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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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전야제
어쨌든, 형진은 크루그와 헤어져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일단 윗주머니에 숨겨둔 브라우니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정신을 잃고 있긴 하지만, 다행히 별 탈은 없는 모양이다.
“어디 보자.”
인벤토리에 들어간 고용계약서라는 것을 꺼내 보았다. 처음에는 황자가 그랬던 것처럼 새장 같은 것을 만들어야 하나 싶었지만 보상 목록에서 이것을 보는 순간 그 생각을 접었다. 공포와 죽음께서 그 타이밍에 이것을 내린 것에는 이유가 있을 터. 게다가 그 황자와 똑같은 짓을 한다는 것도 뭔가 좀 찜찜하다.
아이템정보
명칭 : 고용계약서
등급 : 상용
사용제한 : 없음
설명 : 공포와 죽음께서 공증하는 고용계약서. 특히 신뢰 관계가 성립되지 않은 환상종 등의 계약에 사용한다.
효과 : 고용 계약 성립.
“헤에…”
확실히 계약이란 건 중요한 일이다. 단순히 인간끼리의 계약에도 사기가 판을 치는 상황에서 다른 종족, 특히 인간과는 다른 환상종의 계약은 자칫 커다란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신뢰를 쌓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골치 아픈 일. 그럴 때 이런 식으로 신께서 직접 공증하는 계약사가 존재한다면 여러모로 편리할 것이다.
과연 공포와 죽음. 괜히 관음증이라고 의심한 것이 미안해질 정도의 세심한 배려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프라이버시는 좀 지켜주셨으면 하는 바램이.
어쨌거나 이것이라면 황자처럼 강제로 구속하는 방식이 아닌 서로에게 만족스러운 계약이 이루어질 수 있을 듯 하다. 형진은 일단 장비를 벗어서 인벤토리에 챙겨 놓은 다음, 조심스럽게 브라우니를 깨웠다.
“이봐. 일어나 봐.”
“우웅…”
몇 번 손가락으로 가볍게 흔들자, 브라우니는 그제서야 부스스한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기가 무섭게 와들와들 떨며 납작 엎드린다.
-사, 살려 주세요. 그럴 생각은 아니었어요. 우와아아아앙.
“…”
형진으로서는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다. 살려 달라는 거야 겁을 먹어서 그런 건가 싶으면서도, 그럴 생각이 아니었다면서 대뜸 우는 건 또 뭔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일단 울지 말고 얘기를 좀 해보지 않겠니?”
최대한 자상한 목소리를 내보려고 하기는 했는데, 영 자신이 듣기에도 뭔가 어색하다. 그냥 어색하기만 하면 모르겠는데 솜털이 올올이 곤두서는 느낌까지 드는 걸 보면 역시 자신은 이런 캐릭터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기껏 자상한 목소리를 냈지만, 브라우니는 눈치만 슬금슬금 볼 뿐 울음을 그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다들 자고 있는 시간에 이런 식이어서는 역시 민폐다.
“뚝!”
-뚝!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며 뚝 하고 소리를 지르자, 그제서야 눈물이 그렁그렁한 모습으로 울음을 그친다. 카트린은 잘만 따르던데, 얘는 또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울지 말고 알아듣게 설명을 해봐. 왜 다짜고짜 우는 건데? 기껏 새장도 부숴주고 구출해서 데리고 나왔잖아.”
그제서야 브라우니는 자신을 속박하고 있던 새장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닫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정말이네요? 어어? 어떻게 된 거지?
“어떻게 되긴. 내가 부쉈다니까.”
-아… 고, 고맙습니다.
브라우니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형진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물었다.
-공포와 죽음의 집행자 아니세요?“
“맞는데?”
형진의 대답에 브라우니는 한 번 더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이더니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저 잡으러 오신 거 아니었어요?
“데리러 간 건 맞지만, 잡으러 가다니. 너 뭐 죄라도 지었냐?”
-아, 아니에요. 그러니까… 음, 제가 좀 착각을 했나 봐요. 아하하하…
“…”
수상하다. 뭔가 확실히 숨기는 게 있다. 그것도 집행자에게 쫓길 만한.
그러고 보면 기사단 숙영지에서 그렇게 바들바들 떨던 것이나 황자의 궁에서 엉엉 울고 있던 것, 그리고 형진이 손을 내밀자 자지러질 듯 놀라며 기절해 버렸던 것도 모두 그런 이유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사실대로 말해. 자백하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
“괜찮아. 내가 원래 좀 공포와 죽음께서 어여삐 여기는 성도거든. 누굴 죽이거나 한 죄만 아니면 손을 써보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너, 설마 사람 죽였냐?”
아무리 손이 모자라도 사람을 죽인 요정을 데리고 다닐 수는 없다. 그런 생각에 살짝 살기를 내비치며 묻자 브라우니는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아,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럼 뭔데?”
-그게…
브라우니는 잠시 망설이다가, 형진이 눈을 부라리자 기겁하며 얼른 대답했다.
-실은… 집행자분이 일하시는 모습을 우연찮게 보고 말았어요.
무슨 큰 죄를 짓기라도 한 것처럼 브라우니는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푹 수그린다. 그러니까, 이 브라우니는 집행자의 처형 장면을 목격하고는 지레 겁을 먹고 집행자들을 피해 다녔던 셈이다. 어쩌면 황자의 궁에 들어간 것도 일부러가 아니었을까. 그곳이라면 집행자도 함부로 드나들기 어려운 곳이니까.
“그게 다야?”
-네.
“…”
확실히 집행자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암살자나 살인청부업자 같은 존재였다면 브라우니가 이런 식으로 반응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집행자는 엄연히 일반적인 법으로 처벌하기 어려운 자들이나, 법의 그물을 피해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을 법 위의 법인 신의 뜻을 통해 처단하는 자들이다.
사실 형진도 한 때는 집행자들을 일반적인 암살자들과 동격으로 생각했던 적이 있긴 하지만, 이제는 공포와 죽음이라는 신이나 그를 추종하는 집행자들에 대한 시각도 많이 바뀌었다.
대략의 사정을 파악한 형진은 대단한 일도 아니라는 듯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난 또 무슨 엄청난 죄를 저질렀다고. 그 정도는 내 선에서 처리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마.”
-정말요? 감사합니다!
“다만!”
-다만?
“오는 것이 있다면 가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은혜를 입었음에도 그것을 잊어 버린다면 어찌 훌륭한 요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지 않아?”
-그거야… 그렇죠.
“그래서 마련했지. 자, 이걸 보도록.”
형진은 그렇게 말하며 고용계약서를 내밀었다.
“이것으로 말할 것 같으면, 공포와 죽음께서 친히 공증하시는 고용계약서다. 들어 본 적은 있나?”
-와… 이게 바로 그건가요? 말로는 들어봤는데 보는 건 저도 처음이에요. 정말로 신께 사랑 받으시는 분이셨군요.
브라우니는 감탄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대충 둘러댄 말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반응하니 좀 머쓱하긴 하지만, 어쨌든 다른 세계에서 스카웃되어 온 건 맞으니까 딱히 거짓말은 아닐 거라 믿는다. 그렇죠? 공포와 죽음님.
“크흠. 그런 의미에서 말인데. 나와 계약을 맺어 보지 않겠나?”
-음… 전 꽤 몸값이 비싼데요.
브라우니는 슬쩍 그렇게 튕기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형진이 슬쩍 노려보자 언제 그랬냐는 듯 고개를 숙이며 작게 말했다.
-하, 하지만 은인의 부탁이라면 조금 저렴하게 계약을 맺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네요. 아하하하…
어색하게 웃는 브라우니를 보며 형진은 조용히 말했다.
“네 몸값이 비싸봐야 나보다 더 할까.”
-그거야… 집행자시니까요.
“그 얘기가 아니라. 그래. 직접 보여주는 편이 좋겠군.”
형진은 인벤토리에 담겨져 있는 요리를 꺼내 보였다.
-헉! 이, 이건…
이미 숙련의 경지에 오른 요리사이기도 한 브라우니는 형진이 꺼내보인 요리를 보자 대번에 그 진가를 알아보았다.
-서, 설마… 장인이셨나요?
“알아보겠나?”
-그럴 수가… 요리 전문가까진 꽤 봤지만, 요리 장인은 처음 보는 것 같아요. 혹시 실제로 요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요?
“어렵지 않지.”
형진은 브라우니를 데리고 주방으로 가서 불꽃과도 같은 손놀림으로 머랭을 친 뒤 그것을 이용해 수플레를 만들어 주었다.
-우, 우와아아.
예쁘고 먹음직스럽게 용기 위로 솟아오른 수플레의 모습에 입맛을 다신다.
“먹어봐. 수플레는 굽자마자 바로 먹어야 맛있다.”
-가, 감사합니다.
브라우니는 얼른 수플레에 달려들어 와구와구 먹어치우기 시작한다. 자기 몸보다도 큰 수플레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다.
“어때?”
다 먹기를 기다려 그렇게 묻자, 브라우니는 감격한 표정으로 형진에게 넙죽 엎드리며 말했다.
-스승님! 부디 저를 제자로 삼아주세요!
“엥? 제자?”
갑자기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브라우니는 얼른 다시 말했다.
-급료 같은 건 필요 없어요. 어차피 인간의 돈 같은 거 받아봐야 쓰지도 못하는 걸요. 일부러 가르쳐 주시려고 하실 필요도 없어요. 그냥 옆에서 제가 알아서 보고 배울게요. 네? 어떻게 안 될까요?
“…”
안 될 거야 없지만 너무 간단하게 일이 풀리니 좀 얼떨떨한 것도 사실이다. 하기야 요리가 뭔지 알아가는 시점에서 보자면 형진의 옆에서 그가 요리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큰 배움을 얻어갈 수 있긴 하겠지만 말이다.
“정말 그거면 돼?”
-네. 다른 건 필요 없어요. 어떻게… 안 될까요? 정 못 미더우시면 계약서 쓸게요. 네? 부탁드려요.
“흠…”
단순히 계약서로 묶이는 것보다 이런 식으로 신뢰 관계로 묶이는 편이 훨씬 좋은 건 사실이다. 모처럼 신께서 내려주신 귀중한 계약서이니, 반드시 꼭 이 기회에 쓰려고 들기 보다는 좀 더 유용한 다른 곳에 쓰는 것이 나을 것 같기도 하고.
“좋아. 하지만 만약 지금 한 말이 거짓말이라면 공포와 죽음께 청을 넣어서 끝까지 쫓아가 벌을 주고 말테다.”
-힉! 무, 물론이죠. 제 이름을 걸고 맹세할게요.
“이름? 네 이름이 뭔데?”
-그, 그건…
브라우니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형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자 화들짝 놀라며 어쩔 줄 몰라하더니 이내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 이름은 이아스마르노드록이에요.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시면 안 돼요. 요정의 이름은 중요한 의미가 있거든요. 사실 이렇게 인간에게 알려주는 것도 처음이에요. 아니, 인간과 이렇게 대화를 길게 나눠 본 것 자체가 처음이라고 해야겠네요.
확실히 환상종 중에는 그런 식의 설정이 걸려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다만 이렇게 간단히 알려줄 정도면 이름을 말한다고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거나 생사가 왔다갔다 하는 그런 식은 아닌 모양이지만.
“좋아, 이아스마르노드록. 그럼 내 제자가 되겠나?”
-네. 저 이아스마르노드록은… 당신을 스승님으로 모시고 예를 다하며 말씀을 따르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알겠다. 나 역시 널 제자로 생각하고 아끼도록 하겠다.”
형진의 말이 끝나자 둘 사이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빛의 가루 같은 것이 뿌려지는 느낌이 들더니 메시지 하나가 나타난다.
언약의 의식이 뭔지는 모르지만 메시지까지 나오는 걸 보니 단순한 의식은 아닌 모양이다. 뭐가 되었든 고용계약서 하나가 굳었으니 형진으로서는 이득이다.
“그럼 평소엔 뭐라고 불러야 하지? 그런 중요한 이름을 막 부를 수는 없잖아. 그렇다고 브라우니라고 부를 수도 없는 일이고.”
-그런 거라면 림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주시면 돼요.
이아스마르노드록을 어떻게 줄여야 림이 되는 건지. 어쨌든 형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
“좋아, 림.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한다.”
하지만 림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힉!
새파랗게 질리며 와들와들 떨고 있다. 다행히 황자의 처소에서 그랬던 것처럼 바로 기절해버리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어지간히 놀란 모습이다.
“왜 그래?”
-그, 그 손은 좀. 공포와 죽음의 기운이 서려 있어서…
“아…”
혹시 그래서였나. 노새고 당나귀고 간에 손으로 만지려고 할 때마다 경기를 일으키듯이 놀라 버렸던 이유가.
“미처 몰랐군. 앞으로는 조심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그리고, 내가 집행자라는 건 비밀이니까 함부로 말하고 다니지 말고.”
-물론이죠. 제가 이래봬도 입이 무거운 브라우니랍니다. 언약의 의식도 치렀으니 실수로라도 스승님의 말을 어기는 일은 없을 거에요.
그렇다면야 다행이지만.
다만 림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 좋을지 형진으로서는 고민되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언급하자 림은 한 마디로 그같은 우려를 일축했다.
-사람들 모두 브라우니가 있다는 것은 알지만 실제로 본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죠. 어째서일까요?
“글쎄.”
-저를 가두고 있던 새장 같은 것의 속박이 없는 이상, 저는 다른 이에게서 임의로 제 모습을 감출 수 있어요. 요정이 마음 먹고 숨는다면 미리 덫을 깔아두지 않는 이상 잡을 방법은 없답니다. 집행자 같은 분들은 예외지만요.
요컨대 설령 소문이 나더라도 림이 모습을 감추면 그 소문이 사실인지 증명할 방법이 없다는 뜻이다. 연약해 보이는 요정도 나름대로의 구명 수단은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물론 그렇다고 공연히 의심을 살 정도로 다른 사람들 앞에 대놓고 드러내 보여서는 곤란하겠지만.
-정 걱정이 되시면 이런 방법도 있구요.
그 말과 동시에 브라우니의 모습이 바뀐다. 여전히 작고 귀여운 건 마찬가지지만, 머리색과 분위기가 전혀 딴판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이 정도면 설령 의심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같은 브라우니라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어때요?
“훌륭해.”
어쨌든 이로써 브라우니 림은 형진의 제자이며 또한 요리 보조로 그의 곁에 머물게 되었다. 그렇게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고 밤이 지나 다시 아침이 되었을 때, 형진은 얼마 후 열리기로 했던 전야제가 황자의 죽음으로 인해 취소되었다는 연락을 받을 수 있었다.
수도에는 둘째 황자 레이그릭이 집행자에 의해 처형되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채 그날 정오가 되기도 전에 총괄 지부장 탁스 두겐으로부터 다른 이들과 함께 방문해 달라는 내용의 편지가 제랄딘에게 도착했다.
============================ 작품 후기 ============================
2017.1.29.- 요정에게 은신, 변장 능력이 있다는 내용 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