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831
00831 192. 전조 =========================
“꺄!”
외마디 비명과 함께 무언가 요란하게 깨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따뜻하게 내리 쬐는 햇빛을 즐기며 태어날 아기의 옷을 만들고 있던 다이애나는 손가락에 따끔한 통증이 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괜찮으세요? 잠시만요.”
옆에서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은염랑이 얼른 회복의 힘이 담긴 성물을 가져다가 다이애나의 손을 치료했다.
“무슨 일이죠?”
바늘에 손가락 좀 찔린 것 가지고 무슨 호들갑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다이애나는 이런 식의 작은 상처라도 감염 증상이 일어날 경우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순순히 치료를 받아들였다. 그녀는 강력한 힘을 지닌 희망과 생명의 사제들이 존재하는 타나토스 출신이지만, 그런 권능의 혜택이 모든 사람에게 균등하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그녀는 새로운 생명을 잉태 중인 임산부이기까지 하니, 더욱더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다.
“새로 온 무수리들이 또 뭔가를 깨뜨려 먹은 모양입니다.”
다른 은염랑이 조심스럽게 대답한다. 혹시라도 그녀가 놀라지나 않았을까 걱정스러워 하는 눈빛이다.
“그런가요. 아직 일이 많이 서툰 모양이군요.”
“네, 뭐…”
그걸 과연 그저 조금 서툰 정도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까 싶었지만, 은염랑은 굳이 그런 말을 꺼내거나 하지 않았다. 굳이 다이애나가 신경 쓸 사안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치료가 끝나자 다이애나는 다시 바느질을 하려다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은 그분이 오시는 날이었죠?”
“그렇습니다.”
“그럼… 준비를 해야겠네요.”
“돕겠습니다.”
곧바로 다이애나는 하던 일을 마무리 짓고는 조심스럽게 몸을 씻고 단장을 시작했다. 그분이란 다름 아닌 형진을 의미하는 말. 이것은 그를 맞이하기 위한 작은 의식이다.
본래 이곳에 별궁을 만들고 난 뒤로 한동안 형진은 다이애나 곁에 항상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본신 상태로 자신의 곁에 머물러 있는 그의 등을 떠밀어 보냈다.
“항상 옆에 있어 주는 것은 기쁘지만, 지금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머니께서 맡기신 일을 해결하는 거에요.”
“그럼, 아바타라도…”
“싫어요. 차라리 가끔 시간을 내서 들려주세요. 저는 그때마다 단정하게 몸을 씻고 당신을 기다리도록 할게요. 언제나 함께라는 안락함도 좋지만, 그런 식으로 뭔가를 기대하는 나날도 좋지 않겠어요?”
형진은 불만스러운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렇다고 다이애나의 의견을 무시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형진은 아이를 가진 아내의 말을 무시할 수 있는 남자가 아니다.
다이애나가 준비를 마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공간을 넘어 형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이애나.”
“진…”
둘은 마주하기가 무섭게 조심스럽게 서로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상대에게서 전해져 오는 은은한 향기와 체온과 호흡과 그 외의 다른 모든 것들을 만끽했다.
“별 일 없었지?”
다이애나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네. 새로 보내주신 무수리들이 그릇을 많이 깨먹은 것 빼고는요.”
“역시나로군.”
문자 그대로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며 살아왔던 그들이 아무렇지 않게 무수리 일에 적응한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더구나 그들은 새로운 환경과 전락해 버린 처지에 적지 않게 당황하고 혼란스러워 하는 상태, 이래서야 실수가 많을 수밖에 없다.
물론 다이애나는 이 새로운 무수리들을 어설프게 동정하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남자들을 싫어했던 것처럼 서민들 위에서 떵떵거리는 지배층들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더구나 이들은 그녀의 남편에게 죄를 짓고 벌을 받고 있는 상태. 그녀가 함부로 나설 일도 아니다.
“그래도, 깨진 그릇은 위험하니까 깨지지 않는 그릇을 들여놓든가 해야겠군.”
형진의 말에 다이애나는 눈이 동그래졌다.
“설마 권능을 사용하시려고요? 그 많은 그릇에 일일이?”
“그런 방법도 있긴 하지만, 깨지지 않는 그릇 자체는 의외로 만드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아. 내 발길이 닿는 곳은 하나의 세계만이 아니니까.”
“그렇군요.”
나누고 있는 대화는 다분히 일상적이지만, 그들의 몸짓과 눈짓은 전혀 일상적이지 않았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잠시나마 떨어져 있었던 신혼부부가 다시금 해후를 했으니 서로를 원하는 행동을 보이는 건 차라리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분위기를 알아챈 은염랑과 요정들이 조용히 자리를 피한다. 한동안 관계를 삼갔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었으니 조심스럽게 다시 관계를 시작해도 괜찮다는 판단이 내려진 상태다. 괜히 다이애나가 몸을 씻고 심혈을 기울여 몸단장을 한 것이 아니다.
형진은 다이애나를 공주님처럼 안아 올린 다음 그대로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침대 위에 내려놓고는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음…”
다이애나는 작게 신음하며 그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그대로 녹아내릴 것만 같은 기분. 그래서 더 얄밉다. 이 정도로 키스를 잘 하려면 얼마나 많은 경험이 쌓여야 할지 그녀로서는 가늠조차도 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형진의 손이 움직이며 모처럼 예쁘게 차려입은 옷의 단추를 푸는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둘은 갑자기 정지 버튼을 누르기라도 한 것처럼 행동이 우뚝 멈춰버리고 말았다.
순간 심상치 않은 어떤 느낌이 둘에게 동시에 전해진 탓이다.
“이건…”
“당신도… 느꼈나요?”
“당신도?”
“네. 저도요.”
방금 전의 달콤했던 분위기는 간 데 없이, 둘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잠시 입술을 깨문 채 뭔가를 생각하던 형진은 몸을 일으키며 다이애나에게 말했다.
“내가 가서 확인해 보도록 하지. 당신은 여기서 기다려.”
“저도…”
“안 돼.”
“…”
단호한 형진의 말에 다이애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이 맞다. 그녀는 지금 홀몸이 아닌 상태. 게다가 지닌바 힘을 생각해도 지금은 그녀가 나설 때가 아니다.
형진은 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숙이는 다이애나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어 주고는 다시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무슨 일인지 확인해 보고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때 하던 걸 마저 하면 돼.”
“당신도 참…”
다이애나는 살짝 얼굴을 붉혔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럼, 다녀오세요.”
“미안.”
형진은 그녀의 콧잔등에 다시 한 번 입을 맞추고는 황급히 어딘가로 향했다. 다이애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어머니…”
부부간의 중요한 행위를 멈추게 만든 원인은 다름 아닌 포트니아 테론이었다. 형진이 급히 움직여 그녀에게 도달했을 때, 포트니아 테론은 작게 신음하며 몸을 떨고 있는 중이었다.
“장모님!”
공간을 넘어 도달한 그의 모습에 포트니아 테론은 쓴웃음을 지어 버렸다.
“와주었군…”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다. 만약 포트니아 테론이 사람의 모습이었다면 새파랗게 안색이 질린 채 바로 쓰러질 것 같은 그런 느낌의 목소리. 형진은 생각보다 상황이 좋지 않다는 생각에 굳은 얼굴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게… 으윽.”
암흑 속에 자리 잡은 거대한 소용돌이가 부르르 떨린다. 그러자 부근의 공간 모두가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뒤흔들린다. 공간이 뒤흔들리는 현상이니 차라리 공진이라고 부르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 형진은 조심스럽게 포트니아 테론에게 다가갔다.
사실 이런 식으로 포트니아 테론의 실체와 접촉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녀의 몸은 이미 언데드의 힘에 완전히 침식되어 있는 상황이었고, 비록 형진이 밤의 신격을 지녔더라도 힘의 차이가 있는 만큼 자칫 좋지 않은 영향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에 은연중에 본신끼리의 접촉은 삼가고 있었던 것이다.
“자, 잠깐…”
때문에 자신에게 다가오는 형진의 모습에 포트니아 테론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형진은 그런 반응에도 불구하고 조심스럽게 다가서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마 괜찮을 겁니다.”
“하지만…”
“저를 믿어 보십시오. 장모님.”
“…”
따지고 보면 포트니아 테론은 지금까지 다른 누군가를 의지한다든가 하는 생각을 떠올려 본 적이 없다. 그녀는 처음부터 혼자였고, 이후에 다른 모든 것들이 탄생하고 난 뒤에도 계속 혼자서 지내왔다. 엘리시온을 탄생시키고 다시 신들이 태어난 뒤에도 그건 마찬가지. 어쩌면 그녀는 처음부터 혼자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고, 스스로도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힘들고 괴로울 때는 역시 다른 누군가의 손길이 그리워지기 마련이다. 그것은 비단 인간이 아닌 절대적인 존재라 칭해지는 그녀라도 다르지 않은 일이다.
방금 전 다이애나와 형진이 동시에 느꼈던 그것은, 바로 은연중에 그녀의 내심으로부터 전해진 의사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말로서 표현한 것은 아니지만, 너무나도 고통스럽고 외로워서 작게 내뱉은 신음 소리가 자신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둘에게 여과없이 전해져 버린 것이라고나 할까.
“알겠네.”
“감사합니다.”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 넘어간 것일까. 포트니아 테론에게서 허락의 말이 나오자, 형진은 마침내 그녀의 본신이라 할 수 있는 거대한 소용돌이와 접촉했다.
화악!
순간 형진에게 수많은 것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것은 정보였다. 아주 오랜 세월을 지내오면서 포트니아 테론이 접해온 모든 시간과 공간과 그 외 다른 모든 것들의 사념들이 그녀의 본신을 마치 허물처럼 뒤덮고 있다가 형진이 접촉하자 그에게로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또한 그것은 정보라기에는 너무나 단편적이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이었다. 제대로 정제되지 않은 정보들은 형진에게 잠시 머물렀다가 이내 본래 그랬던 것처럼 산산이 부서져 어딘가로 흩어져 버렸다.
워낙 오랜 세월을 지내왔고, 또한 너무나 근원에 가까운 존재이다 보니 그녀의 몸 주위를 떠도는 그런 별 것 아닌 정보 또한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렇게 많이 쌓여 있었던 모양이다.
“으음…”
손으로 움켜잡으려 해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버리는 모래알처럼 그렇게 정보들이 한순간 지나쳤다 사라지는 과정에 형진은 흠칫 놀랐지만, 딱히 그런 현상이 그에게 문제를 일으키거나 하지는 않았다. 단지, 아주 작은 정보의 편린들이 모래폭풍을 지나쳐 온 사람의 몸에 달라붙는 것처럼 남았을 뿐이다.
첫 접촉이 그렇게 끝나자, 형진은 조심스럽게 포트니아 테론에게 힘을 주입했다.
“자, 자네?”
뭘 하려고 그러나 싶은 생각에 형진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포트니아 테론은 깜짝 놀랐다. 그를 통해 강대한 힘이 전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신의 힘이 아니라 상당한 수준으로 정제된 언데드의 힘이!
“이게 어떻게 된 건가. 설마… 자네, 타락해 버린 건가!”
너무나 놀라 그렇게 외쳤지만 형진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게 대답하는 형진의 모습에 포트니아 테론은 잠시 얼이 빠지고 말았다. 아무래도 지금의 이 상황이 그녀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탓이다.
“그럼? 그럼… 이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지금 나에게 전해지고 있는 이것은 분명 언데드의 힘일 텐데!”
형진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포트니아 테론에게 힘을 전해주는 것은 멈추지 않은 상태로.
“인간들이 만들어낸 기술 가운데 분별 증류라는 것이 있습니다.”
“뭐?”
분별 증류라니. 이건 또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지. 얼떨떨해 하는 포트니아 테론에게 형진은 찬찬히 설명을 이어갔다.
“이것은 본래 자연상에 존재하는 어떤 화학물질을 용도에 맞게 정제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죠. 자연 상태 그대로는 여러 가지 화합물과 불순물들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기 때문이죠. 때문에 인간들은 이것을 열이라는 수단을 사용해 각각의 물질들을 따로 분리, 정제해서 사용하곤 합니다.”
형진은 씩 웃으며 말을 맺었다.
“지금 보내드리고 있는 언데드의 힘은, 그런 식으로 불순물을 제거한 상태의 것입니다. 별 효험이 없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의외로 잘 통하는 것 같아서 저로서도 안심이군요.”
“…”
============================ 작품 후기 ============================
일단 한편.
데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