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692
00692 157. 진실 =========================
“처음 그것을 경험한 것은, 조금 오래 전의 일입니다. 그것을 뭐라고 해야 할지. 꿈을 꾸고 있는데, 그런 자신을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그런 기이한 경험이었습니다.”
아담한 모습의 귀비는 조금 자신 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지만, 형진과 제랄딘은 그녀가 겪은 현상이 일종의 자각몽이라는 사실을 이해했다.
“그곳에서 무언가를 만난 겁니까?”
형진의 질문에 귀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작해야 꿈에 불과한 얘기를 진지하게 경청하는 태도에 조금 놀란 것이다. 사실 귀비 자신도 국왕의 암살과 같은 명백한 현실을 설명하는데 자신이 꾸었던 꿈을 대입하는 것은 별로 적절치 못한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타나토스와는 달리 지구의 경우엔 이른바 자각몽이라는 현상에 대해 나름대로 많은 연구가 쌓여 있는 상황이고, 이미 실존하는 현상이라는 것도 증명된 바가 있다. 애초에 이쪽 사람들과는 기반 지식 자체가 다르기도 하고, 이번 일처럼 초월적인 존재가 의사 전달의 수단으로 꿈을 이용하는 상황 또한 가능성이 충분히 있기 때문에 형진도 제랄딘도 귀비의 말을 가벼이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무언가라고 해야 할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어떤 형태라기 보다는 의미에 가까운 무언가였기 때문에.”
“음…”
역시나 이번에도 귀비는 자신이 없는 목소리였지만, 이것 또한 형진과 제랄딘으로서는 더욱더 심각한 표정을 짓게 만드는 말이다.
엘리시온의 신들은 두 개의 신격을 지닌다. 형진처럼 아직 제대로 완성되지 못한 신은 하나의 신격을 갖는 경우가 있고, 그나마 아무런 신격도 가지지 못한 경우에는 아예 반신이라고 따로 부르기도 한다.
만약 이번에 결계를 깨고 타나토스로 들어온 무언가가, 신들과 비슷한 무언가라면 그 존재는 인간이나 동물 같은 형상보다는 오히려 의미에 가까운 무언가로 인식될 가능성이 높다. 결국 신격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그러한 의미들이 하나의 단어로 형상화된 무언가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신이 어떤 존재이고, 신격이란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 상태의 평범한 여인이 이런 식의 말을 꺼냈다. 그 부분이 형진이나 제랄딘으로 하여금 귀비의 말을 흘려들을 수 없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럼 질문을 바꾸겠습니다. 당신은 꿈속에서 그것과 만나 무엇을 했습니까.”
“그게…”
귀비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국왕이 암살된 사실 자체는 그렇다 쳐도, 자신과 그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오늘 처음 만난 사람에게 털어놓는 것은 역시 간단한 일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처음 보는 사람이게 자신의 알몸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나 마찬가지 일이기 때문이다. 그냥 벗은 몸을 보이는 것도 아니고, 가장 더럽고 수치스러운 부분을 드러내 보이는 그런 일이다. 쉽게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머뭇거리는 귀비의 모습에, 형진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귀비님. 이 일은 귀비께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대하고 위험한 일입니다.”
“그게 무슨…”
“저희가 이번에 라야를 방문한 것은 단순히 제랄딘의 친정을 방문하고자 함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중대한 문제 때문에 일부러 라야를 찾은 것이죠.”
이건 사실 새빨간 거짓말이다. 애초에 라야의 공작가문을 찾은 건 그저 머리가 아픈 와중에 요리 대회도 보고 친정 나들이도 하는 식으로 머리를 식히려고 했던 것이 맞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귀비를 설득해야 하는 시점. 본래 완전한 거짓말보다 약간의 진실이 가미된 거짓말이 더욱더 사람을 쉽게 홀리게 만들기 마련이고, 지금 형진이 꺼낸 얘기도 그런 식의 양념에 속한다.
“귀비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이 타나토스라는 세계에는 외부로부터의 악한 존재들로부터의 침입을 막기 위한 거대한 결계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있는 이 집처럼, 세계 전체를 천정과 지붕, 그리고 벽과 문 같은 것으로 막아두는 식으로 에워싸 놓은 상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
귀비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기야 황혼의 결계에 대해서는 추종자들조차도 잘 모르는 사실이니 일반인에 불과한 그녀로서는 이런 식으로 형진에게 그런 비밀을 전해들은 일 자체만으로도 크게 놀랄만한 일이었다.
“그러한 결계의 일부가 얼마 전에 파괴되어 구멍이 났습니다. 구멍이 뚫리고 저희가 그것을 확인하여 복구하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2분 정도. 하지만 신의 힘으로 만들어진 결계가 짧은 시간이나마 파괴되고 타나토스 전체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무방비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 일이…”
“저희들은 잠시 결계가 무력화된 그 짧은 시간 동안 무언가가 타나토스로 침입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나 여기 있는 제랄딘이 이 시점에 라야를 찾은 것에는 그런 이유가 있는 것이죠.”
형진이 신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내용은 지금에 와서는 사실 비밀이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당연히 귀비도 그와 같은 일을 잘 알고 있는 상황. 어찌 보면 그들을 안으로 불러들여 독대를 하고 자신이 겪은 꿈의 내용을 털어놓으려고 마음 먹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다른 일반적인 사람들이라면 그저 헛꿈을 꾼 것 뿐이라고 웃고 넘길 만한 일이라도, 이들이라면 뭔가 다른 반응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탓이다.
그리고, 그 예상은 틀림없이 맞았다.
아니, 오히려 그녀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더 큰 규모의 반향으로 되돌아오고 있는 중이다.
“제가 겪었던, 아니… 저와 접촉했던 무언가가 결계를 뚫고 침입한 무언가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귀비의 물음에 형진은 굳은 표정으로 답했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도, 귀비님께서 겪으셨던 일을 모두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이번에 벌어진 일이 시작에 불과하다면… 타나토스는 예상치 못했던 큰 혼란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음…”
자신과 제랄딘이 뻔히 보고 있는 상황에서 손도 쓰지 못하고 국왕이 죽어 버렸다. 그런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타나토스 전역에서 일어나게 된다면, 그 혼란은 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위협이라면 막아서면 된다. 건물을 부수고 마을을 불태우는 괴물이라면 퇴치하면 그 뿐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사람의 마음 속을 파고들어 그것을 통해 퍼져 나가는 무언가라면, 형진이 가진 인스턴트 킬의 능력으로도 퇴치하기 힘들다. 신조차도 일격에 무력화시키는 권능이라 할지라도, 실체를 눈으로 보지 않은 상태에서는 싸울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
귀비는 다시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그녀의 고민은 앞서와는 달리 그리 길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상황이 그렇게 엄중하다면, 제 보잘 것 없는 수치심을 따질 때가 아니겠지요.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
“결단에 감사드립니다.”
보잘 것 없는 수치심이라고 표현하기는 했어도, 사실 그렇게 간단하게 말하고 넘어갈 만한 일은 아니다. 형진은 연약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생각보다 강단이 있는 여인이라는 생각을 떠올리며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와 국왕 사이에 있었던 일은 몽마가 말해준 내용과 거의 일치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 모든 것이 단순히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라는 사실이라는 정도. 놀랍게도 라야바르트의 국왕은 극심한 의처증을 지닌 사람이었던 것이다.
물론 모든 여인들에게 다 그랬던 것은 아니다. 오직 셋째 왕자를 낳은 귀비에게만 그랬다.
“그는 저를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했어요. 다른 누군가를 만나는 것 자체가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었죠. 하다못해, 제가 낳은 아이조차도. 전… 처음 젖을 물리던 잠시동안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제 아이를 제대로 본 적조차 손에 꼽을 정도에요.”
“맙소사…”
이쯤 되면 사실상의 감금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만약 국왕이 살아있던 시절이라면, 형진과 제랄딘이 이런 식으로 그녀와 대면하는 일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때로는 그의 이런 행동들을 사랑 때문이라고 스스로 이해해 보려고 했던 적도 있어요. 실제로도 그는 그런 식으로 저에게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려고 했으니까요. 하지만, 역시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어쩌면 그런 자신의 처지가 그 무언가를 꿈속으로 불러들인 것인지도 모르죠.”
귀비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목이 타는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말을 이었다.
“처음에 나타났을 때, 그 무언가는 저에게 그를 죽이고 싶냐고 물었어요. 하지만 처음에는 지금같은 자신의 처지보다 뭔지 모를 무언가와 마주했다는 사실이 더 두려워서 아니라고 대답했어요. 하지만 그 무언가는 계속 꿈에 나타나서 물었어요. 그를 죽이고 싶냐고. 원한다면 이루어 주겠노라고.”
처음에는 순순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 상황이 뒤바뀐 것은 역시 형진에 첫째 왕자의 병을 고친 다음의 일이다.
“첫째 왕자님의 병이 나았다는 말에 저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어요. 누가 왕이 되든 제 처지가 바뀌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 뒤에 문제가 생겼어요. 곧바로 태자가 될 것 같았던 첫째 왕자가 갑자기 요양을 떠나게 되고, 제 아이가 다음 대의 왕이 될 거라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죠.”
외부와의 접촉이 차단되어 있는 귀비가 이런 바깥의 정황을 어떻게 바로 알 수 있겠나 싶기는 하다. 그러나 왕궁이라는 곳은 권력의 향배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곳이고, 그런 곳에서 차기 국왕의 어머니가 가지는 위상은 실로 대단한 것이다. 귀비가 외부의 접촉과 차단되어 있다고는 해도, 별궁을 지키고 그녀의 수발을 드는 것 또한 사람이 아닌가. 그들이 귀비의 호감을 사기 위해 그런 일들을 시시콜콜하게 전해 주었다면 그녀가 급변한 외부의 상황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날 밤, 저를 찾은 그에게 저는 따지고 들었어요. 저를 이렇게 가둬두고 멋대로 하는 것은 그렇다 쳐도, 제 아이까지 그런 삶을 살게 하고 싶지는 않다고. 그 아이는 성인이 되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놓아주는 것이 아니었느냐고… 악을 쓰며 대들었어요. 그러자, 그는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크게 화를 내며 저를 때렸죠.”
“음…”
그때의 고통이 떠오르는지, 귀비는 자신의 팔을 스스로 쓰다듬으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렇게 저를 때리다가… 제가 더 이상 항거할 힘을 잃고 쓰러지자 그는 울었어요. 그는 그렇게 울면서 제게 포션을 발라주며 이렇게 말했죠. 어째서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거냐고. 처음부터 너뿐이었다는 걸 왜 몰라주는 거냐고. 하지만 이미 그때 제 마음에는 증오가 가득 차 있었어요. 이 남자를 죽여 버리고 싶다는 그런 증오가.”
“그래서…”
“네. 그래서 저는 그날 밤도 어김없이 꿈속으로 찾아온 그 무언가에게 대답했어요. 이 남자가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그러자, 그 무언가는 조용히 제 소망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대답했죠.”
귀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씁쓸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저는 꿈속에서 그 무언가가 말한 대로, 다음날 아침 그를 유혹했어요. 그는 몹시 기뻐하며 저를 안았죠. 그것이 자신의 생명을 끊어버릴 줄은 꿈에도 모른 채.”
“…”
거기까지 말하고 난 뒤, 귀비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아마도 당시의 감정이 다시 끓어오르는 것을 다스리기 위함이 아닐까.
“그 일이 있고 난 뒤, 저는 다시 그것을 꿈에서 보지 못했어요. 대신… 다른 꿈을 꾸기 시작했죠. 저와 그 사이에 있었던 일부터 시작해서… 그날 밤의 일까지… 마치 되새김질을 하듯 끊임없이 꿈이 이어졌어요. 그것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까지가… 제가 지금까지 겪었던 일들입니다.”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형진이 가만히 고개를 숙이자, 귀비는 마주 인사를 하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교수형에 처해지는 건가요?”
국왕을 암살한 장본인이라면 당연히 사형이다. 그나마 그녀는 다음 대의 왕을 낳은 신분이니 참수와 같은 형식이 아니라 신체를 온전하게 보존하는 교수형 같은 형벌이 가해질 가능성이 높다. 형진이 지금까지 들은 사실을 토대로 그녀의 죄와 그것에 따른 벌을 확정한다는 가정하에.
“글쎄요. 그것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울 것 같군요.”
“그럼, 역시… 참수형인가요.”
“그런 얘기가 아니라, 저는 그렇다 쳐도 귀비께서 겪은 일들을 과연 다른 사람들도 믿을까 하는 점이 문제 아니겠습니까.”
“아…”
그렇다. 분명 그녀는 자신이 왕을 암살한 장본인이라고 증언하고 있었으나, 그것은 모두 꿈에서 벌어진 일이고 실질적인 증거는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다. 그저 그녀가 왕에 대한 증오를 못 이겨 그런 식의 꿈을 꿔버렸을 뿐이라고 생각해버려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일단 이 일은 저희들끼리만 알고 있는 걸로 해두겠습니다. 공연히 다른 이에게 말을 하는 일은 삼가도록 해주십시오.”
“알겠… 습니다.”
“다만, 그 전에 몇 가지 확인을 해봐야겠습니다. 실례지만, 여기 있는 제 비가 귀비님의 몸을 확인해 봐도 되겠습니까.”
귀비는 제랄딘을 보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미 제 가장 수치스러운 부분을 드러내 보였는데, 그 정도쯤이야 못할 이유가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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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한편
안녕히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