 사람들은 신원은 물론이고 지니고 있는 소지품을 비롯한 모든 것을 세세하게 조사받아야만 했다. 형진과 제랄딘까지 참가해서 연회에 모인 사람들을 샅샅이 살폈지만, 역시나 아무런 단서도 찾아낼 수 없었다.
“기이하군요. 이렇게까지 단서가 전혀 드러나지 않다니.”
“일단은… 이들을 격리 수용한 뒤 동태를 살피는 편이 좋겠습니다. 어쨌든 이번 일에 가담한 자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풀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할 수 없군요.”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 대부분이 귀족들인 탓에 이 일은 절대로 간단하지 않았다. 공작은 왕궁과 협의하여 이들은 공작 가문의 저택과 왕궁에 일단 격리 수용하기로 결정했다.
연회에 참석한 자들에게서 단서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수사의 칼끝은 왕족들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다소 문제가 생겼다. 왕족 가운데 일부가 공작 역시 수사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선 탓이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어쨌든 사건이 벌어진 것은 제 저택이니 저 역시 용의 선상에 오르는 건 당연한 일이죠.”
“하지만, 그렇게 되면…”
공작은 잠시 고민하더니, 형진에게 고개를 숙이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차라리 잘 되었습니다. 벨크라드진 폐하. 정식으로 이번 일의 수사를 의뢰하고자 합니다. 받아주시겠습니까.”
“음…”
공작의 수사를 옆에서 돕는 것과, 전적으로 수사를 전담하는 건 커다란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이상 물러날 수도 없는 일. 다만 그러자면 미리 언질을 해둘 점이 몇 가지 있었다.
“하지만 제가 주도적으로 일을 진행한다면,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르게 될 겁니다. 괜찮겠습니까.”
형진의 말에 공작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오히려 바라는 바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이 일,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형진은 공작의 요청을 수락하고 본격적인 수사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의 수사 방식은 공작의 그것과는 달랐다.
“모여라.”
그의 명 한 마디에 수도 근처에서 활동하던 집행자와 수호자가 모여들었으며, 또한 주시자들 가운데 정예들이 불려나왔다.
신들의 추종자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세 부류로 일컬어지던 것이 집행자, 수호자, 그리고 구현자이다. 이 가운데 구현자는 파괴와 재생이 타락하면서 그 과정에서 소모되거나 자신들의 신을 따라 함께 언데드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이후 대대적인 토벌을 통해 타나토스 전역에서 완전히 척결되었으며, 넘어간 이들 또한 역공을 통해 완전히 토멸되어 사라져 버린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전에 구현자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는 주시자가 차지한 상황. 다시 말해, 지금 이순간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강력한 추종자 셋이 라야바르트의 수도 라야에 한꺼번에 모이게 된 것이다.
“찾아라. 작은 흔적이라도 가볍게 여기지 말고, 샅샅이 뒤져라.”
“알겠습니다.”
형진이 수사를 맡겠다고 나섰을 때만 해도 부하 한 명 없이 혼자 타국의 수도에 넘어와 있는 상태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한 마디가 떨어지는 순간 모습을 드러낸 수많은 추종자들의 모습에 입만 산 떨거지 왕족들은 창백하게 질린 채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엘 파르드의 국왕이 신들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는 해도, 설마 이런 식으로 추종자들을 순식간에 불러 모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형진이 손을 한번 펼치자 수많은 작은 구슬 같은 것이 하늘로 떠올라 수도 라야 주변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왕궁이나 사건이 벌어진 저택 주변만이 아니라, 수도 인근의 전역을 철통같은 감시 체계 안에 집어 넣은 것이다.
뿐인가.
“림, 람. 너희들이라면 인간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들어갈 수 없는 곳 역시 들어갈 수 있을 터. 추종자들을 도와라.”
-네!
곧바로 수많은 요정들이 그의 부름에 응해 수도를 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이쯤 되자 라야의 시민들은 완전히 질려버리고 말았다. 추종자들은 물론이고 요정들까지 떼지어 날아다닌다. 게다가 기이한 구슬 같은 것이 밤이고 낮이고 수도의 하늘을 가득 메운 모습은 일견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너무 과한 거 아닌가요?”
“이 기회에 내 힘을 좀 드러내 보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그렇다. 이것은 단순히 수사에 도움을 받는 것을 넘어, 무력 과시의 측면도 있었다. 감히 자신이 참석한 자리에서 암살을 시도하다니, 그것이 누구이건 간에 다시는 같은 일을 저지를 엄두를 내지 못하도록 단단히 본때를 보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조여 나가면, 결국은 어딘가에서 견디지 못한 누군가가 빈틈을 보이게 될 터. 형진이 노리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했는데도 단서가 보이지 않는다는 건…”
형진은 그렇다 쳐도 제랄딘이 범인을 찾지 못하는 건 정말 유례가 없는 일이다. 이쯤 되면 일반적인 존재가 아닌 뭔가 초월적인 존재가 개입했다고 봐도 무방할 터.
때문에 아예 신들까지 모조리 불러올까 고민하고 있는데, 의외의 곳에서 단서가 발견되었다.
“찾았어요!”
“저희가 범인을 찾았어요!”
“뭐? 그게 정말이야?”
놀랍게도 그 주인공은 지금까지 존재조차도 잊혀졌던 몽마들이었다.
“어, 그런데 너희들 이름이 뭐였더라.”
오죽하면 형진조차도 이름을 까먹었을 정도다.
“제 이름은 타락의 마야나! …입니다.”
“제 이름은 유혹의 로트나! …입니다.”
몽마들은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또한 이렇게 생각했다. 이렇게라도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는 식으로. 여러모로 참 불쌍한 존재들이다.
============================ 작품 후기 ============================
두편째.
자, 이제 정말로 자러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