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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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규설과 힐리에타에게서 그녀들이 처한 상황을 전해들은 미엘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요안나와 제랄딘의 임신을 부추긴 것은 자신이 한 일이고, 지금 눈앞에서 울상을 짓고 있는 두 수습 비서도 자신이 형진의 곁으로 밀어 넣은 이들이다. 결과적으로 요안나는 임신에 성공했고, 제랄딘 역시 같은 결과를 내기 위해 고군분투 하고 있는 상황임을 고려하면, 어떤 식으로든 이와 같은 일에 원인 제공을 한 미엘이 이들의 문제에 책임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다만 문제라면, 자신이 과연 비서 일을 제대로 도울 수 있을까 싶은 점. 애초에 그런 식으로 해결될 문제 같았으면 규설이나 힐리에타를 굳이 수습 비서로 밀어 넣지도 않았을 것이다.
“계속 도와 달라고는 하지 않겠어요. 다만 저희들이 일에 익숙해질 때까지 만이라도…”
미엘의 그런 기색을 눈치 챈 규설이 급히 그렇게 단서를 달았다. 하다못해 미엘이 보조역할 만이라도 해주면 당장의 상황에 어떻게든 숨통이 트일 것이다. 게다가 애초에 지금 맡고 있는 일들은 요안나가 혼자서 해왔던 일. 아무리 일이 익숙하지 않다 해도 둘이서 한 명의 일조차 감당하지 못한다면 형진이 어떻게 보겠는가. 결국 최선은 최대한 빨리 자신들이 비서 업무에 익숙해지는 것뿐이고, 미엘에게 도움을 청하고자 하는 것은 그때까지 시간을 벌기위한 것이다.
규설의 말 뜻을 이해한 미엘은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두 분을 추천한 것이 저 자신이니, 모른 척 할 수도 없는 일이죠. 도와드리도록 할게요.”
“감사합니다!”
“아… 살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미엘이 가면 하엘도 간다. 바늘 가는데 실 가는 수준을 넘어, 이 정도면 거의 그림자 수준이다. 물론 아이들을 돌보는 일에서 완전히 손을 놓을 수는 없으니 분신들 가운데 몇몇이 잡무를 돕는 정도이긴 하지만, 미엘과 하엘의 분신들이 대거 업무에 참여하자 형진의 집무실은 순식간에 꽃밭으로 변해 버렸다.
“커흠. 그… 옷차림이 꽤 잘 어울리네.”
“그래요? 고마워요. 안 어울리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네요. 후훗.”
“…”
항상 메이드복 차림이던 아내의 다른 모습이 은근히 땡긴다. 동물 귀를 머리에 달고 검정 스타킹에 정장을 갖춰 입은 각각의 연령대의 아내라니. 형진의 변태성을 자극하기에 더할 나위 없다.
“흐흐흐, 미엘. 우리 잠깐 좀 쉴까?”
“일 해야 하는데…”
“괜찮아. 괜찮아. 평소에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 이 정도 짬을 내는 건 문제도 아니라고. 자, 이리 와.”
“아이 참…”
이제 와서 새로운 비서에게 손을 대는 것도 아니고, 원래부터 시간만 있으면 노닥거리는 부부 사이지만, 문제는 그 모든 걸 옆에서 지켜봐야만 하는 이들이 있다는 점이다.
“어리석었다. 이런 맹점을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크윽… 이제 와서 괜찮다고 할 수도 없고…”
제랄딘이나 요안나는 그래도 비서 업무를 본 지가 오래된 탓에 나름대로 절제가 있었다. 형진도 그녀들에게는 되도록 업무 중에는 치근덕거리는 일을 삼가는 편이기도 했고. 하지만 미엘이나 하엘의 경우엔 상황이 여러모로 달랐다. 원래부터 이벤트 성의 임시직이나 다름없는 업무이니 일 자체에 집중하기도 어려운데다 형진이 당연하다는 듯이 치근덕거리니 원래 비서의 일에 그런 것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도리어 열심히 임하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는 안 돼.”
“그래. 이대로는 안 돼.”
“더 열심히 해서, 얼른 미엘님과 하엘님을 집무실에서 몰아내지 않으면!”
“우리들은 정말로 말라 죽을지도 몰라!”
그들이 좀 더 대범한 쪽이었다면, 미엘이나 하엘이 그렇게 형진과 노닥거릴 때 은근슬쩍 끼어들어 성은을 받을 기회를 노려보기라도 하겠지만, 불행히도 그 정도의 주변머리나 과감함은 아직 그녀들로서는 떠올리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느닷없이 훈풍 모드로 들어서면 기겁을 하고 도망쳐 나오는 것이 고작이랄까.
하지만 규설과 힐리에타가 몰아내겠다고 다짐해봐야 그것이 가능할 리도 없는 일이다. 결국, 나중에 오랜만에 학교에 다녀온 제랄딘이 집무실의 모습을 보고서야 이 참상은 끝을 맺게 되었다.
“언니! 뭐하는 거에요!”
“어? 응? 그, 그게…”
결국 제랄딘에게 발각되고 나서야 한동안 핑크빛으로 물들었던 형진의 집무실은 다시 본래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고, 비로소 두 수습 비서들 또한 정상적으로 업무에 매진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처음에 엇나가긴 했지만, 단순히 잡무 수준의 일을 돕는데 있어서 미엘과 하엘의 능력은 매우 우수했다. 잡무의 범위가 너무 넓어져 버렸다는 것이 문제이긴 해도 어쨌든 형진 옆에서 이런 저런 일을 도왔던 경력이 어딜 가는 것은 아니니까.
“미안. 사실 나도 좀 정도가 지나친 거 아닌가 싶긴 했는데.”
“괜찮아. 따지고 보면 시도 때도 없이 밝히는 그 변태 남편 때문이니까.”
“하하…”
잠시 일을 쉬면서 단 둘이 티타임을 가지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제랄딘이 미엘을 업무 보조로 끌어들인 것은 이런 식의 기회를 잡기 위해서나 다름없는 일이다. 뭔가 얘기를 하긴 해야겠는데 실마리를 잡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마주 앉으니 어디서부터 얘기를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머뭇거리고 있자니, 문득 미엘이 질문을 던졌다.
“어때. 잘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
“응? 뭐가?”
“아이 말이야.”
“음… 그게…”
느닷없이 본론이 튀어나오자 제랄딘은 당황했다. 아무리 그래도 마음의 준비라는 게 필요한 법인데 너무 느닷없이 관련된 얘기가 튀어나와 버린 탓이다.
하지만 미엘의 입장에서는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그녀가 지금 여기에서 함께 마주 앉아 있는 것도 결국은 그 일 때문이니까.
“왜? 잘 안 돼? 혹시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으면 포트니아 테론님에게 가보자. 요안나님도 포트니아 테론님이랑 상담하더니 단박에 임신했잖아.”
여차하면 바로 손을 잡고서라도 끌고 갈 모양새다. 결국 제랄딘은 작게 한숨을 쉬며 금방이라도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드는 미엘을 다시 앉혀 놓고는 말을 꺼냈다.
“언니. 잠깐만… 내 얘기를 들어줘.”
“무슨…”
어딘지 모르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에 미엘은 혹시 뭔가 그녀의 몸에 문제라도 생긴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제랄딘은 미엘의 그런 표정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엄마와 언니와 선생님과 기타 모든 가족의 역할을 다 해주었던 이 귀여운 흑요호에게 사실을 털어 놓는 것은, 형진에게 내막을 전부 밝히는 것 만큼이나 힘겨운 일이다.
“사실은…”
하지만 그렇다고 더 이상 미뤄둘 수는 없는 일. 사실상 다른 세계의 별궁을 차지하고 들어앉은 다이애나를 제외하면 현재 형진의 반려들 가운데 제랄딘의 실체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은 미엘과 하엘 뿐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제랄딘이 최근 형진을 독점하고 있음에도 다른 이들이 별다른 말을 않는 것 역시 그런 상황을 고려한 탓.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런 상황을 즐기는 건 상대의 배려를 악용하는 일이나 다름없으니 슬슬 결말을 낼 때가 온 것이다.
“…”
미엘은 가만히 제랄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얘기들을 전해 들었다. 처음에는 갑자기 공포와 죽음이 파괴와 재생과의 사이에서 겪었던 일이 흘러나오자 이게 뭔 일인가 싶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마침내 제랄딘의 정체가 언급되자 미엘은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제랄딘의 얘기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란의 모습으로 형진을 만나고 다시 그 뒤에 벌어진 일들까지 이어지자 그녀는 벌린 입을 다물 수 없게 되었다.
“세상에.”
마침내 제랄딘으로부터 그 모든 얘기를 전부 전해듣는 일이 끝나자, 미엘은 혼란스러운 기분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여신님. 이런 사정이 있는 줄도 모르고…”
잠시 말이 없던 미엘이 정중하게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자 제랄딘은 당황해서 얼른 손을 내저었다.
“그, 그러지 마. 물론 이해하기는 어렵겠지만, 언니는 분명히 내 언니고 그러니까…”
“…”
미엘은 당황한 모습을 보이는 제랄딘을 잠시 빤히 바라보다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결국 제 눈앞에 앉아 있는 아가씨가 어릴 적부터 제가 봐왔던 그 아가씨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응.”
“중간에 사람이 바뀌거나 한 적은 없다는 말씀이시죠?”
“응.”
“지금까지처럼 대해 주길 바라는 것이겠고요.”
“쉽지 않은 일이란 건 알아. 억지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도. 하지만 난…”
다급하게 말을 이어가던 제랄딘은 문득 미엘이 손을 뻗어 그녀의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자 입을 다물어 버렸다. 다른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는 일이지만, 어릴 적에 제랄딘이 떼를 쓰고 그러면 미엘은 이런 식으로 그녀의 입을 다물게 하곤 했다. 아무리 상대가 어려도 귀족 영양에게 할 만한 행동은 아니고, 더군다가 그 정체까지 알게 된 지금 상황에서는 무엄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제랄딘은 마치 조건 반사라도 되는 것처럼 입을 다물어 버렸다. 미엘은 그런 제랄딘의 모습에 표정없는 얼굴로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곤란하네요. 귀족 아가씨에게 언니라고 불리는 것이라면 몰라도, 갑자기 지금까지 모시고 있던 여신님의 언니가 되어 버리는 건.”
“역시… 그런가?”
“하지만 저는 또한 공포와 죽음을 모시는 신실한 집행자. 여신의 뜻이 그러하다면 따를 수 밖에 없겠죠.”
“…”
제랄딘은 미엘의 표정 없는 얼굴을 더 이상 마주 하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식의 결론을 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시선을 피하는 순간 미엘의 표정에서 빙긋 미소가 지어졌다.
“대충 이런 식이면 되는 거야?”
“…”
“아무리 그래도 여신님한테 막 말을 놓고 그러면 다른 이들이 보기에 좋지 않을 것 같은데. 쿡쿡.”
어느 새인가 장난기 넘치는 표정으로 돌아온 미엘의 모습에 제랄딘은 그때까지 마음 속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무언가가 쑤욱 내려가 버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언니…”
울먹이는 표정이 되어 버린 것도 모자라 눈물마저 글썽거리는 제랄딘의 모습에 미엘은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신들도 이래저래 사정이 복잡하네. 하기야 진 같은 사람이 느닷없이 우주 전체를 다스리는 주신이 되어버리는 상황이니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긴 하겠지만.”
“그건… 그렇지.”
“중간에 사람이 바뀐 것도 아니고, 내가 모시던 아가씨가 처음부터 그대로 이어진 거라면 문제될 건 아무도 없어. 혹시라도 내가 막 화내고 그럴까봐 걱정했던 거야?”
“응…”
“바보.”
“…”
미엘은 가만히 손을 뻗어 제랄딘은 감싸 안았다. 그리고는 마치 아이를 어르듯이 토닥여 주었다. 상대적으로 덩치가 작은 미엘이 제랄딘을 감싸 안는 것이니 얼핏 어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일이겠지만, 둘에게는 이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잠깐.”
“응?”
“그럼… 이미 아이를 가지고서도 모른 척 지금까지 진을 독차지 하고 있었던 거야?”
예상치 못한 부분을 파고드는 미엘의 말에 제랄딘은 당황해 버렸다.
“그, 그게… 언니한테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몰라서.”
하지만 그런 식의 대답에 물러설 것 같았으면 애초에 파고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흐응… 일부러 뜸을 들이고 있었던 건 아니고?”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런 것 치고는 얼굴이 보송보송한게 아주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는 걸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는데.”
“…”
“그런 주제에 내가 진이랑 사무실에서 좀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냈다고 그렇게 면박을 주고 그랬단 말인지.”
“…”
입이 열 개 있어도 할 말이 없는 건 사실이지만, 어쩐지 추궁 받는 부분이 제랄딘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다. 정면을 단단히 틀어막고 있는데 갑자기 옆구리에 훅을 얻어 맞은 기분이랄까. 이래서야 제 아무리 제랄딘의 본신이 공포와 죽음이라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미엘은 그런 제랄딘을 바라보며 씨익 미소를 짓더니, 마침내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아가씨, 아무래도 벌을 좀 받으셔야 할 것 같은데요.”
“…”
느닷없이 가정교사 모드가 되어 버린 미엘의 모습에, 제랄딘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 작품 후기 ==========
두편째.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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