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693
00693 157. 진실 =========================
곧바로 방 한 켠에 가림막이 세워지고 그 안에서 제랄딘이 귀비의 몸을 살폈다. 형진은 잠시 테이블에 앉아서 결과를 기다리며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꿈에서의 일이 현실화되었다는 식이 아니다. 아마도 의사소통 자체는 거짓된 천국에 접속한 것과 비슷한 방식이 아닐까.
이번 일이 있고 나서 형진과 제랄딘은 타나토스에서 최근 일어난 살인 사건에 대해 면밀한 조사를 행했다. 혹시 국왕에게 벌어졌던 일과 비슷한 경우가 다른 곳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결과는 헛수고. 다른 방식이 사용된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적어도 라야바르트의 국왕과 같은 죽음은 발견되지 않았다.
자신과 제랄딘이 오랜만에 방문한 라야바르트의 수도 라야. 그리고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 버린 라야바르트의 국왕. 과연 이 모든 것이 우연일까. 우연으로 치부해도 괜찮은 것일까.
어쩌면, 포트니아 테론은 이미 그의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들을 떠올리며 라야에 도착한 이후 마주했던 인물들을 하나씩 떠올리고 있는데, 예상보다 빨리 제랄딘과 귀비가 가림막을 치우고 모습을 드러냈다.
[뭔가 찾았어?] [네. 역시… 그녀의 말은 전부 사실이었어요.]일단 그렇게 제랄딘과 짧게 메시지를 나눈 뒤, 형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이후에 뭔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저희에게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공작 가문으로 기별을 보내면 되겠습니까.”
“네. 다만 직접 내용을 전달하지는 마시고 저희를 불러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보호와 균형의 여신께서 직접 권능을 부여한 성물입니다. 가지고 계시면 만약에 닥쳐올 수도 있는 위험으로부터 몸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미 사건이 종결된 시점에서 그 무언가가 다시 귀비를 찾을 가능성은 낮다. 만약 그런 것이 남아 있었다면 이미 접촉을 하고도 남았을 정도의 시간이 있었으니까. 지금까지 그대로 놔두었다는 것 자체가 더는 용무가 없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기에 형진은 귀비의 별궁 주위에 인공위성을 몇 개 더 설치해서 그녀가 평소 접촉하는 인원들을 확인하는 작업도 병행하기로 했다.
“어떤 흔적이 남아있었던 거지?”
제랄딘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녀의 몸 안에… 음, 그러니까. 씨앗 같은 것의 흔적이 남아 있었어요.”
“씨앗?”
“네. 저주를 담아 두었던 씨앗.”
단 한 번의 관계로 확실하게 저주를 전이시키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조치가 필요하다. 제랄딘은 구체적인 표현을 삼갔지만, 아마도 그런 식의 흔적이 남아 있었던 것이리라.
“그녀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글쎄. 일단 죄를 저지른 것은 사실이니 그냥 넘어가기는 힘들지도.”
말을 하고나서야 형진은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혹시 제랄딘이 귀비가 처해있던 상황을 과거의 자신과 겹쳐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뒤늦게야 떠올린 것이다.
“물론… 국왕의 이전 행동을 보면 충분히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얼른 덧붙인 형진의 말에 제랄딘은 쓴웃음을 지었다.
“당신도 당황할 때가 있네요.”
“그, 그런가. 하하…”
형진의 허둥대는 모습을 보며 배시시 웃던 제랄딘은 가만히 웃으며 그의 뺨에 입을 맞추고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 말아요. 이상한 생각 같은 거 안 하니까.”
“응. 미안.”
근처를 지나던 시녀들의 흘끔거리는 시선에 괜히 부끄러워진 형진은 헛기침을 하며 다시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다른 왕비들도 만나봐야겠어.”
“다른 왕비들을요?”
“그래. 귀비처럼 사실대로 말할지는 의문이지만, 어쩐지 이 일을 겪은 것은 귀비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아…”
그런 부분이 아니더라도 증언 내용의 교차 검증을 위해서는 다른 이의 말 역시 들어보아야만 한다.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하지만, 귀비의 말 가운데 거짓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일단 처음 방문한 것은 첫째 왕자를 낳은 왕후였다.
그녀는 귀엽고 아기자기한 인상의 귀비와는 달리, 고고한 귀부인을 그림으로 그린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단정하게 앉은 채 미동조차 하지 않는 자세, 사람의 내면을 꿰뚫는 듯한 시선.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어딘지 모르게 불안에 떨고 있는 눈동자.
형진은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이 여인 역시 무언가를 숨기고 있음을 직감했다.
“반갑습니다. 이미 기별했듯이, 저는 엘 파르드의 국왕인 벨크라드진입니다. 이쪽은 제 비인 제랄딘입니다.”
“반갑습니다. 저에겐 무슨 용무이신지요.”
그녀는 대뜸 용무를 물었다. 뭔가 마음 속에서 쫓기고 있는 것이 있는 것처럼.
“간단하게 몇 가지, 묻고 싶은 점이 있어서입니다.”
그 말에 왕후는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슨 말을 듣고 오신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국왕 폐하의 암살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서론을 꺼냈을 뿐인데도 벌써부터 날선 반응이다. 하긴 무리도 아니다. 여기서 괜히 말을 잘못 했다가 범인으로 확정되기라도 하면 큰일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 받고 있는 상황에.
“그렇습니까. 그런데… 요새 꿈을 꾸신다면서요.”
“네?”
절대로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꼿꼿한 자세가 순간 흐트러진다. 눈동자 역시 처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무슨… 말씀이신지 영문을 모르겠군요. 꿈이 뭐 어쨌다는 말씀이십니까.”
이쯤 되면 심증은 충분히 간다. 물론 이것을 증거로 삼아 추궁하긴 어려운 일이다. 국왕의 암살쯤 되는 사건을 단지 심증만으로 결정지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냥 그렇다는 얘깁니다. 알겠습니다. 별로 기분이 좋지 않으신 듯 하니 오늘은 이 정도로 해두죠.”
“…”
형진은 제랄딘을 데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신 자신의 옷깃 속에 숨어 있던 몽마 가운데 하나에게 지시를 내렸다.
“음… 마야나… 라고 했던가?”
“네! 제 이름은 타락의 마야나… 입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옷깃 안에서 머리를 내밀며 외친다. 어떻게든 이 기회를 빌어 자신의 이름을 형진에게 각인시키겠다는 듯이 큰 목소리로 대답하다가, 다른 이가 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깨닫고 서둘러 입을 막은 채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모습에, 형진은 물론이고 제랄딘마저도 피식 웃어 버렸다.
“그래. 마야나. 너는 당분간 이 근처에 남아서 저 여인이 무슨 꿈을 꾸는지 확인하도록.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
“물론이죠! 맡겨쥬세요!”
열심히 대답하다가 혀를 깨물어 버린 모양이다. 형진은 웃으며 정기를 조금 나누어 주어 치유할 수 있도록 도와준 뒤 마야나를 그곳에 남기고 나왔다.
그리고 이번에는 곧바로 두 번째 왕자를 낳은 비를 찾아갔다.
“저를 찾아오신 이유가 뭔가요.”
체념한 듯한 시선. 피로에 가득한 표정. 이미 삶에 대한 의욕을 잃어버린 시든 꽃잎 같은 분위기의 여인이다. 그냥 가만히 놔두기만 해도 불어오는 바람에 풍화되어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그런 분위기라고 해야 하나.
따지고 보면 이 여인이 이렇게 된 것은 형진과 제랄딘의 탓이기도 하다. 그녀가 마음을 쏟고 있던 단 하나의 대상이었던 둘째 왕자 레이그릭을 직접 죽인 당사자가 바로 제랄딘이었고, 형진 역시 그녀의 일을 도왔었다.
어쩐지 참 기분이 복잡하다. 라야바르트 국왕과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는 여인은 모두 셋. 그중 단 하나도 표정에서 행복의 여운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을 보니 어쩐지 씁쓸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자신의 반려들 중에도 이런 식으로 시름에 잠겨 있는 여인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반성 또한 하게 된다.
이 여인은 형진의 말에 거의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적극적으로 대화를 나눈 귀비가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될 정도다.
“로트나. 이곳은 네가 맡도록.”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렇게 마야나와 로트나를 남겨두고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그들이 꾸고 있는 꿈에 대한 정보가 그에게 들어왔다.
첫째 왕비의 경우엔, 죽어버린 국왕을 향해 끊임없이 욕하고 매도하는 꿈을 꾸고 있었다. 자신이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이 모두 그의 탓이라는 식으로, 그리고, 자신의 소원을 이루어준 무언가에게 감사하는 마음마저 지니고 있었다.
둘째 왕비의 경우엔 더 심했다. 말로 뭔가를 풀어볼 생각조차 없는 듯, 그녀는 날카로운 비수를 든 채 국왕의 몸을 찌르고 자르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그녀 역시 그렇게 끊임없이 국왕을 죽고 또 죽이면서 자신의 소원을 이루어준 무언가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혹시나 싶었지만… 정말로 이런 식이었을 줄이야.”
“꿈속의 무언가는 국왕의 세 비로부터 모두 동의를 얻어 이 일을 실행했다는 뜻이군요.”
“후… 이거 참.”
결국 실행은 귀비가 했지만, 다른 두 왕비도 기회가 왔다면 같은 일을 했을 거란 얘기가 된다. 왕실이라는 곳이 겉으로 드러난 부분보다 감추어진 부분이 많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쯤 되면 이미 부부라는 표현을 쓰는 것조차 의미 없는 일이 아닐까.
여기서 중요한 점은, 꿈속의 무언가가 임의로 자신의 판단에 따라 국왕을 살해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죽어버린 국왕이야 어찌되든 상관없는 일이지만, 이런 식의 행동 양식을 보였다는 것 자체가 형진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이라 할 수 있다.
적어도, 파괴와 재생이 개입된 일이라면 이런 식의 과정은 나타날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놈이라면 누구에게 동의를 얻고 말고 하는 과정 없이 그냥 닥치고 죽였을 것이다. 국왕이든 왕비든 그냥 보이는 대로 이유 따위는 묻지도 않고.
“이상해.”
뭔가 헛바퀴를 도는 느낌.
잠시 고민하던 형진은 공작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결선에 참여했던 인원들, 다시 한 번 불러 모아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공작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급히 당시 연회장에 있었던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레나리스 왕녀까지 전부.
귀비가 국왕의 몸에 저주를 심은 장본인이라고는 하지만, 단순히 조건부 발동의 저주라면 형진의 눈앞에서 그가 죽어 넘어진 점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 그렇다면 결국 해답은 하나뿐이다.
공작의 조치에 따라 그날 연회장에 있었던 사람들이 모조리 불려왔다. 귀찮은 기색을 보이는 귀족들도 있었지만, 이 자리에 불참했다가 혹시라도 불리한 입장에 처하지 않을까 싶었는지 모두 빠짐없이 연회장에 모여들었다.
마침내 모든 인원이 연회장에 모여들자, 형진이 제랄딘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반갑습니다. 갑작스러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모든 분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모여 주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일단 그렇게 인사를 하고 난 뒤, 형진은 앞으로 나서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어갔다.
“라야바르트의 국왕 폐하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이미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이 갑작스러운 암살 사건에 대한 진실은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여러분을 이 자리에 모신 것은 지금까지 제가 모은 여러 가지 정보를 통해, 이번 사건에 숨겨진 진실을 확인해 보고자 함입니다.”
그렇게 말을 마친 형진은 품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는 손톱 크기의 반에 반 정도 되는 작은 콩알 같은 것이 담겨져 있었다.
“저는 그동안 왕실의 여러 인사들과 만나 이번 사건이 벌어지게 된 원인을 집중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저를 돕는 많은 이들이 또한 이 사건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고, 그 결과 이것을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럼 그것이… 국왕 폐하를 죽음에 이르게 한 독이란 말씀이십니까?”
문득 한 사람이 그렇게 물었지만, 형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럼… 그건 무엇입니까.”
“이건, 독이 아니라… 저주를 담은 일종의 성물입니다.”
“성물이요?”
“네. 아주 특수한 조건이 갖추어져야만 발동하는 그런 종류의 성물이라 할 수 있죠. 즉, 그날 라야바르트의 국왕 폐하를 암살한 범인은…”
형진은 거기까지 말하고는 주위를 돌아보며 말을 마쳤다.
“범인은 바로 이 안에 있습니다.”
============================ 작품 후기 ============================
두편째.
저 대사 한번 써보고 싶었어요. 욕하지 말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