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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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기사단
그토록 오래 살아오면서 이렇게 임무를 열심히 수행한 적은 아마도 처음이 아닐까. 아직 해가지지 않은, 막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 시점이 되어서야 미엘은 비로소 저택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다녀왔습… 제라?”
제랄딘에게 일을 보고 돌아왔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 그녀의 방을 찾았던 미엘은 드레스를 벗지도 않은 채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는 제랄딘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 얼른 다가갔다. 얼마나 놀랐는지 집 안에서 평소에 그러듯이 아가씨라는 호칭을 쓰지도 않고 제랄딘의 애칭을 부르고 말았다.
“아… 미엘 언니구나. 우… 피곤해.”
“…”
제랄딘은 부스스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고는 배시시 웃더니 다시 침대에 머리를 처박아 버린다.
“무슨 일이야. 살롱 파티에서 무슨 일 있었던 거야?”
당황한 미엘은 존대말조차 잊고 흥분해서 그렇게 물었다.
“있었지. 있었어. 망할 아줌마들. 아니, 진짜 죽일 놈은 그 황자 놈인가.”
“…”
그 몇 마디 말만으로도 미엘은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 망할 황자 놈이 귀족 부인들에게 바람을 넣어 간을 보기 시작한 것이리라.
물론 현재 왕국 안에서 황자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여성을 꼽으라면 누구라도 제랄딘을 첫 손 꼽을 수밖에 없다는 건 분명한 사실. 그러나 분명히 수차례에 걸쳐 싫다는 의사를 간접적으로 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나오는 건 아무리 황자라 해도 분명 무례한 일이다.
“제라.”
“응?”
“원한다면 내가 나설게. 지금 당장이라도.”
형진에 대한 인식이 조금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요리를 꺼내 도핑을 시도하는 행동 때문에 미엘은 상당히 스트레스가 쌓여 있는 상태였다. 물론 중간 중간 수배자들을 처단 하면서 풀어 보고자 하긴 했어도, 한 번 요리를 꺼낼 때마다 저게 특제 요리는 아닌지, 아니면 아닌 대로 맞으면 맞는 대로 계속 스트레스를 받다보니 알게 모르게 거의 폭발 직전인 상황이다.
사실 오자마자 제랄딘의 방을 찾은 것도 그녀의 미소를 통해 쌓여있는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고자 하는 의도였다. 그런데 그 망할 황자 놈이 제랄딘의 미소를 날려버리다 못해, 야근으로 지친 상태에서 부장 접대에 끌려 나가 술 상무 역할까지 하고 온 샐러리맨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 버렸으니, 기껏 억눌렀던 스트레스가 살기로 변해 발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안 돼.”
“하지만…”
“알잖아. 일부러 황자를 더 부추기는 놈들이 있다는 거. 정말로 죽여야 한다면 그 놈들부터야.”
“…”
이 순간에도 정치적인 사정을 고려하는 걸 보면, 역시 제랄딘은 공녀가 맞는 모양이다.
황실은 일반적으로 불가침의 영역이다. 왕이나 황제가 잘못을 저지른다 한들, 그 죄를 누가 감히 따져 물을 것인가. 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다르다. 왕이나 황제와 같은 군주 위에, 공포와 죽음이라는 실체적인 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면 얼마든지 공포와 죽음의 이름 아래 처형당할 수 있으니, 아무리 황실이라도 도의에 어긋난 짓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 황자가 공연히 제랄딘을 집적거리며 화를 돋우고 있는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이 스트레스를 키울지언정 죽을 죄라고 하기는 힘들다. 물론 보통은 그 정도로 집행자에게 짜증을 키우면 결국은 처형당하기 마련이지만, 제랄딘은 일반적인 집행자와는 달리 공녀라는 신분을 저버릴 수 없으니 차마 손을 쓰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새 한계인 모양이다. 분명 공포와 죽음께서는 심심하다고 아무나 막 죽이고 다니지 말라 하셨지만, 낙인의 정신 보호 효과를 넘어설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도록 만든 당사자에 대해 손을 쓰는 것까지 뭐라 하시지는 않을 것이다.
“우…”
제랄딘은 잠시 이불에 머리를 묻고 이상한 소리를 내다가 벌렁 몸을 뒤집으며 말했다.
“아, 배고파. 별 시답지도 않은 얘기 듣느라 밥도 제대로 못 먹었어.”
“저런.”
미엘의 부축을 받으며 몸을 일으킨 제랄딘은 씩 웃으며 말했다.
“언니,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맛있는 거?”
“별채에 왕국 최고의 요리사가 있잖아. 기껏 맺은 인연, 써먹지 않으면 아깝지.”
“…”
“몰라. 내일 일이고 뭐고 오늘은 마음껏 먹어버릴래. 언니도 갈 거지?”
하지만 미엘은 제랄딘의 말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 그게…”
“?”
잠시 고민하던 미엘은 아무래도 제랄딘에게는 말해 두는 것이 좋을 거라는 생각을 떠올리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실은 말이지, 그 사람 요리는 너무 위험해.”
“위험하긴 하지. 먹다보면 내가 얼마나 먹었는지조차 잊게 되니까.”
“아니, 그 말이 아니라…”
미엘은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후우… 실은 그 사람 특제 요리를 먹으면 나 자신을 억누르기 힘들어져.”
“그게 무슨…”
“본신이 아닌데도 열기가 끓어 넘쳐서 견디기 힘들게 되어 버리거든.”
“…”
좀 돌려 말하긴 했지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을 제랄딘이 아니다.
“그래서, 어제…”
“뭐… 그런 거지.”
“허…”
형진의 요리가 대단한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 정도였다니. 제랄딘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미안. 바로 말을 했어야 하는데… 나 스스로도 좀 혼란스러워서.”
“아냐. 나야 말로 미안해. 그런 줄도 모르고 철딱서니 없이 그 사람 요리를 먹으러 가자고 그랬으니. 정말 미안해.”
미엘은 거듭 사과하는 제랄딘의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그러니까 혼자 가서 먹고 와.”
“혼자서는 싫은데.”
“또 그런다. 나야 부작용 때문에 어쩔 수 없다지만, 확실히 그 사람의 요리는 활용하지 않으면 손해야. 그러니 제 걱정은 말고 가서 먹고 오세요. 아가씨.”
조금 완고하기까지 한 미엘의 말에 제랄딘은 착한 아이가 된 것처럼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하긴 내일 기사단에 가는 일 때문에라도 얼굴을 보긴 해야 하니까. 실은 그 핑계로 가서 식사를 하려던 참이기도 했고.”
“쿡쿡. 벌써부터 입에 침이 가득 고였으면서 제 생각하는 척 하시면 안 되죠.”
“치. 그런 건 좀 못 본 척 해주면 안 돼?”
그렇게 얘기를 나누며 미엘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고 흐트러진 머리를 다시 매만진 제랄딘은, 몇 명의 시녀를 대동한 채 형진이 머물고 있는 별채를 방문했다.
“어서 오십시오. 공녀님.”
제랄딘이 모습을 비추자 크루그가 그녀를 맞이한다. 집행자 모습일 때라면 몰라도, 지금의 그녀는 공녀의 모습인지라 가급적이면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지만, 형진도 유아도 집을 비운 상태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진님은 어디 가셨나요?”
“네. 시장도 좀 보고 따로 볼 일도 있다고 유아 누나를 데리고 잠시 나갔습니다. 급한 일이시면 제가 가서 기별을 하겠습니다.”
“아뇨. 그럴 필요까진 없어요. 저녁 때까진 돌아오시겠죠?”
“카트린의 식사 때문에라도 그럴 겁니다.”
“알았어요. 그럼 좀 기다리도록 하지요.”
잠시 기다리자 크루그의 말대로 형진이 유아와 함께 당나귀가 끄는 작은 수레에 무언가를 하나 가득 싣고 돌아온다.
“어라? 어쩐 일이십니까.”
“내일 일정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뵈었습니다.”
“일정이라면…”
“기사단 방문 말입니다.”
“아, 그렇군요. 식사는 하셨습니까? 괜찮으시다면 함께 들고 가시죠.”
“그래도 될까요?”
“되다마다요. 유아, 짐 내려놓고 공녀님께 과일즙이라도 좀 가져다 드려.”
“네.”
유아는 낑낑거리며 양손에 들고 오던 짐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더니 부리나케 주방으로 달려간다. 크루그는 그 모습을 보고는 말없이 유아가 내려놓은 짐을 들고 집 안에 옮겨 놓았다.
“수도에는 해산물이 제법 있더군요. 아마도 마법으로 보존시켜서 가져왔는지 꽤 비싸긴 했습니다만, 덕분에 그리칸에서 시도해 보지 못한 요리들을 만들어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좀 무리를 해버렸습니다.”
“해산물이요? 해산물도 다룰 줄 아세요?”
“물론이죠.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금방 요리해서 대령하겠습니다.”
형진은 새로운 식재료를 쓸 생각에 신이 났는지 그렇게 대답을 하고는 수레에 담긴 식재료를 주방으로 옮기고는 짐 안에 섞여 있던 당근을 수레를 끌던 당나귀에게 건네주었다. 산 건 아니고, 짐수레가 있냐고 물으니까 제랄딘의 가문에서 수레와 함께 빌려준 녀석이다.
“자, 당스바겐. 수고했다. 이거 먹어라.”
당나귀는 형진이 당근을 내밀자 심각하게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마침 당근을 쥔 손이 낙인이 새겨진 손이 아닌 덕분인지 조심스럽게 당근을 받아먹었다.
“역시. 네가 뭘 좀 아는 놈이구나. 노란투리스모 그 놈이랑은 뭐가 달라도…”
당나귀가 당근을 받아먹었다는 사실에 고무된 형진은 곧바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했지만, 자신의 머리를 노리고 꺼림직한 기운이 서린 손이 다가오자 당나귀는 기겁을 하며 생리현상을 구현했다.
부우우우욱!
“…”
좁은 통로로 세찬 공기가 약간의 이물질과 함께 뿜어져 나오는 그 기괴한 소리에, 당근을 먹이고 있던 형진은 물론이고 앞으로 그가 만들어낼 만찬을 기대하며 의자에 앉아 있던 제랄딘과, 그녀를 따라 왔던 시녀들 역시 모두 침묵 속에 빠지고 말았다.
잠시 눈을 감은 채 은은하게 퍼지는 풀썩은 내를 견뎌내고 있던 형진은 짧은 탄식과 함께 이렇게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이름을 잘못 지었던 모양이다. 좀 더 신경을 써서 지었어야 하건만 하필 당스바겐이라고 짓는 바람에… 후…”
당나귀로서는 억울한 일이었지만 이미 저질러 버린 일을 어쩌겠는가. 형진은 크루그에게 당나귀를 마굿간에 데려다 놓으라고 말한 뒤 터덜터덜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무슨 일 있었어요? 응? 이게 무슨 냄새지?”
주방에서 과일즙을 준비해 혼 유아는 은은한 썩은 내에 얼굴을 찌푸리다가 과일즙을 제랄딘에게 건네주었다.
차마 뭐라 하지도 못하고, 기품 있는 귀족 여인의 모습을 꿋꿋이 버텨내고 있던 제랄딘은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과일즙을 받자 겨우 참고 있던 숨을 내쉬며 그것의 맛을 보았다.
“맛있네요.”
생명력과 신성력의 절묘한 조화가 과일의 풍미를 제대로 살렸다. 다만 이상한 것은 생명력 회복 증가과 최대 정신력 증가 외에 버프가 하나 밖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
“그래요? 다행이네요. 혹시 맘에 안 드시면 어쩌나 했는데.”
유아의 뿌듯해 하는 모습을 본 제랄딘은 설마 싶은 생각에 물었다.
“설마… 이거 유아님이 만드신 거에요?”
“네.”
“…”
제랄딘은 크게 놀랐다. 형진이야 그렇다 쳐도, 설마 유아까지 이 정도로 요리 실력이 성장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장 자신만 하더라도 그리칸에서 하나의 버프 효과를 일으키는 애피타이저를 만들어내는 요리사를 섭외해서 가문에 끌어들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가!
“대단한 건 아니에요. 주인님에 비한다면 흉내도 제대로 못내는 수준인걸요.”
“…”
뭐라는 거야. 이 아가씨가.
형진의 실력을 흉내 낼 수 있으면 그게 오히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바꿔 생각해 보면 이제 고작 숙련 단계에 도달한 것이 오히려 말이 안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어째서일까.
형진이 장인에 도달하기 위해 수련하는 동안에도 식재료의 손질은 모두 그녀의 몫이었다. 뿐인가. 전투식량을 만드는 것은 물론이고, 지금까지 형진이 만든 거의 모든 요리가 그녀에 의해 손질된 재료들이었다.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고, 식당개 삼년이면 라면을 끓인다지 않는가. 아무리 재료 손질에 열중하느라 요리를 만드는 본격적인 과정에 별로 참여하지 못했다 해도, 식재료 손질 외에도 요리 중에 도울 일이야 얼마든지 있다.
애초에 요리사가 주방 보조들에게 친절하게 요리를 가르쳐 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 옆에서 훔쳐 배우는 것이다. 만약 유아가 눈썰미가 있었다면, 조금이라도 스스로 요리를 해볼 의욕이 있었다면, 벌써 숙련은 넘어 섰어야 옳다는 얘기다.
단순히 형진이 흘린 경험치를 주워 먹은 것만으로 숙련에 도달했으니 이걸 대단하다고 칭찬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이 천혜의 환경에서 고작 숙련을 간신히 넘었으니 미련곰탱이라고 핀잔을 줘야 하는 건지.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대단한 것 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