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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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기사단
혼자서 열 명 분의 숙련 요리사 몫을 하는 가사의 요정 브라우니.
이것은 꽤 솔깃한 얘기다.
당장 그리칸에서 제랄딘이 가문에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요리사도 애피타이저를 전문으로 하는 숙련 요리사 한 명 뿐이었을 정도로, 일정한 실력에 오른 요리사는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아마도 레이그릭 황자는 제랄딘이 섭외해 온 요리사에 대한 것을 알아내자 이런 계획을 세운 것이 틀림없다. 어지간한 요리사 하나보다 브라우니 한 명이 더 뛰어난 것은 반박의 여지가 없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고, 특히나 군대의 전투식량을 대량으로 만드는 일이라면 능률면에서도 비교할 수 없는 일이니까.
만약 그리칸으로 떠나기 전에 이런 제안이 들어왔다면 제랄딘으로서도 꽤 고민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효율이든 능률이든 실력이든 그 어떤 면으로 비교하더라도 절대로 넘볼 수 없는 엄청난 존재를 이미 섭외했기 때문이다. 무슨 꿍꿍이인지도 모르는 내기를 선뜻 받아들일 정도로 궁한 상황이 아닌 것이다. 그냥 줘도 받을까 말까인데 내기라니, 사람을 잘못 봐도 단단히 잘못 봤다고 볼 수밖에.
“별로 내키지 않는군요.”
그래서 제랄딘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렇게 완곡한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레이그릭 황자는 제랄딘의 이런 반응에 살짝 당황한 기색이었으나, 이내 괜히 튕겨 보는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라스미어 기사단은 작년에 열린 어전 토너먼트의 결승전에서 아쉬운 패배를 하여 준우승에 머물렀다. 분명 준우승이라도 대단한 것이긴 하지만, 사람들의 이목은 승자에게로 쏠릴 수밖에 없는 법. 더구나 지난해의 준우승은 어전 토너먼트 5연패의 위업을 달성하기 직전에 미끄러진 것이라 더 아쉬움이 컸다.
제랄딘이 굳이 어전 토너먼트를 전투식량의 시험무대로 삼은 것은 단순히 군으로의 도입을 빠르게 진행하기 위한 수단 뿐만 아니라, 지난 해의 아쉬움에 대한 설욕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레이그릭 황자는 그런 브라드로슈 가문이나 제랄딘의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겉으로는 관심 없는 척 보여도 실상은 그렇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하하. 내기라고 해서 불안한 모양이구려. 하지만 나도 그렇게 못된 사람은 아니오. 장차 좋은 관계가 될지도 모르는 그대에게 내 어찌 억지스런 요구를 할 수 있겠소.”
좋은 관계는 얼어 죽을.
아무래도 돌려 말해서는 들어먹을 사람이 아니라는 판단에, 제랄딘은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분명하게 말씀드리지요. 전하의 제의, 거절합니다.”
“…”
내기 내용이라도 들어보고 거절을 했다면 모를까. 아예 처음부터 싫다고 나오니 레이그릭은 잠시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이쯤 되면 아무리 바보라도 제랄딘의 의사를 알 수 있는 일. 알게 모르게 그녀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던 레이그릭은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으나, 꾹 눌러 참고 웃으며 다시 말했다. 속으로는 내 반드시 네년을 깔아뭉갠 뒤 앙앙거리는 소리를 듣고 말겠다 다짐하며.
“일단 내 말을 더 들어보시오.”
하기야 싫다고 했는데 그냥 물러서면 진상 취급을 받을 이유도 없다. 제랄딘은 미간을 찡그리는 것으로 불쾌감을 표했지만, 레이그릭은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 할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내기는 간단하오. 서로의 요리사가 만든 음식을 먹고, 그대의 기사와 나의 기사가 겨루는 것이오. 마침 나에게도 그대에게도 이 나라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기사가 한 명씩 있으니, 그들의 실력을 겨룸으로서 서로의 음식이 지닌 효과를 증명해 보이자는 얘기요.”
사실 요리라는 것의 우열을 가리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서로의 미각이 다르고 취향이 다르니, 실력이 비슷하다면 누가 심사를 하느냐에 따라 승부가 갈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런 식으로 내기까지 걸린 상황이라면 그러한 공정성이나 객관성의 문제는 요리 자체의 우열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가 될 수도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서로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는 전제 하에.
그런 점에서 보자면 황자가 제의한 방법은 꽤 흥미롭다.
수도에서 손꼽히는 기사 열 명 가운데 하나인 그랙커스와, 황자가 애지중지하는 기사인 소그마는 이전부터 호적수가 될 거란 평이 자자했던 인물들이다. 아직 서로의 실력을 비교해 본 바는 없지만, 명성으로 보나 위치로 보나 맞상대하기 부족함이 없는 인물들인 셈이다.
그랙커스가 살짝 흥미가 생긴 듯한 기색을 보이자, 레이그릭은 신이 나서 다시 말했다.
“내기에서 이기든 지든, 이 브라우니는 당신의 것이오. 내기에서 졌을 때는 물론이고, 이기더라도 나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당신이지 이 브라우니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니까. 대신 만약 내가 이긴다면 당신은 어전 토너먼트 전야의 무도회에서 나의 짝이 되어 주어야겠소. 어떻소. 참가만 하면 브라우니를 얻을 수 있는 것이오.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 생각하지 않소?”
제랄딘은 피식 웃어 버렸다.
확실히 그럴 듯한 제안이다. 내기에 참가하는 것만으로도 브라우니를 얻을 수 있다니, 어찌 솔깃한 제안이 아니겠는가.
레이그릭은 제랄딘의 입가에 웃음이 맺히자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어전 토너먼트 전야의 무도회에서 짝이 될 수 있다면, 자신의 매너와 춤 솜씨로 남자를 모르는 처녀 정도 녹이는 건 문제도 아닐 터. 설령 그렇지 못하더라도, 일단 그렇게 공식적인 자리에서 짝이 된 모습을 보이면 여론을 몰아 황자비의 자리로 밀어 올리는 건 일도 아니다. 어차피 귀족 여인으로 태어난 이상 가문의 의사를 거절할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다음 순간, 레이그릭은 제랄딘의 얼굴에 지어진 미소가 뭔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냥 미소가 아니다. 저것은, 명백한 비웃음이다!
“귀가 안 좋으신 겁니까, 전하. 분명히 말했을 텐데요. 거절이라고.”
“…”
차가운 제랄딘의 말에 레이그릭의 잘 생긴 얼굴을 모멸감으로 인해 참혹하게 뭉개졌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뒤에 서 있던 기사 하나가 검을 뽑으며 앞으로 나섰다.
“무엄하오! 공녀, 감히 황자 전하를 모욕하겠다는 것이오?”
그러자 공녀 옆에서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그랙커스가 검을 뽑으며 앞으로 나섰다. 본래 황자 앞에서 함부로 검을 뽑는 것은 자칫 큰 죄가 될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일이지만, 이 경우에는 레이그릭의 기사 소그마가 먼저 칼을 뽑아 공녀를 위협했으니 충분히 정당방위로 인정될 만한 사안이다. 제랄딘이나 그랙커스가 그저 그런 가문에 속해 있다면 황실의 힘으로 찍어 누를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지도 않은 이상 이런 명분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막상 소그마는 속으로 씨익 웃음을 지었다. 어떤 경로로 가든 결국 목적지로만 가면 그 뿐 아닌가. 단순히 내기가 되었든, 아니면 서로의 명예를 건 결투가 되었든 그랙커스와 자신이 싸울 수 있으면 그로서는 바랄 것이 없는 일이고, 또한 그 결과로 공녀가 전야제에서 황자의 짝이 될 수 있다면 모두가 좋은 일이다.
일촉즉발의 상황.
하지만 바로 그때,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던 제랄딘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더니, 두 기사가 살기를 뿜어내며 검을 겨누고 있는 곳 사이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것이다.
“공녀님, 위험…”
“괜찮아요.”
그랙커스가 얼른 말리려고 했으나 제랄딘은 태연한 표정으로 그렇게 답한 뒤, 자신을 향해 겨누어진 소그마의 검 앞에 스스로 목을 내밀었다.
“그 검으로 날 찌를 겁니까?”
“…”
소그마는 크게 놀라고 말았다. 앞서 보여주었던 위엄은 그렇다 쳐도, 지금의 이 모습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왕국 최고의 기사들이 뿜어내는 강렬한 살기가 소용돌이치는 공간 한 가운데에서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마치 찌를 수 있으면 찔러보라는 듯이 당당하게 검 앞에 목을 내밀고 있는 제랄딘의 그 모습이라니!
그녀의 당당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소그마는 주위의 모든 상황을 일순 잊고 말았다. 마치 시야 전체에 오직 그녀의 모습 밖에는 보이지 않고 있었다.
위압감을 뿜어내는 것도 아니고, 자신을 압도할 수 있는 어떤 기세를 뿜어내는 것조차 아님에도 불구하고 제랄딘은 이 순간 소그마의 시야 전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었다.
저벅.
바로 그 때, 제랄딘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딛었다. 소그마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녀의 걸음이 서슴없이 다시 앞으로 나오자,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검을 뽑아들긴 했어도 그것으로 정말 공녀를 찌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저 상대를 결투로 이끌어내기 위한 위협에 불과했고, 그랙커스가 검을 마주 뽑은 시점에서 그 의도는 성공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소그마는 난처한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도대체, 도대체 이 공녀는 어째서 조금도 두려운 기색을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이 날카로운 검이 두렵지도 않다는 말인가!
소그마는 레이그릭 황자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이 난처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제 레이그릭 황자가 앞으로 나서서 중재를 하는 수밖에 없다. 주군과 기사의 광계는 누가 일방적으로 충성을 주는 것이 아닌 쌍무계약. 소그마가 앞으로 나섰던 것처럼, 이제 그가 곤란한 상황에 처했으니 레이그릭이 나서야 할 차례다.
하지만 소그마의 눈에 들어온 레이그릭 황자는 자신보다 더 놀라고 당황한 모습으로 어쩔 줄 모르는 모습 뿐이었다. 제랄딘의 위엄과 존재감에 눌려, 지금 이 순간 다른 건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당황 속에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다.
소그마는 탄식했다.
내가 모시던 자가 고작 저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인간이었구나. 황자라는 껍질을 벗기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쭉정이에 불과했구나.
그에 반해 여전히 두려움 없는 기색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 공녀는 어떠한가. 일신의 무력 같은 것은 찾아볼 수도 없는 가녀린 몸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검 앞에 두려움 없이 걸음을 옮길 수 있는 이 기백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이것이야 말로, 진정 거느리는 자로서 지녀야 할 위엄은 아닐까.
소그마의 시선은 그랙커스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생각했다. 부럽다고. 이런 주군을 모실 수 있는 그가 부럽다고.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주군이 나서지 않은 이상,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져야만 한다. 적어도 그가 기사인 이것을 피해 갈 수는 없다.
소그마는 짧은 한숨과 함께 검을 거두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그것은 제랄딘에게 바치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 무례를 벌하고자 하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
갑작스런 소그마의 행동에 막사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크게 놀라고 말았다. 단순한 사죄라면 몰라도, 검을 바치는 행동이라니!
그럴 수밖에 없다. 기사가 무릎을 꿇고 자신의 검을 바친다는 것은, 상대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특히 상대가 속죄해야 할 대상이라면, 자신이 바친 검에 의해 목숨을 잃어도 좋다는 의미가 된다.
제랄딘은 자신에게 바쳐진 검을 받아들고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소그마에게 되물었다.
“달게 받겠다고 하셨나요?”
“그렇습니다.”
소그마가 목을 늘어뜨리고 그렇게 말하자, 제랄딘은 놀란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황자를 향해 말했다.
“황자님의 기사가 저에게 이렇게 말하는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힉!”
레이그릭은 검을 들고 자신을 바라보는 제랄딘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며 의자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모습에 당황해서 급히 일어나려고 했지만, 하필 신고 있던 키 높이 구두가 말썽이라 시녀의 도움을 받고 나서야 겨우 일어설 수 있었다.
레이그릭의 얼굴을 굴욕으로 붉게 물들었다.
망신이다. 이런 망신이 또 있을까.
제안은 더 이상 비교할 대상이 없을 정도로 모멸차게 거절당했다. 애지중지하던 기사 소그마는 고작 새파랗게 어린 계집애의 위엄에 눌려 자신에게 묻지도 않고 스스로 죄를 청하고 목숨을 떠맡겼다. 게다가 자신 또한 그 계집애의 모습에 놀라 의자에서 굴러 떨어지기까지 했다. 차마 어디서 자신이 겪은 이 모든 일이 회자되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치욕스러움을 견딜 수 없을 정도의 개망신이다.
“마, 마음대로 하시오!”
차마 제랄딘과 눈을 마주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그렇게 말한 레이그릭은 다른 이들을 거느리고 황급히 막사를 빠져 나갔다.
“마음대로 하라시는 군요.”
제랄딘은 여전히 자신에게 무릎을 꿇고 있는 소그마를 향해 그렇게 말했고, 소그마는 자신이 주군에게 버려졌다는 것을 깨닫고는 눈을 감은 채 목을 늘어뜨렸다.
어이없다. 마음대로 하라니. 허탈하다. 이제껏 저런 자를 주군으로 모시고 있던 자신이.
스릉.
그런 소그마의 귀에 검이 뽑히는 소리가 들렸다. 소그마는 뒤이어 찾아올 고통을 참아내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검이 닿은 곳은 그의 목이 아니라 양 어깨였다. 그것도 찌르거나 휘두르는 것이 아닌 가볍게 두드리는 정도의 감촉.
그리고, 놀라 고개를 드는 소그마의 귀로 제랄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그마경. 앞으로는 그랙커스경과 대결을 하고 싶다면 나에게 검이 아닌 대련 신청서를 내미십시오.”
“그 말씀은…”
제랄딘은 손을 내밀며 미소를 지었다.
“갈 곳 없는 기사를 거두어들일 의향 정도는 있다는 얘기입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던 소그마는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