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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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기사단
제랄딘의 말을 듣는 순간 형진과 유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형진은 인연 참 고약하다는 생각에, 유아는 수도로 오는 내내 제랄딘과 미엘에게 들었던 황자의 악평이 떠올라서.
“아무래도 제 일정이 사전에 유출된 것 같아요.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공교로울 수는 없는 일이죠.”
“음…”
하지만 따지고 보면 제랄딘도 남 말 할 처지는 못 된다. 당장 갑자기 바뀐 황자의 일정을 바로 입수한 것은 제랄딘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럼 차라리 일정을 조금 늦추는 것이.”
유아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으나, 제랄딘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말해 황자와는 일분일초라도 같은 곳에 있고 싶지 않은 것이 제랄딘의 심정이다. 때문에 어떻게 보면 그것이 가장 합리적인 생각일 수도 있다. 만약 오늘 기사단을 방문하는 것이 별다른 목적이 없는 일이었다면.
그러나 불행히도 오늘의 일정은 뒤로 미룰 수가 없는 일이었다. 오늘 전투식량을 전달하지 않으면, 어전 토너먼트에 대비한 훈련 일정 자체가 일그러질 수도 있다.
훈련 일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컨디션 조절이다. 이것은 사람뿐만 아니라 기사단의 발이라 할 수 있는 말에도 해당되는 일. 게다가 형진의 음식이 지닌 효과는 너무나 뛰어나기 때문에 사전에 이것을 체험하고 그에 걸맞은 전술과 행동 요령을 수립하지 않으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더구나 일정이 유출된 경로를 확인하지 않는 이상, 다시 황자가 뒤를 따르면 아무 소용도 없다. 정말 여러모로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죄송합니다. 정말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어요. 후… 아무래도 조만간 결판을 봐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유아는 제랄딘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도 못한 채 그런가보다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형진은 그녀의 목소리에 은은하게 서린 살기를 느끼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결국 스트레스를 참다못해 폭발 직전의 임계점에 이르고 만 것이다.
바보 같은 놈. 하필 건드릴 사람이 없어서 이 공녀를 건드리나. 하기야 황자 입장에서는 제랄딘이 공포와 죽음의 집행자라고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 하고 있겠지만.
마차는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성을 빠져 나가 기사단의 숙영지에 도착했다.
“그랙커스가 공녀님을 뵙습니다.”
숙영지에 도착해 마차가 멈춰 서자, 희끗희끗한 반백의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긴 중년의 기사 하나가 다가와 제랄딘에게 예를 취한다.
“고생하셨어요. 기사단은 별 문제 없겠죠?”
“물론입니다. 이번 어전 토너먼트에서는 기필코 지난 해의 설욕을 하고야 말겠습니다.”
“기대할게요.”
제랄딘은 기사와 대화를 나누고는, 뒤이어 마차에서 내리는 형진과 유아를 소개했다.
“이쪽은 진님, 그리고 이쪽은 동행이신 유아님이에요. 두 분이 바로 이번 일에 있어 가장 큰 도움을 주신 분이죠.”
“그렇습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그랙커스라고 합니다.”
수도에서도 가장 명성 높은 열 명의 기사 가운데 하나라고 해서 조금 고압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선선하게 인사를 건네는 그랙커스의 모습에서 형진은 역시 오귀스트의 벗이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오귀스트님에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진이라고 합니다.”
“유아…입니다.”
그랙커스는 형진의 말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귀스트를 아십니까?”
“네. 가끔 저희 집에 와서 식량을 축내고 가십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항상 그랙커스님과 술잔을 기울이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고 푸념을 하십니다.”
“하하하. 그 친구 참.”
그랙커스는 껄껄 웃더니, 아차 싶은 표정으로 제랄딘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 이럴 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시죠. 날씨가 제법 쌀쌀합니다.”
“배려해 주셔서 고마워요. 그랙커스경.”
그랙커스는 그들을 지휘관용 막사로 데리고 들어갔다. 크기는 회의용 막사가 더 크지만, 크기만 하고 썰렁한 회의용 막사보다는 이쪽이 야전에서 지휘관의 숙소를 겸하는 곳이라 훨씬 아늑하다.
곧바로 수행 기사들이 의자를 가져다 놓고, 담요와 털가죽을 가져와 제랄딘이 추위를 느끼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춘다. 기사들 모두가 너나 할 것 없이 애지중지하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금지옥엽이 맞구나 싶은 느낌이다.
“사내놈들만 득시글거리는 곳이다 보니 담요에서 냄새가 좀 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가요? 아무렇지도 않은걸요. 오히려 향수 냄새까지 나는데요.”
“그렇습니까. 누가 그렇게 시키지도 않은 과잉 충성을 하는지 찾아내 혼을 내줘야 하겠군요.”
“칭찬이 아니라요?”
“당연합니다. 제가 할 일을 빼앗아 버렸으니 혼을 내는 것이 당연하지요.”
그랙커스는 생각보다 격의 없는 털털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역시 그 오귀스트의 친구답다고 해야 하나. 얼마 보진 않았어도 이 사람이라면 꽤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사람이다.
당번병이 따뜻한 차를 가져와 돌리자, 그랙커스는 제랄딘이 그것을 한 모금 들이킬 때까지 잠시 기다리다가 비로소 본론을 꺼냈다.
“일단 그 전투식량이라는 것을 먼저 확인하고 싶군요.”
“알겠습니다.”
가만히 제랄딘의 곁을 지키고 있던 미엘이 먼저 막사 내에 결계를 치더니, 이내 인벤토리에서 기사용의 전투식량을 꺼내 그랙커스에게 건네주었다. 원래 집행자의 인벤토리는 비밀이지만, 미엘은 마법사라는 자신의 능력을 핑계로 대고 그것을 마음껏 드러내 보이는 모양이다.
“아…”
그랙커스는 뚜껑을 열기도 전에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향기에 작은 탄성을 터뜨렸다. 음식은 만들자마자 바로 인벤토리에 넣어 여전히 따끈따끈했고, 용기 안에서는 작게 지글거리는 소리마저 들려오고 있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공포와 죽음께서 자신을 따르는 성도 모두에게 내린 이 권능은 실로 대단한 바가 있다.
“시식을 해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랙커스는 조심스럽게 용기의 뚜껑을 열고는 전투식량을 섭취하기 시작했다. 형진의 옆 자리에 앉은 누구처럼 허겁지겁 먹는 게 아니라, 마치 소가 여물을 씹듯 느릿하고 천천히 씹어 삼킨다. 또한 누구처럼 호들갑스럽게 오버 액션을 보여주지 않는 대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정말 음식을 즐기고 있구나 싶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보일 뿐이다. 아마도 먹는 모습 만으로 사람에게 호감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눈앞의 기사가 아닐까 싶은 그런 모습으로.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음식을 모두 먹고 나자, 마치 자신이 체험한 모든 맛을 되새겨 음미하듯 잠시 눈을 감고 그렇게 앉아 있다가, 조금 지나서야 아쉬움 가득한 탄식과 함께 눈을 뜨며 말문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제 보잘 것 없는 언변으로는 이 경이로운 성찬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두 분께서 이것을 만드셨다고요?”
“그렇습니다.”
형진은 선선히 그렇다고 대답했지만, 유아는 당황해서 얼른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저, 저는 그냥 손질만 했어요. 요리는 전부 여기 계신 주인님, 아니… 그러니까 진님이 만드신 거에요.”
어느새 입버릇이 되어 버렸는지 주인님이라는 말을 입에 담았다가 화들짝 놀라 정정하는 그녀의 모습에 막사 안의 모두는 빙긋 웃음을 지었다.
“정말 대단합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처음 공녀님께서 이 계획을 입안하셨을 때 전 실현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했습니다. 뛰어난 명인의 요리가 훌륭한 능력 향상 효과를 지닌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는 사실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군에 도입할 엄두를 내지 못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막상 그 모든 계획이 현실화되고 완성된 형태로 눈앞에 드러나니, 그런 식으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제 자신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공녀님, 제 사과를 받아주시겠습니까.”
“사과라뇨. 별 말씀을요.”
제랄딘은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살짝 고개를 저으며 그렇게 대답하고는, 미엘이 건네주는 서류를 받아 그랙커스에게 건넸다.
“방금 드신 요리의 구성 목록과 그것이 지닌 효과들을 정리한 문서입니다. 보시고 첨삭할 것이 있다면 말씀해주시길 바랍니다.”
“오… 이런 것까지. 감사합니다. 공녀님.”
그랙커스는 그렇게 감사의 뜻을 표하고는 얼른 서류를 펼쳐 보더니 이내 놀란 표정이 되었다. 집행자들이라면 어떤 효과가 적용되었는지 바로 알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여러 가지 효과들이 뒤섞이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다. 때문에 어떻게 보면 이 서류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기밀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이라면 지휘를 할 때도 상당한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친절하신 배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아무리 훌륭한 무기가 있어도 그것을 다룰 사람이 없다면 의미 없는 일이겠지요. 부디 도움이 되기를 빌 뿐입니다.”
“과찬이십니다. 당연히 도움이 됩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하하.”
하지만 그렇게 화기애애한 대화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발생했다.
먼저 들려온 것은 높다란 뿔피리 소리. 짧게 세 번 끊어지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그랙커스는 물론이고 제랄딘과 미엘마저 얼굴을 찌푸렸으며, 그들의 표정을 본 형진과 유아 역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전령입니다!”
“들어오라.”
미엘이 결계를 걷자, 곧바로 전령 하나가 들어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말했다.
“레이그릭 황자께서 기사단 장병에게 위로와 격려를 담아 야전 회식을 베풀고 싶다며 방문하셨습니다.”
“…”
나름 머리를 쓴 모양이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다짜고짜 이유도 없이 방문하는 건 이상하다 싶었던 걸까. 하지만 하필 야전 회식이라니. 참 공교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 않아도 기사단의 전투 식량을 배식하고 본격적으로 효과를 시험하기 위한 훈련에 들어가려던 참이기 때문이다.
“거 참.”
그랙커스는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제랄딘에게 말을 건넸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말에 제랄딘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알아서 무덤을 파고 들어가겠다는데 그 정도는 해줘야 하지 않겠어요?”
“하긴.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랙커스는 전령에게 황자를 정중히 맞이하라는 명령을 초소에 전하도록 지시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랄딘에게 정중하게 청했다.
“외람되지만, 공녀님을 모실 수 있는 영광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랙커스경이 아니라면 제가 누구에게 손을 맡기겠어요.”
“감사합니다.”
사실 굳이 이런 식으로 에스코트를 할 필요는 없는 일이지만, 제랄딘의 짝이 비어 있으면 보나마나 황자가 그 자리를 노릴 테니 선수를 치는 셈이다.
그랙커스가 내민 손바닥 위에 살짝 손을 얹은 제랄딘은 그의 인도에 따라 우아한 걸음으로 막사를 빠져 나갔고, 형진과 유아는 미엘과 함께 그 뒤를 따랐다.
막사를 나가자 기사단의 호위를 받으며 이것저것 거창하게 장식을 단 마차가 숙영지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저러다 차축이 부러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청동으로 된 부조를 여기저기 달아 놓은 모습이 위태롭기 짝이 없을 정도다.
“쯧쯧. 무조건 크다고 좋은 게 아닌데 말이지.”
“뭐가요?”
“저 마차 말이야. 내가 보기엔 저 마차… 사람이 뛰는 속도로만 달려도 차축이 부러져 버릴 걸.”
“아… 그래서 저렇게 느릿느릿 기어오는 거군요.”
뒤에서 형진과 유아가 주고받는 대화에 그랙커스와 제랄딘은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레이그릭 황자의 크고 아름다운 마차는 꽤 유명하다. 그 크기나 화려한 장식은 물론이고, 일단 출현하면 온 길을 다 가로막고 느릿느릿 움직이며 교통 체증을 유발하는 것으로 특히나 더. 그랙커스나 제랄딘은 그것이 과시하기 좋아하는 레이그릭 황자의 성격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애초에 마차의 성능이 그것밖에 되지 않았다니 정말 웃긴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