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799
00799 183. 방문 =========================
원하는 것.
그 말을 듣는 순간 페투스는 우뚝 굳어 버렸다.
상대는 신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진 존재인지 페투스로는 여전히 짐작조차 하기 어렵지만, 그 정도의 위세를 가진 자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 존재가 상으로 원하는 것을 이루어 준다 했으니 그 말이 가볍지는 않을 터.
하지만 막상 대답을 하려 해도 바로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당장 살아오면서 목표로 삼았던 일차적인 부분은 반지의 주인이 되면서 달성되었다. 반은 신의 위세에 기대어, 나머지 반은 그간의 노력에 힘입어 이루어 버린 것이다.
어머니를 죽인 원수들을 딛고 일어선 지금, 그에게 남은 목표는 형진이 내린 과제를 훌륭하게 수행하여 그가 속한 나라의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 하지만 이것은 소원으로 말하기엔 뭔가 미묘하다. 애초에 그것은 자신이 노력해서 이루어야 할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중한 것을 지키는 소원은 어떨까.
하지만 소중한 것이란 바꿔 말하자면 약점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그는 친구도 연인도 만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이 신에게 보호를 받고 있는 것처럼, 그런 소중한 자 또한 보호를 받을 수 있다면 어떨까. 그렇게만 된다면 자신의 약점이 아닌 인생을 함께할 동반자가 될 수 있을 터.
그런 존재가 있다면, 자신도 이따금씩 사무치는 외로움에 더 이상 괴로워 할 필요가 없다.
그래. 눈앞에 있는 이 한 쌍의 남녀처럼.
형진은 흥미로운 시선으로 자신이 던진 질문에 대해 고민하는 페투스를 바라보았다. 유아 역시 마찬가지. 아직 형진이 신으로서 누군가와 마주하는 모습을 직접 본 일이 적은 그녀로서는 두 남자의 대화가 그저 흥미진진할 뿐이다.
“정했습니다.”
“말하라.”
“언젠가… 저에게 소중한 사람이 생겼을 때, 그 사람 역시 지금의 저처럼 신의 권능으로 보호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형진은 물론이고 유아마저도 조금 놀란 표정이 되어 버렸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또 다른 시험일 수도 있었다. 자신을 숨기는 것에 능숙한 이 소년이 지니고 있는 가장 원초적인 욕망을 끄집어내기 위한, 그리하여 페투스라는 인물의 본질을 알기 위한 그런 시험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형진이 예상한 것은 조금 다른 대답이었다. 어머니를 되살려 달라던가, 자신에게 불사의 공능을 내려달라던가, 신의 힘을 나누어 달라든가, 평생 써도 모자랄 정도의 부와 권력을 선사해 달라든가 하는 식의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다. 신의 입으로 직접 원하는 것을 들어준다 했으니, 그에 어울리는 거창한 대답이 돌아와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막상 페투스의 입에서 나온 것은 전혀 의외의 대답이었다. 적어도 그 나이 또래의 남자아이 입에서 나올 만한 소원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하하하하하!”
형진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다. 그 정도 소원이라면 어려울 것이 없지.”
그제서야 형진은 자신이 이 소년에게 처음 대면했을 때부터 끌린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비록 가혹한 주위 환경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냉철하고 기민하며 영악한 인물이 되어야 했지만, 결국은 자신의 품에 들어온 가족을 아끼고 사랑할 줄 아는 심성을 숨기고 있는 어린 소년에 불과했다. 그것은 어찌 보면 자신을 거울에 비춘 모습과도 같았다.
보통 이런 식으로 자신과 닮은꼴의 인물과 만나면, 동족혐오 같은 것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상대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싫은 점이 부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형진은 달랐다. 그는 이미 신이었고, 그에 걸맞은 포용력을 갖춰가고 있었다. 그래서 동족혐오를 일으키기 보다는, 자신이 겪었던 시행착오를 이 소년은 어떻게 풀어나갈지 궁금해졌다. 과연 정말로 자신과 같은지, 아니면 이 소년만의 특별한 뭔가가 있을지. 그것은 직접 지켜보지 않고는 아무도 해답을 알 수 없는 흥미로운 수수께끼라 할 수 있었다.
“받아라.”
형진은 반지 하나를 꺼내 페투스에게 건넸다.
“이것은 네가 가진 것과 동일한 반지지만, 한 가지 차이가 있다. 다른 반지들은 내가 임의로 그 소유주를 정하고 바꿀 수 있지만, 이것은 오직 네가 진실로 마음을 열고 받아들인 동반자만이 착용할 수 있는 반지다. 네가 원하는 시간, 원하는 대상에게 그것을 건네주어라. 그리하면 네 소원은 이루어질 것이다.”
“감사합니다.”
페투스는 얼른 고개를 조아리며 두 손으로 형진이 건넨 반지를 받아들었다. 그러자 반지는 놀랍게도 그의 손바닥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말았다.
“이건…”
“놀랄 것 없다. 다른 이들이 네가 여분의 반지를 지닌 것을 알지 못하도록 감추어 둔 것뿐이니까. 네가 원한다면 반지는 언제든 나타나 네 뜻에 호응할 것이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혹시라도 그에게 여분의 반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의도적으로 접근하는 존재를 막기 위한 일차적인 조치인 셈이다. 물론 이런 식의 조치가 있든 없든, 아니 반지 같은 것이 있든 없든 한 나라의 실권을 장악한 페투스에게는 앞으로도 여러 가지 유혹이 다가서게 될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반지 때문에 라는 식으로 자신에게 다가선 인물은 의심하는 일은 없게 될 테니, 어쩌면 이것은 페투스 자신을 위한 조치라고도 할 수 있었다.
“저도 선물을 하나 드리고 싶어요.”
문득 지켜보고 있던 유아가 그렇게 말을 꺼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페투스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어 주었다.
“아, 아니… 그, 그, 그러니까…”
페투스는 갑작스러운 유아의 행동에 크게 놀랐고, 이내 형진의 눈치를 살폈다. 신의 아내라 칭해지는 여성과의 갑작스런 스킨십은 아직 그런 경험이 없는 소년에게는 너무나도 자극적이고 위험하게 느껴지는 일이었다.
“역시 쑥맥이었군. 아직 멀었어.”
하지만 막상 화를 내지 않을까 싶었던 형진은 그런 페투스의 놀란 모습에 웃어버리고 말았다. 어찌 보면 이런 면은 자신과 완전히 다른 부분이었고, 그런 소소한 차이가 그를 즐겁게 만들고 있었다.
“놀랐나 봐요.”
다시 자리에 앉은 유아가 살짝 웃으며 하는 말에 형진이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당연하지. 딱 봐도 아직 여자 손도 잡아 본 적조차 없는 것 같은데.”
“어머. 그럼 미안해지는데요.”
“무슨. 오히려 영광이지.”
그렇게 말을 주고 받는 부부의 모습에도 페투스는 우왕좌왕하는 정신을 부여잡기가 쉽지 않았다.
“이건… 그러니까, 방금 그건…”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몰라고 그렇게 더듬거리는 말투로 묻는 페투스에게 유아는 미소지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직 어린 나이인데도 피곤해 보여서요. 균형의 권능만큼 효과적이지는 않겠지만, 앞으로는 넘치는 생명력이 당신에게 활기를 불어 넣어줄 거에요.”
아직 다른 이들에게 밝힐 기회가 없었지만, 유아는 출산을 경험하면서 희망과 생명의 성녀로서의 능력 하나를 개화시켰다. 다른 이에게 축복을 내려서 그 대상에게 활기를 불어넣어주는 이 능력은 어찌 보면 식재료에 생명력을 퍼붓는 행위의 연장이기도 했다.
지켜보고 있던 형진도 한 마디 했다.
“사무실에만 처박혀 있지 말고 가끔은 나가서 운동도 좀 하고 그래. 그렇게 틀어박혀 있기만 하면 키 안 큰다.”
“알겠습니다.”
말해 놓고 보니 어쩐지 게임만 하는 아이들을 다그치는 아저씨 같은 말투가 되어 버렸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허여멀건한 놈이 방안에만 처박혀 있으면 정말 노스페라투 같은 모습이 되어 버릴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자신도 아저씨가 되어 버리는 건가 싶어 절로 쓴웃음이 지어진다.
“그럼 이만 가봐야겠군. 앞으로도 기대하겠다.”
“네? 좀 더 머물다 가시지 않고…”
“됐어. 주위 사람들에게 뭐라고 하려고.”
“그야…”
지금까지 자의반 타의반으로 대외적인 활동을 자제하고 있던 페투스가 느닷없이 정체도 알 수 없는 부부를 자신의 거처에 머물게 한다면 당연히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지금의 페투스는 지금 신을 대신하여 중대한 과제를 맡은 몸이며, 또한 파스쿰의 수도 델파나에서 가장 주목 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래서야 제대로 대접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런 저런 일로 신을 불쾌하게 만들 가능성이 더 크다.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알면 됐다.”
형진과 유아는 처음 왔을 때처럼 창문 밖의 발코니로 나아가 허공을 걸어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
페투스는 둘이 사라지고서도 한참이나 멍하니 그들이 사라진 공간을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보이지 않는 것이 어딘가로 사라지는 듯한 기척이 느껴졌지만, 아쉽게도 그로서는 허세와 망상의 권능을 통해 만들어진 환상을 꿰뚫어볼 힘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얼핏 꿈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손바닥을 들어 바라보니 그곳에 감추어져 있는 반지의 존재감이 틀림없이 전해지고 있었다.
페투스는 가만히 손을 모은 채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자신이 모시게 된 신의 모습을 되새기는 것으로 기도를 대신했다.
“새로운 세계라고 해서 조금 긴장했는데, 생각보다 별로 크게 차이가 나는 건 아닌 모양이네요.”
“실망했어?”
“아뇨. 오히려 안도했다고 보는 편이 맞겠죠.”
사실 스하족 같이 인간과는 이질적인 형태를 지닌 종족들이 사는 세계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녀석들은 요새 뭐하고 지내려나. 아직도 스하거리면서 사냥을 다니고 그러나. 한 번 들러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나중으로 미루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지금은 혼자만이 아니라 유아와 함께니까.
“다음은 어디로 갈 거에요?”
“음… 글쎄.”
다시 66번 국도를 거슬러 올라가는 여행을 하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여기서 밀월여행을 그만두고 돌아가기도 뭐하다. 라만 녀석에게 찾아가 볼까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그럴 거였다면 차라리 페투스 녀석에게 신세를 지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형진의 그런 고민을 알아챈 것인지, 유아가 문득 이렇게 말했다.
“우리, 시장 가봐요.”
“시장?”
갑자기 이게 무슨 뜬금없는 말인가 해서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녀는 방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른 세계니까, 먹을 거리도 다르지 않겠어요? 모처럼 다른 세계에 왔는데 그런 것도 경험을 해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어요.”
유아의 말을 듣는 순간 형진은 눈앞에서 뭔가 반짝 하고 빛이 터진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오, 그거 좋은 생각이야.”
페투스의 경우에는 보고가 빨랐지만, 다른 떨거지들이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지구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들도 하루 이틀 안에 결과가 나오기는 힘들다. 애초에 이렇게 유아와의 밀월여행을 결행하게 된 것도 그런 식으로 시간 여유가 남았기 때문이 아닌가.
따지고 보면 형진은 이런 식으로 누군가와 여행을 떠나본 일 자체가 드물다. 물론 타나토스에서 이곳 저곳 다녀보기는 했지만, 그것은 관광 목적이라기보다는 임무라든가 업무라든가 그런 식의 일 때문에 이동한 것이지 이렇게 누군가와 단 둘이서 여가를 즐기기 위해 여행을 떠나본 일 자체는 처음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첫 신혼 여행인지도 몰랐다. 희망과 생명이나 공포와 죽음이 이런 형진의 마음을 읽었다면 도대체 네 녀석의 신혼은 언제 끝나는 거냐고 한 마디 할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그렇다.
게다가 기왕 이런 저런 세계를 다스리게 되었는데 각각의 세계가 지닌 음식의 문화를 살피는 것도 필요한 일 아니겠는가. 이런 식의 여행은 또한 달인이 되고 난 뒤 어쩐지 매너리즘에 빠진 요리 실력에 활력을 줄 만한 자극제가 될 수도 있다.
왜 진작 이런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는지. 페투스에게만 밖으로 좀 나가보라고 할 게 아니다. 형진은 속으로 그렇게 쓴웃음을 지으며 얼른 지도 정보를 불러들였다.
“어디보자. 그래. 이곳이 좋겠군.”
형진은 그동안 모아놓은 앙그릴에 대한 정보를 뒤적여서 가장 큰 시장이 열리는 도시를 찾았다. 다행히 앙그릴은 발견한지 꽤 시간이 지났고, 카트린이 각국을 순방하며 모은 정보도 많았기 때문에 그가 원하는 조건을 갖춘 도시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잠시 동안의 탐색을 통해 위치를 확인하는 일이 끝나자, 그들이 탄 부양 자동차는 곧바로 앙그릴 중앙에 위치한 카살 제르토나라는 도시를 향해 날아갔다.
============================ 작품 후기 ============================
두편째.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