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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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전야제
“빌어먹을. 빌어먹을!”
레이그릭 황자는 그런 소리를 중얼거리며 막사를 빠져 나오기가 무섭게 마차에 올랐다. 그러자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마차를 지키고 있던 시종이 다급하게 물었다.
“전하.”
“왜!”
“준비해온 음식들은 어떻게…”
“알아서 해!”
“네? 그게 무슨…”
시종은 당황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라스미어 기사단은 왕국 내의 다른 기사단에 비해서도 덩치가 상당히 큰 편이었고, 정규 기사만도 사백 명이 넘는데다 종자나 수습 기사 등의 인원까지 합치면 물경 이천이 넘어간다. 이번 행차의 명분이 야전 회식이었던 관계로 그 인원을 먹이기 위한 음식이나 식재료의 양은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제 와서 마음대로 하라니? 일개 시종이 어찌 그런 일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레이그릭 황자는 더 이상 말을 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는 듯이 문을 쾅 닫고 안으로 틀어박히고 말았다.
“어, 어쩌지?”
“글쎄요.”
이렇게 되면 시종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예정대로 음식을 기사단에 전달하든가, 그냥 다시 들고 돌아가는 것뿐이다. 하지만 시종들이 미처 어떤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다시 마차 안에서 황자의 명령이 전해졌다.
“당장 돌아간다!”
시종들은 그 명을 듣는 순간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음식을 담은 수레들은 기사단에 통째로 넘기고 말았다. 다시 들고 돌아가자니 뒤처리도 곤란하고, 그렇다고 그 많은 음식을 전부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제랄딘이 그랙커스와 소그마를 거느리고 장막을 나온 것은, 이미 황자의 마차가 느릿느릿 기사단의 책문을 빠져 나가고 있을 즈음이었다.
“소그마 경의 일은 달리 사람을 보내든가 해야겠군요.”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공녀님.”
“괜찮아요. 그 정도쯤이야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이죠.”
제랄딘은 그렇게 말하고는 황자가 남겨 두고 간 음식 수레들을 보며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진짜 문제는 저기 있군요. 참 많이도 가져왔네요. 누가 훈련 중에 저렇게 많이 먹는다고.”
제랄딘의 말에 그랙커스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일단 가지고 온 성의가 있으니, 정규 기사를 제외한 인원들에게 회식을 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반 정도는 남을 것 같지만 수도의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면 되겠군요.”
“그 일은 경이 알아서 하세요.”
“알겠습니다.”
제랄딘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의 마차로 다가갔다. 기사단의 훈련을 위해서는 미엘이 보관중인 전투식량을 받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미엘이 유아를 다독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미안해요. 설마 그렇게 노골적으로 나올 줄은 나도 몰랐어요.”
“아, 아뇨. 공녀님이 무슨 잘못이 있으시다고…”
당황해서 얼른 손을 내젓는 유아의 모습을 보니 많이 진정된 모양이다. 제랄딘은 그런 유아를 바라보며 빙긋 웃다가 이내 뭔가 허전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미엘에게 물었다.
“진님은?”
“그게… 잠깐 용무가 있으시다고.”
아직 자신들의 정체를 모르는 유아 앞에서 다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라 일단 그렇게 입으로 말한 뒤 메시지로 자세한 내용을 전한다.
[황자의 마차를 잠깐 손보겠다고 하더니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요.] [마차?]제랄딘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진이 화장실에 다녀온 사람처럼 손에 묻은 물기를 털며 마차로 다가왔다.
“다녀왔습니다. 하하, 속이 좀 안 좋아서 오래 걸리고 말았군요.”
“…”
유아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너스레를 떨며 다가오는 형진을 바라보았다. 여자들, 특히 지체 높은 공녀 앞에서 할 말도 아닐뿐더러, 자신이 이런 상황인데 고작 화장실에서 힘이나 주고 있었다는 말에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유아가 조금 삐친 표정으로 입술을 내미는 순간, 세 집행자들은 이미 메시지를 통해 서로의 의사를 전달하고 있었다.
“시원하시겠어요?”
[마차라니요. 뭘 하고 오신 거에요?]
“물론이지. 당연한 걸 묻고 그래.”
[그냥 살짝 손을 봤습니다.]
“기가 막혀. 너무 당당한 거 아니에요?”
“당당하지 못할 게 뭐 있겠어. 마치 자기는 화장실 안 가는 것처럼.”
[구체적으로 물어도 될까요?]
“크흠. 진님. 사이가 좋으신 건 알겠지만, 부부싸움은 저희들 없는 곳에서.”
“부, 부, 부부싸움이라뇨!”
[어디보자. 아마 지금쯤이면 기별이 올 것도 같군요.]
입으로 하는 대화와 메시지까지 멀티태스킹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형진은 살짝 머리가 복잡해졌다. 더 대화가 길어졌다면 헷갈려서 말이 헛나왔을지도 모르겠지만, 바로 그 순간 어디선가 우지끈하고 거하게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형진은 씨익 웃더니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이쿠, 뭔가 거하게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는군요. 천둥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자 제랄딘이 급히 말했다.
[어떻게 하신 거죠?] [별 거 없습니다. 달리다가 적당히 충격이 누적되면 마차가 주저앉으며 안에 탄 특정 인물의 특정 부위에 특정 조형물이 떨어지도록 조치를 해두었을 뿐입니다.]제랄딘과 미엘은 그 애매모호한 대답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정확하게 특정이라는 단어가 지칭하는 것이 무엇인지 언급되지 않았음에도 지금 저 바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눈으로 본 것처럼 그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으아아아아악!”
“저, 전하! 큰일이다! 어서 사제를! 마법사를!”
책문을 지날 때만 해도 마차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그 밖으로 나서며 제대로 포장되지 않은 길을 달리기 시작하자, 형진이 손 본 곳 여기저기에서 균열이 생겼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생채기에 가까웠지만, 일단 틈이 벌어지자 마차의 무지막지한 하중과 불규칙한 노면으로부터 전해지는 충격이 균열을 키웠고, 일단 갈라지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구조 자체가 붕괴하며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마차의 붕괴는 형진이 인스턴트 킬을 펼쳤을 때와는 양상이 달랐다. 차라리 인스턴트 킬로 인해 부서졌더라면, 완전히 분쇄가 되어버리니 갑자기 마차가 주저앉은 것에 대한 충격 정도밖에는 입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형진은 레이그릭 황자가 좀 놀라는 수준으로 일을 끝낼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다.
곧바로 날카롭게 갈라지고 부러진 잔해들이 미리 내리꽂힐 방향이 정해진 것처럼 떨어져 내렸다. 레이그릭 황자는 씨근덕거리며 어떻게 해야 제랄딘 공녀에게 자신이 겪은 수모를 되돌려 줄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갑자기 내리 찍히는 잔해에 신체 일부가 그대로 뭉개지고 말았다.
[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거죠?] [맞아요. 황자가 다른 자리에 앉는다든가 할 수도 있잖아요.]그 말에 형진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버릇이란 건 의외로 무서운 겁니다. 특히 자주 타고 다니는 마차 같은 건 보통 앉는 자리가 정해져 있기 마련이죠. 당장 두 분만 해도 그렇지 않습니까.]형진의 말에 제랄딘과 미엘은 자신들이 앉아 있는 자리를 살폈고, 뒤이어 방금 들은 말 대로라는 것을 알아차리자 등골을 타고 짜릿한 전율이 느껴지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물건을 원하는 형태로 파괴할 수 있다는 것부터가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황자가 어느 자리에 즐겨 앉는지를 파악하고, 그것을 이용해 암살에 준하는 일을 해냈으니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황자의 행렬로부터 전령이 달려와 기사단에 도움을 청했다. 그랙커스는 곧바로 사람들 보냈고, 그들을 통해 황자의 중요한 신체 부위가 완전히 회생 불가능할 정도로 짓뭉개져 버렸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무, 무서운 분이셨군요. 진님은.] [별 말씀을요.]이제 황실은 상황이 복잡하게 돌아가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전대에 황제가 집행자에 의해 암살당하면서 계승 순위가 복잡해지고 말았는데, 이제 다시 레이그릭 황자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었으니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황실 내부의 권력 향방이 더욱 복잡해지게 생겼다. 오히려 레이그릭이 죽었으면 문제가 깔끔하게 처리되었겠지만, 죽지 않고 살아남았으니 상황이 골치 아프게 되어 버린 것이다.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에요?”
셋이 메시지를 나누는 동안, 대화에서 소외된 유아만이 상황 파악이 안 되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음, 천벌이 내렸다고나 할까. 이야, 정말 살다보면 이런 일도 있구나 싶다니까. 이럴 때 보면 정말 신이 있다는 실감이 팍팍 들지 않아?”
“무슨 소리에요. 당연한 얘기잖아요. 신이 계시다는 것쯤은.”
“어, 그런가. 하하.”
레이그릭 황자의 방문과 돌아가는 길에 일어난 사고로 인해 기사단은 잠시 북새통이 되어 버렸지만, 부상당한 황자가 궁으로 실려 가자 원래의 일정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 도대체 이건.”
“어떻습니까.”
“대단합니다. 브라우니의 음식은 비교하기조차 민망하군요. 정말 대단합니다.”
점심시간에 맞춰 기사단 전체에 회식이 시작되었다. 다른 이들은 황자가 놓고 간 음식으로 회식을 시작했으나, 정규 기사들은 오후의 훈련을 위해 전투 식량으로 배식을 했고, 당연히 새로 제랄딘의 기사가 된 소그마도 똑같이 전투식량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브라우니? 설마 그 가사의 요정 브라우니?”
“아, 맞다. 그 얘길 안 했군요.”
제랄딘은 형진에게 황자가 가지고 왔던 브라우니에 대한 얘기를 했다.
“오호, 정말로 그런 것이 있었군요. 꽤 구미가 동하는데요.”
“서, 설마… 잡아먹으려는 거에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 바보 메이드는. 당연히 요리 보조로 쓰려고 그러는 거잖아.”
“아, 그랬구나.”
“평소 나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구나. 그리고 요정에 대한 네 인식도.”
“무슨 소리에요. 내가 뭘 어쨌다고.”
제랄딘과 미엘은 웃으며 형진과 유아가 또다시 부부싸움을 벌이는 모습을 흐뭇한 미소로 지켜 보았다. 아까만 해도 새파랗게 질린 모습이 걱정되었는데, 형진이 적당히 맞상대를 하며 원래대로 되돌려 놓는 모습을 보니 역시라는 생각도 들었다.
참, 여러모로 신기한 남자다.
다행히 그 날의 시험은 예상보다 훨씬 더 큰 호응을 얻었다. 형진과 유아는 그랙커스와 소그마, 그리고 기사단의 정규 기사들로부터 전해진 의견을 종합하는 일로 오후 내내 정신이 없었다.
“어때요. 가능할까요?”
“물론입니다. 메뉴 전체가 다 바뀌는 것도 아니니까요. 자고로 이런 군수품은 사용할 사람의 의견이 가장 중요한 법이죠.”
일정을 마친 그들은 다시 오전에 그랬던 것처럼 제랄딘의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와서 별채를 지키고 있던 남매와 함께 저녁 식사를 마친 형진은 언제나 그렇듯이 간단하게 수련을 마친 후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그는 잠들지 않았다. 어느 정도 밤이 깊어지자 유령처럼 스르르 일어나 장비를 갖추고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집을 빠져 나오기가 무섭게, 세 명의 그림자가 형진에게 다가왔다. 제랄딘, 미엘, 그리고 크루그다.
“두 분은 그렇다 쳐도, 넌 어떻게 알고?”
“누군가 별채로 조용히 접근하길래 나와 봤더니 누나들이더라고요.”
크루그의 말이 끝나자, 제랄딘이 혀를 차며 말했다.
“진님도 참. 황궁이 애들 놀이터도 아니고 혼자서 어쩌려는 거에요?”
그 말에 형진은 씩 웃으며 말했다.
“두 분이 도와주실 줄 알았죠. 생각대로 이렇게 나와 주시기도 했고.”
미엘은 못 말리겠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가요. 황궁은 결계가 많아서 그냥 막 들어가면 바로 걸려요. 제가 앞장설게요.”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