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840
00840 194. 신입 =========================
기초적인 교육을 통해 어느 정도 가능성이 보인다고 판단되자, 마침내 실무 교육 일정이 잡혔다. 실무 교육이라고 해봐야 당분간은 요안나나 제랄딘이 일하는 와중에 간단한 잡무 정도를 돕는 것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간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후아아아…”
하지만 난생 처음 해보는 일인데다 상사의 눈치까지 봐야 하고, 정작 중요한 형진은 코빼기도 보지 못하는 시간이 이어지자 둘은 벌써부터 상당한 피로감을 느끼고 있는 중이다. 차라리 주시자로서 누군가를 지켜보거나 처벌하는 일이 몇백 몇천 몇만 배는 쉽고 편하다고 느낄 정도다.
그렇게 하루 종일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일에 매달리다가, 겨우 숙소로 돌아오고 나면 그녀들은 곧바로 뜨끈한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휴식을 취하는 시간을 가졌다. 몸보다는 정신이 지친 것이긴 하지만, 전신이 노골노골하게 녹아내리는 듯한 그 느낌을 만끽하고 나면 그런 식의 피로감도 조금은 풀어지는 것만 같다.
“그래도 정신 차려야지.”
자신들은 이런 식으로 퇴근이라도 하지, 요안나와 제랄딘은 그렇지도 않다. 휴식이라고 해봐야 형진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고작. 그 외에는 학교에 가거나 자기 소유의 기업을 돌아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처음에 업무 분담표를 봤을 때부터도 느낀 거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정말 인간이 맞는 건가 싶은 느낌이다.
하지만 이렇게 놀라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자신들이 수습 비서가 된 것은 그런 그녀들의 일을 물려받기 위해서가 아닌가. 솔직히 가능할까 싶은 것이 사실이긴 해도, 이미 가능함을 증명해 보인 이들이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위안으로 삼을 뿐이다. 솔직히 위안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족쇄가 맞을 것 같은 느낌이긴 하지만.
숙소에 딸린 욕실에서 목욕을 마치고 나서 간편한 옷을 입은 채 밖으로 나오던 규설은 머리를 한쪽으로 땋아 내린 채 마찬가지로 숙소에서 나오던 힐리에타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식사 하러가?”
“응. 너도?”
“나도.”
“…”
“…”
뭔가 되게 어색한 느낌이다. 방금 전까지 함께 일에 매달리던 것이 거짓말처럼. 그리고 그런 어색함을 그대로 지닌 채 식당으로 향했다.
형진은 아무리 바빠도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본래대로라면 새로 수습 비서가 된 둘 역시 왕성의 식사 시간에는 함께 참석해야 옳다. 규설과 힐리에타도 은근히 그런 시간들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현실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고작해야 기초 내지는 기본에 해당하는 교육조차도 그녀들로서는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조금 시간이 지나서 어느 정도 익숙해졌으니 이렇게 목욕하고 식사라고 하러 숙소를 나설 수 있는 것이지, 처음 며칠 동안은 퇴근하기가 무섭게 옷도 못 갈아입고 그대로 침대에 엎어진 채로 골아 떨어졌을 정도다. 둘이 보통의 인간이었다면, 대번에 과로로 몸져누웠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미엘이 자신들을 뽑은 이유가 일반적인 인간보다 훨씬 튼튼한 존재들이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떠올렸을 정도다.
어쨌든 그런 어색한 분위기로 식당에 들어서자, 몇몇 얼굴들이 보인다.
“어서 와요. 그렇지 않아도 이 시간쯤 올 거라 생각했어요.”
식당에서 그녀들을 맞이한 것은 다름 아닌 아란이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주위에는 왕성의 다른 식구들 몇몇이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서 앉아.”
“감사합니다.”
아란의 옆에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는 남녀가 먼저 둘을 보고 아는 체를 한다. 분위기도 닮았고 거무스름한 피부 빛도 비슷해서 처음에는 남매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소개를 받고 보니 아니란다. 누나로 보이는 쪽이 일종의 후견인이고, 남자 아이는 죄를 짓고 그것을 속죄하기 위해 왕성에서 간단한 잡무를 하면서 교육을 받는 중이라던가. 저런 아이가 무슨 큰 죄를 지었길래 밤의 신의 왕성에 갇혀 있는 것인가 싶긴 하지만, 겉으로 보기엔 죄수라기보다는 왕성을 드나드는 환수들의 아이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일은 많이 익숙해지신 건가요?”
“그럭저럭. 뭔가 좋은 일이 있는 거야? 아사드도 그렇고 미나 언니도 그렇고 표정이 꽤 밝은데.”
“헤헷. 표가 나나요?”
“응. 많이.”
그래도 형진의 제자라는 신분으로 왕성에 머문지 꽤 되는 규설이 아사드와는 좀 더 친근한 쪽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힐리에타는 아직 왕성이라는 곳이 여러모로 서먹할 수밖에 없다.
“진이 만든 거에요. 먹어 봐요.”
“정말요? 감사합니다!”
형진이 만든 음식은 워낙 인기가 좋아서 이 시간까지 남아있기 어렵다. 이것은 아마도 그녀들의 식사를 챙겨주는 아란이 특별히 남겨 놓은 것이라고 봐야한다.
“으음! 마이쩌!”
“정말. 역시 스승님 음식 솜씨는 최고야!”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이렇게 그가 만든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역시 왕성에 들어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규설도 힐리에타도 그렇게 길들여져 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 무슨 좋은 일이 있는 거야? 설마 둘이 사귀기라도 하는 거야?”
규설의 말에 아사드는 눈이 동그래졌다.
“네? 사귀어요? 제가요? 누나랑?”
음식을 먹고 있던 미나는 피식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에이, 아직 털도 안 난 애송이랑 무슨.”
“…”
곧바로 아사드는 얼굴을 찌푸렸지만, 미나는 키득거리며 그의 음료수 잔을 채워주었다. 마치 이거 먹고 얼른 크기나 하라는 듯한 느낌으로.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이런 걸 본다면 친남매라고 오해하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듯 하다.
“그럼 뭔데?”
“실은…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었어요.”
“오, 정말?”
제랄딘이 타나토스에 추진하고 있는 교육 정책은 아이들을 위한 초등 교육 기관의 시행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이제 중등 교육 기관의 설립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아직 교사들의 모집이라든가 여러 가지 문제가 완전하게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왕성 안에서 연금 상태로 머물고 있던 아사드에게 마침내 학교를 다녀도 좋다는 허락이 내려진 것이다.
완전한 해방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정도라도 지금의 아사드에게는 감지덕지일 수밖에 없다. 지나고 나서야 자신이 얼마나 큰 죄를 저지른 것인지 이해했기 때문이다.
미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한층 표정이 밝아진 아사드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를 낳아본 적도, 키워본 적도 없지만 이런 아들이라면 하나쯤 있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떠올리고 있을 정도다.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식사 시간을 이어가고 있는데, 문득 다시 한 쌍의 커플이 식당으로 들어온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란님.”
“아니에요. 오귀스트님, 하마란님. 어서 앉으세요. 바로 준비해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가스트샵이 앙그릴로 사업을 확장하게 되면서, 오귀스트 역시 급증하는 업무량에 허덕이고 있는 중이다. 하마란은 그런 남편을 돕고자 했지만, 아이를 가진 그녀에게 피로가 쌓이는 건 너무나 치명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오귀스트는 극구 말리고 있는 중이다. 어찌 보면 정말로 새로운 비서가 필요한 것은 형진이 아니라 오귀스트인지도 모르겠다.
규설과 힐리에타는 남편을 챙겨주는 하마란의 모습을 부러운 표정으로 물끄러미 훔쳐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또한 모르고 있었다. 지금의 모습만 봐서는 덩치는 좀 커도 자상하게 남편을 챙기는 신혼 부부로 밖에 보이지 않는 저 메이드복 차림의 여성이, 일단 전투 상황이 되면 상대하는 적조차 질려버리게 만드는 신뢰와 헌신의 추종자라는 사실을 그녀들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도 역시나 형진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꽤 만족스러운 식사시간이었다. 괜찮다고 하는 아란의 말에도 불구하고 우기다시피 해서 설거지까지 돕고 나오니, 어느덧 왕성의 주위는 완전히 어둠에 잠긴 상태.
“한 잔 할래?”
“응.”
밤의 왕성은 낮 시간에 비해 너무나 고요하다. 낮에 왕성 안을 떠들썩하게 만들던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 잠이 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힐리에타가 맥주 캔 하나를 꺼내 놓자, 규설은 기다렸다는 듯이 쥐포를 꺼내놓는다.
“또 쥐포야?”
“싫어?”
“그건 아니지만.”
힐리에타는 툴툴거리면서 마치 기도를 하는 듯한 모습으로 쥐포를 양손 사이에 놓고 잠시 힘을 주었다. 그러자 곧바로 맛있는 냄새가 주위로 퍼지며 딱 알맞게 구워진 쥐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내 힘은 쥐포 구우라고 있는 게 아니거든?”
“누가 뭐래?”
“쳇.”
힐리에타가 쥐포를 굽고 있는 동안, 규설은 맥주캔을 양손에 하나씩 쥐고는 마찬가지로 힘을 주었다. 그러자, 곧바로 맥주 캔에 송글송글 성에가 끼기 시작한다.
“자.”
“고마워.”
둘은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며, 밤하늘 아래서 맥주를 나누어 마셨다. 어차피 산군이나 노스페라투에게 있어서 맥주 캔 하나 정도는 술이라고 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새인가 이렇게 밤하늘을 바라보며 맥주를 함께 마시는 것이 어느 새인가 둘에게는 하루의 마지막 일과가 되어 가고 있었다.
“하아…”
문득 힐리에타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다. 물론 규설은 그녀가 한숨을 내쉬는 이유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도 힐리에타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 더 마실까?”
“하나 더? 관둬. 내일도 일 해야 하는데.”
“엄살은. 어차피 들어가서 또 마시는 거 알거든?”
“쳇… 하여튼 눈치만 귀신처럼 빨라서.”
툴툴거리며 힐리에타가 다시 맥주 캔을 꺼내는데, 문득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차피 왕성 안에 위험 요소가 있을 리는 만무하지만, 그래도 다 큰 처녀 둘이서 달밤에 마주 앉아 처량맞게 술을 마시고 있는 모습이 일상적인 것은 아닌지라 둘은 화들짝 놀라며 인기척이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응? 어디서 맛있는 냄새가 난다했더니, 너희들이었어?”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간편한 옷차림의 희망과 생명이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산책 중으로 보이는 형진과 그의 옆에 팔짱을 끼고 찰싹 달라붙어 있는 보호와 균형이 모습을 드러낸다.
규설과 힐리에타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닌 밤중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하필이면 전혀 꾸미지 않은 지금 상황에서 딱 마주칠 게 뭐람.
상대가 형진이 아니라면 어둠이라는 훌륭한 은폐 수단에 기댈 수라도 있다. 하지만 밤의 신인 형진에게는 이 정도는 어둠으로 치지도 않는다. 즉, 지금의 몰골이 여과없이 그의 눈에 그대로 생생하게 다 보인다는 얘기.
“안녕하세요!”
“죄송합니다!”
안녕하세요는 규설의 인사였고, 죄송합니다는 힐리에타의 사과다. 제자로서의 기분이 아직 남아있는 규설은 형진의 모습을 보자 먼저 인사를 해야한다는 사실을 떠올린 것이고, 왕성에 막 들어온 풋내기 수습 비서인 힐리에타는 밤중에 냄새를 피우고 있는 것을 사과해야한다는 점을 먼저 깨달은 것이다.
“쉿. 애들 잔다.”
“죄, 죄송합니다…”
물론 각각의 숙소에는 충분한 수준의 방음 설비가 되어 있어서 지금 여기서 둘이 술 먹고 고성방가를 해대도 아이들이 깨거나 하는 일은 없다.
“이거, 무슨 냄새야?”
“쥐포인데요…”
“쥐포? 나 먹어봐도 돼?”
“여기…”
거침없이 다가선 희망과 생명에게 공손하게 쥐포를 바치자, 그녀는 작은 조각을 하나 먹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달짝 지근한 게 맛있네. 이거 너희가 구운거야?”
“제가…”
“흐응.”
희망과 생명은 콧소리를 내며 둘을 아래 위로 훑어보더니 형진에게 말했다.
“얘들이지? 새로 받아들인 수습 비서라는 게.”
“맞아.”
“그랬군.”
희망과 생명은 물론이고 보호와 균형 역시도 둘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살펴본다. 관찰의 대상이 된 규설과 힐리에타는 물론이고, 형진마저도 어쩐지 난처한 기분이 되어 버린다.
“크흠. 이만 갈까.”
“응.”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형진이 말하자, 뭔가 한 마디 할 것 같았던 희망과 생명은 의외로 별 다른 얘기 없이 그의 옆으로 다가가 보호와 균형처럼 팔짱을 끼고는 이내 규설과 힐리에타의 눈앞에서 사라져갔다.
“후아아…”
완전히 인기척이 사라지고 난 뒤에야 힐리에타는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고, 규설 역시 십년 감수한 듯한 느낌으로 벤치에 앉았다.
같은 왕성에 살고 있으니 이런 일이 한 번쯤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설마 이렇게 공교로운 시점에서 그런 이벤트가 벌어질 줄이야.
“이씨… 그러니까 그만 마시자니까!”
“너 그런 말 한 적 없거든?”
“몰라! 나 그만 갈래!”
힐리에타는 빽 소리를 지르고는 얼른 도망치듯 자신의 숙소로 가버렸다. 규설은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자신들이 벌인 술자리를 깨끗이 치운 다음에야 숙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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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편째.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