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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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기사단
해물파전과 생선살 스테이크라는 맛의 연타석 홈런에 잠시 정신이 혼미해졌던 제랄딘이 내일일정에 대한 얘기를 꺼낸 것은 향긋한 맛이 일품인 과일 샐러드를 디저트로 먹고 난 뒤의 일이었다. 원래는 식사하면서 겸사겸사 얘기를 하려던 것이었는데, 먹기 바빠서 얘기를 나눌 틈 조차 없었던 것이다.
“내일 일정에 대한 것인데, 오전 티타임 시간 즈음에 마차를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어차피 저희 집 메이드가 늦잠꾸러기라 그 정도 시간은 되어야 아침 식사가 끝나거든요.”
그 말에 유아가 볼을 부풀렸으나, 거짓말이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한다.
솔직히 요즘은 크루그나 카트린도 원래 그러려니 하는 중이고, 당사자인 형진과 유아도 아침마다 깨워주고 깨우는 일이 없으면 뭔가 허전하게 느껴질 정도다. 게다가 일찍 일어나려고 했다가 달덩이 같은 엉덩이를 드러내 보인 일도 있다 보니, 어정쩡한 시간에 일어나면 그냥 깨우러 와주길 기다리며 일부러 뭉기적거리는 경우도 많다. 여러모로 참 불량스런 메이드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사실 형진의 대답 가운데 제랄딘과 시녀들의 귀추를 주목시킨 단어는 뭐니 뭐니 해도 아침 식사라는 부분이었다.
사실 형진의 존재에 대해서는 그리칸을 출발하기 전부터 시녀들 사이에 은근히 이런 저런 말이 많았다.
불러서 얘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제랄딘이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미엘만 데리고 찾아가서 얘기를 하는 것부터도 이상한데, 그리칸을 떠나기 전에는 일부러 정중하게 초대를 하기까지 했다. 그것도 다른 사람들은 제외하고 그들만 불러서 조촐하게.
그걸로 끝인가 싶었는데 이게 웬 걸. 마차를 빌려주어 수도까지 동행을 해버렸고, 도착해서도 별채를 따로 내주는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었다. 마차 여행 중에 메이드 차림의 유아가 몇 번 제랄딘의 마차에 동승하는 일이 있긴 했지만, 미엘의 결계 때문에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도 없는 일이니 궁금증만 더 깊어질 뿐이다.
이제까지 따로 염문을 뿌린 적조차 없는 제랄딘이고 보면, 이 정도로 정중하게 대우를 받는 인물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 궁금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런 상황에서 제랄딘의 방문에 함께 하게 된 시녀들의 시선은 당연히 형진이라는 인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요리를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이게 뭔 일인가 싶었던 시녀들이었지만, 형진이 마치 마법사처럼 재료와 불을 다루어 어떻게 표현하기도 송구스러울 정도의 맛을 지닌 요리들을 만들어내는 순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남자는 그야말로 맛이라는 가치를 빚어내는 마법사나 다름없었다. 현란한 칼질로 생선을 해체하는 것이 그랬고, 냄새만으로도 황홀해지는 파전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그랬으며, 무언가를 촤락 뿌려내 불길을 확 일으키며 순간적으로 강렬한 화력으로 스테이크를 구워 내는 과정이 또한 그랬다. 실로 인간의 능력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차라리 마법이나 기적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 정도로 형진의 요리는 지금까지 시녀들이 접했던 그 어떤 요리와도 급이 달랐다.
맛의 마법사.
어느 순간 시녀의 뇌리에서는 그 단어가 형진이라는 인물을 정의하는 말로 자리 잡아 버렸다.
애초에 기사단의 일정을 빌미로 맛있는 것을 먹으러 왔던 것이다 보니, 그 말을 끝내자 더 이상 눌러앉아 있을 명분이 사라져 버렸다.
제랄딘은 내일 아침 식사 때 와도 되냐는 말을 꺼내고 싶은 욕망을 꾹 눌러 참으며 결국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생각은 굴뚝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차마 그렇게까지 얼굴에 철판을 깔 수는 없었던 것이다.
요조숙녀 노릇 하기도 정말 힘들다. 아무래도 미엘에게 말해서 예전에 납품 받은 전투식량이라도 하나 까먹든지 하는 수밖에 없을 듯 하다.
제랄딘이 저택으로 돌아오자 대동했던 시녀들은 다른 이들과 교대한 뒤 정신과 육체 모두에 느껴지는 포만감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숙소로 돌아왔다.
“너 별채 다녀왔다며. 그 분 만나봤어?”
“만나봤지.”
“어땠어?”
“그 분은… 정말 대단했어. 하아아…”
“…”
마치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살짝 얼굴마저 붉힌 채 꿈꾸는 표정을 짓다가 한숨을 푸욱 내쉬는 시녀의 모습에 동료시녀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형진이 선사한 음식을 접하는 순간 느꼈던 그 모든 황홀했던 느낌에 행복한 기분이 되었다가, 어쩌면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절로 탄식이 나온다.
“자세히 좀 설명해봐. 어떻게 대단했는데?”
원래 시녀는 입이 무거워야 한다. 주인이 딱히 함구를 시키지 않았더라도 괜히 여기저기 말을 흘리고 다니다가는 자칫 목숨이 달아날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냥 단순히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정도의 얘기라면 굳이 입을 다물 필요까진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형진이 만들어낸 음식은 그냥 단순히 맛있다 정도의 표현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불경처럼 느껴질 정도로 대단했다. 이 나라 최고 귀족 중 하나인 제랄딘이 그토록 정중하게 대할 때는 이유가 있게 마련. 그런 인물의 말이 공연히 저택 밖으로 흘러나갔다가 뭔가 일이 잘못 되기라도 하면 그 책임은 오늘 제랄딘을 수행했던 시녀들의 몫으로 돌아온다.
단순히 그런 이유 말고도, 다시 한 번 오늘과 같은 만찬을 경험하고 싶다는 욕망도 그녀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만약 오늘의 일이 흘러나간다면, 제랄딘의 별채 방문을 수행하는 일 자체의 경쟁률이 대폭 상승하게 될 것이다. 물론 누가 수행할 지는 전적으로 제랄딘이나 측근에서 그녀를 보살피는 미엘의 선택에 달린 일이지만, 그래도 경쟁률이 높아질 수 있는 빌미는 최대한 만들지 않는 것이 좋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수행 시녀들마저 입을 다물자, 사람들의 궁금증은 더욱 커져만 갔다. 시녀들의 사랑에 빠진 수줍은 소녀 같은 반응 역시 그런 궁금증을 더욱 부채질 했다. 시녀들 중에 한 명만 그랬으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고 넘어갔겠지만, 전부가 그런 반응을 보이니 도대체 왜 죄다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지 궁금할 수밖에.
어쨌든 그렇게 다시 하루가 지나고 아침이 밝아왔다.
“우…”
오늘도 어김없이 늦잠을 자다가 침대에서 굴러 떨어진 유아는 간단하게 씻고 주방으로 나오다가 훅 하고 불어닥치는 싸늘한 바람에 몸을 떨었다.
“오늘은 아침부터 날이 쌀쌀하네. 가기 전에 난로에 불 좀 지켜 놔야 할 것 같으니 장작 좀 가져다 놔.”
“네.”
유아는 저택 뒤에 쌓아둔 장작을 골라 안에 들여놓았다. 그 일이 대충 끝날 즈음이 되자, 주방에서 맛있는 냄새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헐레벌떡 주방으로 가서 자리에 앉자, 형진은 피식 웃으며 방금 막 만든 오므라이스가 담긴 접시를 내려 놓았다.
“어제 들었겠지만, 기사단을 방문해야 하니까 먹고 옷 갈아입어. 파티 가는 거 아니니까 너무 화려하게 꾸미진 말고.”
스푼을 들고 바로 식사를 시작하려던 유아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저요? 제가 기사단에 왜요?”
“왜긴 너도 전투식량 만드는데 한 손 거들었으니 당연히 살펴봐야지.”
유아는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물론 기사들은 명예를 소중하게 여기는 자들이지만, 희망과 생명의 사제인 그녀는 남자들만 바글바글한 장소는 가기가 좀 꺼려지는 것이 사실이다.
사실 형진이 메이드복이 아닌 정장을 입으라고 굳이 말한 것도 그래서이다. 형진이야 낙인 덕분에 전혀 상관이 없지만, 다른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어 희망과 생명의 사제가 지닌 후광이나 매료의 능력은 상당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괜히 메이드복을 입고 갔다가, 메이드나 시녀나 하녀나 노예나 기타 그런 식의 대상으로 인식되기라도 하면 괜히 쓸데없는 소란의 빌미가 될 수도 있다.
“가기 싫으면 그냥 남아 있어도 돼.”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소란의 빌미 자체를 없애는 것.
잠시 고민하던 유아였지만, 형진이 다시 그렇게 말하자 이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그럼 얼른 먹고 준비할게요.”
“그래.”
다소 걱정스런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제도 그렇고 최근 형진이 수련이나 기타 다른 이유 때문에 외출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조금 쓸쓸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물론 카트린도 있으니 외롭다고까지 느낄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역시 허전한 건 어쩔 수 없는 일. 그런 상황에 오랜 만에 둘이서 외출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 왔는데 발로 걷어찰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식사가 끝나자 유아는 설거지를 마치기가 무섭게 방으로 들어가 단장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봐야 아직 화장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게 사실이지만, 굳이 공들여 화장하지 않아도 그녀에게는 신이 내려준 매료와 후광이라는 누구보다 강력한 분장술이 있으니 사실 큰 문제는 아니다. 애초에 형진 아닌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공들여 예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도 사실이고.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정돈하고 나오자 오빠와 함께 식후 운동을 겸해서 산책을 하고 있던 카트린이 반색하며 찬사를 보낸다.
“어쩜. 언니, 너무 예뻐요!”
“정말? 고마워, 카트린.”
너무 튀지 않도록 비교적 형태가 간단하고 단색으로 된 프린세스 드레스를 골랐다. 노출도 거의 없고 머메이드 드레스처럼 몸매가 확연하게 부각되는 드레스도 아니었지만, 유아가 입으니 사제 특유의 은은하고 고아한 느낌이 강조되는 느낌이다. 이름처럼 공주님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괜찮네.”
솔직히 형진으로서는 군부대 방문하는데도 무슨 결혼식의 신부나 무도회에 참석하는 사람처럼 차려 입는 것이 영 어색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이곳의 정장이 이런 식으로 생겨먹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파티 드레스보다 조금 심플한 이브닝 드레스까지는 있어도 정강이가 드러나는 칵테일 드레스 같은 건 찾아볼 수조차 없으니 말해 무엇 하겠는가.
물론 그렇다고 다른 남자에게 일부러 유아의 몸매 같은 걸 보여주고 싶은 생각이 있는 건 아니다. 단지, 살아생전에 이곳에서 수영복 같은 걸 볼 기회가 있을까 싶을 뿐.
“이리 와.”
“네.”
유아는 형진의 부름에 살짝 볼을 붉히며 옆으로 다가가더니 그가 팔을 내밀자 못 이긴 척 팔짱을 낀다. 그게 뭐라고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잠시 기다리자 이내 말울음 소리와 함께 기사들이 호위하는 화려한 마차 한 대가 별채 앞에 도착한다.
마차를 보낸다고는 했지만, 이런 요란한 행차일 줄을 몰랐던 터라 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마차 문이 열리며 미엘이 내리더니 두 사람을 부른다.
“타세요. 생각해보니 굳이 마차 두 대에 나눠서 타고 가는 것도 번거로운 일일 것 같아서, 그냥 함께 가기로 했어요.”
“아, 그랬군요.”
하기야 군부대 방문할 때 괜히 행렬이 길어지면 그것도 민폐다. 무슨 위문 공연 가는 것도 아닌 다음에야, 그런 곳에 가는 방문은 가능한 한 규모가 적은 편이 좋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 말로.”
마차에 올라타며 안에서 기다리는 제랄딘에게 인사를 건네자, 그녀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례를 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형진과 유아가 마차에 올라타고 미엘이 문을 닫은 후 결계를 펼치자, 비로소 다소 경직된 것 같았던 제랄딘의 표정이 풀리더니 얼른 사과부터 한다.
“죄송해요.”
“네? 갑자기 무슨…”
“아무래도 미리 양해를 구해야 할 것 같아서요. 일이 좀 귀찮아질 것 같거든요.”
제랄딘은 그렇게 말하고는 이내 한숨을 푸욱 내쉬며 이렇게 덧붙였다.
“오늘 저희 기사단에 황자가 불시에 방문할 것 같다는 얘기가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